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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3). 모든 은택을 기억하라

시편 103:1-22, 역대하 32:25, 시편 8: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1-24

말씀내용
103편은 전형적인 찬송시입니다. 특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a,22b).”말로 시작하고 끝나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찬송의 주체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1-5)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 확장하고(6-18), 나아가 천군과 천사, 피조세계 전체로 확장합니다(19-22).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이렇게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나는 찬송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향해 외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찬송할 명백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필립 얀시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실망하는 이유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은 것, 즉 이생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가 초래하는 실망입니다. 그리고 이 실망은 번영 복음이 인도하는 종착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실망은 부당한 실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런 실망이 우리 삶에 적잖이 경험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 우리 삶에는 찬양과 감사가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기쁨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내 안에 찬송이 없다면, 혹시 이런 이유는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성경대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게 된다면,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은혜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태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내가 사랑한 시편』에서 103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시에는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주체할 수 없이 쏟아 놓는, 구속 받은 하나님의 한 자녀의 순정한 말들이 넘쳐난다.” 저는 이 저녁에 우리가 103편을 함께 상고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시인이 가졌던 찬송과 감사의 마음과 찬송의 말들을 넘치게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구합니다.


1. 솔로: 하나님의 모든 은택 (1-5; 대하 32:25)
먼저 우리는 1-5절에서 시인이 자신을 향해서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을 봅니다. 1-2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2).” 영혼을 향해, 내 속에 있는 것들을 향해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감정과 의지가 자리하는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라고 자신의 전존재를 일깨우는 촉구입니다. 만일 자신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시인의 마음에 찬송이 가득했다면 1-2절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내면, 전존재를 향해서 그렇게 외쳤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적잖이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향해서 외쳐야 하는 명령이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자신을 향해, 존재 전체, 의지, 이성 그리고 애정을 동원해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시인은 반복해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a)”고 말합니다.
그리고 2절 하반절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지요.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b).” 은택이라는 말은, 수당, 보수, 이익, 혜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은택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와 혜택을 베푸시는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모든 이익, 혜택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신앙은 종종 기억하는 것에 비유되고, 불신앙은 잊어버리는 것과 연결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은택과 말씀을 기억하는 순간에는 범죄할 수 없습니다. 범죄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기로 할 때 일어납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를 보지요.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대하 32:25).” 여기서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할 때, 잊는다는 것은 깜빡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하고 그분의 뜻에 불순종하는 의지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머리로만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택에 대한 반응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택에 대한 가장 합당한 반응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3-5절에서 모든 은택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A. 죄 용서(3a)
첫째는 죄 용서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3a).”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택 가운데 첫번째이고 가장 큰 것이며, 따라오는 모든 은택들의 기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품으실 것은 진노와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없는 것으로 여기셔야만, 그리고 의로움을 베풀어 주셔야만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모든 은택은 무의미합니다. 용서 없이 주어지는 모든 성공과 부는 하나님의 은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영혼을 죽이는 환경일 뿐입니다.
B. 치유(3b; 롬 5;12)
은택의 두번째는 치유입니다.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3b).” 두번째 항목에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자에게 죄 용서는 항상 있지만, 치유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그렇습니다. 죄 때문에 세상에 사망이 들어왔고(롬 5:12), 모든 질병의 치유는 부활 때 이루어질 최종 치유에 대한 예고이고 고대함이기 때문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치료를 지연하시는 한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생 동안 걸리는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받는다면, 그 치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택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C. 파멸에서의 구속 (4a; 룻 2:20)
은택의 세번째 항목은 파멸에서의 구속입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4a).” 속량하신다는 말은 가족의 권리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에는 실제적인 돌봄과 보호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에서 ‘기업을 무른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룻 2:20). 그러나 이 단어에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면, 구속한다, 구출한다는 의미가 더 강조됩니다. 파멸은 구덩이 또는 무덤을 의미하는데, 그 의미는 죽음이나 지옥으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 주셨기 때문에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얼마나 많은 전쟁을 경험한 사람입니까? 이것은 모든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D. 왕으로 대우하심 (4b; 시 8:5)
네번째 은택의 구체적 내용은 왕 대접, 왕 대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4b).” 관을 씌우셨다는 말은 왕이 쓰는 면류관을 씌워 통치자로 세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임금 놀이가 아닙니다. 앤더슨(A.A.Anderson)은 “하나님은 그들이 왕처럼 느끼게 만드셨다”고 의역합니다. 왕으로 느끼지 못하는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왕인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스튜어트 페로운(J. J. Stewart Perowne)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왕관을 짜셨다고 말합니다. 값진 금은 보석으로 왕관을 만들 텐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성품인 인자와 긍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모든 대우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말입니다. 처음 창조 때, 당신의 인자와 긍휼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신 인간을 구속하실 때 그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게 하셨고 당신의 의로움에 참여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그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대접을 생각할 때, 그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롯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시편 8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 8:5).”
E. 만족 (5; 시 37:4; 고후 4:16)
시인이 말하는 모든 은택의 마지막이자 최종 귀결은 5절입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5).” 우리는 만족이라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까?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바울 사도도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린도후서 4:16).” 이것은 모든 신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비록 세월을 속일 수 없어서 나이가 들어가고 육신은 쇠약해질지라도, 하나님께서 독수리 같이 새로운 힘을 주시는 젊음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성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바로 이런 은택들로 인하여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은택들을 우리도 인정한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향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코러스 (6-18; 출 34:6; 엡 3:18-19; 사 55:6-9)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찬송이 자기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향해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6-18절의 내용입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6).” 시인은 이런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의 시대로 독자들을 데려갑니다.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계시와 엄청난 사역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송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돌보시며 반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신 일들을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와 능력을 베푸시는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는 일에서도 당신의 공의와 함께 은혜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두번째로 찬송 받으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 이 진술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전형적으로 고백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입니다(느 9:17; 시 86:15; 103:8; 145:8; 욜 2:13; 욘 4:2). 이 고백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는데, 죄와 두려움에 잠긴 후대의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위안을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 말씀이 처음으로 모세에게 계시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섬겨 범죄한 때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출 34:6).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세번째 속성은 항상 비난하지 않으시며 영원히 노를 품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로다(9).”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난하시고 책망하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마땅히 받아야할 대로 우리를 대하시거나 우리의 죄악에 따라 갚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10).”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합당한 진노와 처벌을 주셨다면 살아남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인자하심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언약을 따라 이루어 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1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1).”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12-18절에서 밝힙니다. 시인은 특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11절에서도 말했지만, 13절과 17절에서도 반복해서 말합니다. 모든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것이 당신의 인자하심입니다.
그 인자하심은 먼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심으로 나타났습니다(12). 데렉 키드너는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합니다(엡 3:18-19; 사 55:6-9). 동과 서로 표현한 것은 실로 놀랍습니다. 동과 서는 나침반의 점(눈금)이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특정할 수 없는 무한한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로이 클레멘츠(Roy Clements)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한 번에 서쪽과 동쪽 두 방향을 바라볼 수는 없다…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우리의 죄와 우리를 두 개의 다른 지평에 놓으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죄를 바라보실 때 더 이상 우리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바라보실 때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바라보지 않으신다. 바울의 어휘를 사용하면 그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설명인지 모릅니다. 이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는 자신이 받은 용서가 완전하며,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를 다시 끄집어 내지 않으실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과 서의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면, 시인은 가족의 친밀함이라는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설명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3-14).” 시인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끓는 사랑으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인 헤세드를 표현합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어떻게 지음을 받았는지 아십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고, 먼지 뿐인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시인이 표현한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 실패하지 않는 사랑인 헤세드는 하늘 만큼 높고(11), 그 용서는 우리 죄를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며(12), 그 자비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아끼는 만큼이나 자애롭습니다(13).
또한 시인은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형편 없는 존재인지를 말함으로써 궁극적인 하나님의 은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하고 큰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사람은 흙이요 먼지이며(14), 풀이나 들의 꽃과 같은 존재이고(15), 지나가면 없어지는 바람(16)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한결 같지 않으며 허무한 것들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꺾어 놓으면 곧 시들어 쓰레기 통에 버려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릅니다(17).
시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백성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촉구합니다.


