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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8). 용서, 복음의 능력

창세기 50:15-21, 창세기 45:4-8, 마태복음 18:21-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2-10

말씀내용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은 죄인들의 인간 관계에서 피할 수 없이 일어나지만, 슬프게도 우리 안에는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업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심지어 용서는 가해자의 책임 회피에 일조하고 공격과 학대의 악순환을 지속시킴으로써 정의에 반하는 개념이기에 사라져야할 문화로 보기도 합니다. 미국의 작가이고 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스 브루닉(Elizabeth Bruenig)은 “분노 가득한 정의감과 사람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만들라는 욕구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 문화는 용서의 개념을 불쾌하게 여기고 용서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게 한다”고 하며 우려를 표합니다. 한국 문화는 다를까요? 거의 동일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용서와 정의를 양자택일의 개념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아마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이런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 용서의 성경적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1. 용서의 세 가지 세속 모델
먼저 세상에 말하는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경험하는 용서가 어떤 유형들인지 생각해보지요. 첫째는 값싼 은혜입니다. 이것은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모델입니다. 강조점은 피해자가 분노에서 해방되는 치료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라도 편하려면 용서하는 게 차리리 낫다고 여깁니다. 두번째 유형은 인색한 은혜입니다. 이것은 거래적 용서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점은 가해자가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데 있습니다. “네가 내 용서를 받으려면 평생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유형은 은혜 없음입니다. 이것은 아예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모델입니다. 강조점은 용서를 배제하고 피해자를 위해 정의를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세번째 모델은 엄밀하게는 용서 모델이라고 할 수 없지요.
이 세 유형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용서의 수직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용서는 이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이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용서는 ‘값비싼 은혜의 용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에는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 공존하고, 수평적 차원의 용서는 수직적 차원의 용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2. 요셉의 용서 이야기 (창 45:4,5,7-8; 50:15-21)
이제 본문을 살펴보지요. 본문은 창세기의 마지막 장이고, 요셉의 생애의 마지막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야곱은 비뚤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편애는 결국 요셉의 이야기를 엄청난 비극으로 인도합니다. 열 일곱 살의 요셉은 인신매매단이 아닌 형들에게 붙잡혀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노예가 되고 거기서 신임을 얻게 되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강간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되지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석이 그대로 이루어져, 고대 근동은 7년의 풍성한 수확에 이어지는 엄청난 기근을 7년 간 겪게 되면서, 요셉은 곡식을 사러 온 형들과 재회하게 되지요. 결국 요셉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입니다. 형들의 뉘우침을 확인한 요셉은 형들에게 저기 정체를 알리고 그들을 용서합니다. 이 용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4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말하지요.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요셉은 그들의 죄를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세기 45:5, 7–8).” 우리는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수평적 용서가 수직적 차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거대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을 요셉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여기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과 모든 모든 식구들을 애굽으로 초청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를 다 마치자, 형들에게는 다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요셉의 용서는 아버지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요셉이 참았던 것이라면, 이제 아버지가 돌아기신 지금 그가 우리를 향해 복수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궁색하게 말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세기 50:16–17).”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요셉의 용서가 용서받은 형들에게 확신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들은 마치 종처럼 요셉의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창 50:18).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의 말은 성경적 용서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요셉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형들에게 말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창 50:19). 팀 켈러는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충분히 겸손했기에 용서할 수 있었다. 만약 용서하기가 힘들다면 그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죄인임을 망각한 탓이다. 요셉의 말은 이런 뜻이다. “내가 노여움을 풀지 않으려면, 당신들의 재판관이 될 자격이 있다고 자신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누구든 계속해서 원한을 품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한다. 나는 심판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켈러, 용서, p.205).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겸손했기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로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말합니다(창 50:20). 역시 팀 켈러의 설명입니다. “요셉은 충분한 기쁨이 있어서 용서할 수 있었다. 용서하려고 “형들이 한 일은 그렇게 까지 나쁜 일은 아니었어요.”라고 얼버무린게 아니라 “당신들의 행위는 악했습니다'라고 단언한다. 진실을 말한 것이다. “당신들의 악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세워 주셨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켈러, 용서, p.206).
세번째로 요셉은 행동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용서 받은 자들의 확신에 확실히 도움을 줍니다. 요셉은 “당신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1).”라고 하며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했습니다. 팀 켈러의 설명입니다. “용서는 마음으로 느껴지기 이전에 베풀어야 할 때가 많다. 대개가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내 분노가 다 사라졌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듯 당신을 대하겠다. 당신의 죄를 더는 기억하지 않겠다. 당연히 그 죄가 생각날 때도 있겠지만 거기에 입각해서 행동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 삶을 주관하는 실재는 그 죄가 아니다.”(켈러, 용서, p.206).
요셉의 용서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형들을 향한 요셉의 수평적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정하는 수직적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용서의 조건: 내적 겸손과 내적 부요 (마 18:21-35)
그러나 여기서 용서와 관련하여 얻는 또 하나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내적 가난과 내적 부요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것은 수직적 차원의 용서를 경험하게 될 때, 용서받은 사람 안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먼저 내적 가난을 설명하지요. 이것은 겸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물음으로써 자신의 겸손, 내적 가난을 보여줍니다(창 50:19).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자신의 죄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마 18:21-35). 한 임금에게 만 달란트 빚진 고위직 신하가 있었습니다. 아마 영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에 대한 결산을 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만 달란트는 과장법적 표현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금액은 국가의 차원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이었습니다. 만 달란트는 이 신하가 처해있는 무한한 절망적 실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임금에게 완전히 탕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신하는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고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베푸는 대신 그 동료를 옥에 가두게 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임금의 신하들이 임금에게 말하자, 임금은 노하여 그 빚을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입니다. 임금이 이 신하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18:33).”
이 비유는 먼저 용서의 수직적 차원을 보여줍니다. 수직적 차원의 용서는 용서 받은 자 안에 내적 가난, 겸손을 만들어냅니다. 무한한 죄의 용서를 받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그 사람은 은혜를 몰라. 아무리 용서를 해주어 봤자 소용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 태도에는 내적 가난, 겸손이 없습니다. 자신을 무한한 은혜를 입은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우리 안에는 내적 부요가 있어야 합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신하는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여, 당신은 나를 망칠 수 없네. 내 참 부요와 재화를 앗아갈 수 없어.”라고 말입니다. 마음이 빈곤하고 정서가 불안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울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아는 내적 부요를 아는 사람은 웬만해서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의 참된 정체성과 보화와 자존감을 건드릴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을 기뻐할수록 더 빨리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려면, 거기에는 수직적 차원의 용서를 경험하는 일이 전제되고, 이 수직적 차원의 용서는 우리 안에 내적 가난과 내적 부요를 만들어냄으로써 수평적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이 두 가지가 있었고 그래서 그가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요셉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4. 용서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용서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근본적인 답부터 짚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우리가 ‘복음 중심 삶’에서 처음에 보았던 그림, 복음의 확장선에서 자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욱 인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죄성을 더욱 깊이 알게 되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는 축소되어 가기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내적 가난과 내적 부요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비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다고 느끼지 않고 한 달란트 정도 탕감 받았다고 느낍니다. 한 달란트만 해도 6000 데나리온이고 한 사람의 노동자가 20년 한 푼도 안 쓰고 벌어서 모아야 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가 탕감 받은 것이 한 달란트가 아니라 백 달란트, 아니 천 달란트, 만 달란트였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대상과 그 크기도 점점 더 자라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최고의 자리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논리는 “내가 너를 이미 용서했다. 그러므로 너도 남을 용서해라”입니다.

