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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큰 사랑 때문에

에베소서 2:4-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2-24

말씀내용
1. 자신에 대한 인간의 무지
인간의 비극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무지는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신앙의 대상은 명백히 하나님 자신이지만, 신앙의 진정성과 깊이는 결국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깊어 진다는 말도 결국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깊이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지식은 결코 객관적 이론에만 그칠 수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지식이기에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이 됩니다.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근대 철학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또는 오늘날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자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모든 지식과 학문의 발달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현대인들의 본질적 이해가 정말 고대 철학자들의 이해를 뛰어넘을 만큼 다른 이해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그리 자신 있는 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가르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기본적인 태도를 넘어 절대적 의존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의 견해 정도로 치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될 때, 동시에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성탄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인간의 존재에 어떤 변화를 가지고 왔는지를 주목함으로써, 복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2. 인간 실존의 두 가지 상태 : 풍성한 긍휼하심 이전과 이후 (엡 2:1-7; 롬 5-6; 갈 2:20; 고후 5:15; 롬 14:7-8; 골 1:29)
에베소서 2장의 전반부에서 바울 사도는 인간의 실존의 두 가지 상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에서는 허물과 탐욕스러운 욕망 가운데 정죄 받은 인간의 불행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범죄한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함의 딜레마 가운데 거하는 존재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그저 자신의 올무에 빠진 인간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불순종의 아들들 즉 모든 불신자들 가운에서 역사하고 그들을 지배하며 조종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권세 아래서, 사람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할 뿐입니다. 이 삶은 창조주 하나님과 무관한 삶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1-3절은 전적으로 인간의 상태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4-7절에서 바울 사도는 물론 인간의 변화된 상태를 대조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여기서의 초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변화된 상태를 만들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를 개략적으로 소개합니다. 1-3절에서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으나, 4-7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받은 존재가 됩니다. 4절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라고 시작합니다. 우리 개역개정역에서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었지만, 본래 헬라어는 ‘그러나’를 쓰고 있습니다. 이 ‘그러나’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반전을 일으키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뉘우치고 돌이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전을 이룬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4절을 정말 좋아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에베소서 2:4).” 영어성경 NLT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But God is so rich in mercy, and he loved us so much,”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을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긍휼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풍성한 긍휼과 그 큰 사랑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풍성하고 넘치며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동기와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바울 사도는 5절과 7절에서는 은혜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고 7절에서 자비를 하나 더 말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는 세 개의 합성 단어를 만들어서 표현합니다. 함께 살리다(συζωοποιέω), 함께 일으키다(συνεγείρω), 함께 앉게 하다(συγκαθίζω) 입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죄와 정욕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종노릇에서 해방시키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높이 올리셨고, 진노의 자녀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랑을 받는 존재로 영광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이 나타나기 전의 우리의 비참한 실존과 그 긍휼하심이 나타난 이후의 우리가 누리게 된 영광은 비교할 수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싶어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됨으로써 누리게 되는 결과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과 정체성과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바울 사도는 ‘함께 살리다, 함께 일으키다, 함께 앉히다’라고 쓴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써 일어난 변화들입니다.
이 변화를 조금 더 설명하자면, 함께 살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믿는 신자들의 존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신자들의 존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다고 말합니다. 승천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을 때, 믿는 자들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그 보좌에 앉아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동사의 시제는 모두 과거 시제입니다. 왜 그렇게 바울 사도는 쓰고 있습니까? 우리의 존재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그렇게 완성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주신 객관적 사실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존재가 비록 이 땅에서 고단하고 피곤할지라도, 이미 이런 존재로 하나님 앞에서 서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이 사실에서 크나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단지 객관적 사실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신자들 안에서 행하신 중생의 역사로 말미암아 신자들 안에 새로운 본성을 심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는 자신 안에 새 생명이 주어진 것을 압니다.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을 알고 의식하고 살아가게 됩니다(갈 2:20). 완전히 새로운 그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게 만듭니다. 그의 목적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갑니다(고후 5:15). 살아도 죽어도 그의 목적은 오직 주님의 영광에 있습니다(롬 14:7-8).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새 생명을 살게 된 신자들은 이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고백하듯이,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의식하고 살아가게 됩니다(골 1;29).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때로는 비참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분과 지위를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시시각각 자신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어떤 관념이거나 철학일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동기: 긍휼, 사랑, 자비, 은혜 (요 3:16)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그 큰 사랑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가져온 철저한 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이 모든 일이 왜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까?”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성품 네 가지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풍성한 긍휼(4), 둘째는 그 큰 사랑(4), 셋째는 자비하심(7) 그리고 네번째로 지극히 풍성한 은혜(5,7)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네 가지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를 비참한 실존에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일으켜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동기이며 이유라고 소개합니다. 이 네 가지를 대표하는 말이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 ‘그 큰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어느 정도, 아담과 하와에게 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더 극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네 가지 사랑』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사랑하고 온전케 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불필요한 피조물의 존재 속으로 들어와 사랑하신다. 그분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파리떼가 붕붕거리면서 날아 다니고, 채찍으로 맞은 등이 고르지 못한 나무 토막에 눌리고, 못은 중심 신경을 관통하고, 시간마다 등과 팔에 고통이 가해지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거기 매어 달릴 것을 예견하시면서—하나님께는 시제 따위는 없다—우주를 창조하신다. 여기 사랑이 있다. 이것이 사랑을 발명하신 분, 곧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에게 모두 다 돌리심으로써, 우리를 진노와 저주에서 건짐을 받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요 3:16).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 본문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묘사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복된 표현인지요.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은 이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성품입니다. 긍휼이란 정확하게 반대 입장을 취하는 자에게 베푸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노를 주어야 할 대상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는 이 긍휼하심이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말하기 전에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풍성한 긍휼하심을 먼저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진노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But God is so rich in mercy, and he loved us so much,” 4절은 우리가 어떻게 그 비참한 실존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덕분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세번째로 설명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하심 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7).” 신자들은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풍성하게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 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격하시고 때리시는 대신, 우리를 온유함으로 다루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매일 실수하고 범죄하고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매를 맞아야 하고 형벌을 당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바울 사도의 마음 속에 으뜸을 차지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5,7,8절의 모든 문장에서 이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7)…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특별히 7절에서 바울 사도는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이 은혜가 지극히 풍성합니다.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건져낸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자비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전히 변함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자비와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잘난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자비와 은혜로만 설명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는 존재
오늘 우리는 성탄을 기념하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왜 하나님은 세상에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보내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죄와 비참에 빠진 우리를 향하여 진노를 퍼부으셔야 함에도 진노 대신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여전히 넘어지는 우리를 때리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타이르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은혜를 입은 우리가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은혜로 우리를 대하시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완성되고야 말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섬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온 세상에, 모든 세대에게 나타내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는 넘쳐 흐르는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는 우리 안에서 머물지 않고 우리 안에서 넘쳐 밖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온 세상과 여러 세대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맛본 사람들이지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본 사람,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자비와 은혜를 성품과 태도로, 삶으로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건져 내시려고 하신 동기가 긍휼과 사랑, 자비와 은혜였듯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며 사람을 사랑할 이유와 동기는 긍휼과 사랑, 자비와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성탄 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우시는 이 삶의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동기를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