3. 우주적 코러스 (19-22; 롬 11:36)
끝으로, 시인이 촉구하는 대상은 천군과 천사,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로 확대됩니다(19-22). 19절은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시작된 시편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찬송으로 마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19).” 여기서 보좌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하늘은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땅과 모든 연약한 존재들 위에 엄청나게 높이 위치하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과 심판을 통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롬 11:36). 그러므로 “오직 주께만 모든 영광에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천사들을 향하여, 21절에서는 천군을 향하여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촉구합니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0-21).” 이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피조세계 전체를 향해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2).” 그리고 끝으로 자신을 향해 다시 한 번 촉구하면서 시는 끝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은 모든 세계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송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11,13,17)
여러분은 103편을 살펴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셨습니까? 성령님께서 시인을 통해서 여러분 각자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부르고 계심을 느꼈습니까? 우리는 물론 혼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만, 결코 나만의 찬송만으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103편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데렉 키드너의 말입니다. “그의 노래는 더 이상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그에게 배정된 파트에 추가되어 다른 모든 소리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자신에게 베푸신 은택을 축하하며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신다는 확신(시 5:3)을 담고 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는 존재들이지만, 우리의 존재를 아시는 하나님은 그 약함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과 같이 당신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기를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 인자하심을 깊이 누리는 길은 11,13,17절에서 반복적으로 가르쳐집니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외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의 모든 은택을 저버리지 않고 기억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은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주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우리 모두이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차오르고, 우리의 찬송은 하늘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