A.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평가
그리고 주님의 이 비유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 맞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에 인색해질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의 구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들 때는 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여 상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저 사람이 저지르는 것 같은 일을 한 적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당당하고 베푸는 자로 자신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주었는데 네가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비유는 “그게 아니야. 너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평가로 그 사람과 너를 비교해야 해.”라고 말합니다. 맹자가 했던 말 중에 “오십 보, 백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두 병사가 도망을 하는데, 오십 보를 도망한 병사가 백 보를 도망한 병사를 비웃더라는 겁니다. 둘 다 도망간 것은 똑같은데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한,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용서의 수평적 차원은 수직적 차원에서만 비롯되는 것입니다.

B. 우리의 모든 관계는 삼각 관계다.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에 이어 또 하나 우리가 의식해야 하는 적용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는 삼각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사실로 인정할 뿐 아니라, 언제나 의식해야만 하는 사실입니다. 가장 가깝게는 부부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관계에서도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우리는 나와 내 배우자의 관계를 일대일의 관계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 나와 내 배우자의 관계로 의식해야 합니다. 주님의 비유를 약간 고쳐서 이렇게 생각해보지요. 임금에게서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신하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을 때, 마침 그 임금이 바로 옆에 있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이 신하는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당연히, “아, 내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친구여! 안심하세요. 나는 백 데나리온을 더 이상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을 겁니다.
이점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특히 내가 용서해주어야 할 대상을 만났을 때, 태산 같은 나의 죄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 곁에 계셔서 보고 계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삼각 관계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든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관계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더 깊이 적용하고 용서를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용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 보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복수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용서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냅니다. 복음은 용서에서 그 능력을 보여줍니다. 만일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능력을 알지 못하는 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용서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은 채, 편한대로 잊어버리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용서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압니다. 용서를 베푸는 일은 순간일 수 있지만,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걸리며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내면의 과정입니다. 이것을 팀 켈러는 선물을 외상으로 사 주는 것에 비유합니다. 용서 받는 쪽에서는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선물을 받아서 쭉 누리게 되지만, 용서를 하는 쪽에서는 할부로 사서 준 선물이기 때문에 그 비용을 다 갚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감당해야 하는 부담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낭비되는 과정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더 깊이 경험하는 값비싼 과정이기에 소중합니다.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의 레아 공주 역을 했던 배우 캐리 피셔(Carrie Frances Fisher)는 일생동안 아버지를 용서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용서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말을 이렇게 합니다. “원한 즉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자기가 독을 마시고선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 이렇게 비참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복음을 통하여 원한,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건져 내십니다. 이 복음을 매일 여러분의 삶에서 기억하고 그 능력을 경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