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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1). 완전한 마음

시편 101:1-8, 열왕기하 11:17, 사무엘하 6: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11-29

말씀내용
우리가 상고할 시편 101편은 정치적인 의미를 꽤나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정치가 관여됩니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그렇습니다. 다만, 국가 정부와 관련하여 정치를 말하다 보니, 정치는 거짓과 협잡과 온갖 더러운 것들이 엮여 있는 것으로 보통 이해됩니다. 하지만, 본래 정치는 도덕적으로 중립적 개념이고, 문제는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인데, 타락한 인간의 죄성은 주어지는 권력의 크기 만큼 타락할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기에 위험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성경이 정치에 대해 말씀하는 관점을 잘 배우고 우리의 삶에서 적용함과 동시에, 우리의 소망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그리스도인 통치자들의 책임과 시민 정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마르틴 루터는 이 시편에 대해 무려 80페이지나 되는 강해를 남기면서 101편을 ‘정치인의 거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뿐 아니라, 영국 왕 제임스 1세(1566-1625)가 조지 빌리어스(George Villiers)를 총애하여 버킹엄 공작으로 등용하였을 때, 그가 왕실의 인재 선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예견한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에게 시편 101편(6-7절)의 말씀을 보내어 인재 등용의 기준으로 가질 것을 충고했습니다. 물론 무능할 뿐 아니라 정직하지도 않았던 빌리어스는 이 조언을 무시했고 궁정 생활의 실패 후, 결국 암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조지 빌리어스에게 조언하고자 했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을 등용할 때, 혹은 지도자를 선출할 때, 교회에서 직분자를 청빙하거나 선출할 때 다윗의 이 기준이 적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1. 왕의 결심 (2; 왕하 11:17)
데렉 키드너는 이 시편의 제목을 ‘왕의 결심(A King’s Resolve)’라고 붙였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의 통치 기준과 목표에 관한 자신의 결심을 이 시편에 기록했습니다. 데렉 키드너의 말대로, 이것은 바리새인의 교만에서 나오는 결심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정직하게 깨끗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왕의 관심에서 나온 결심입니다. 다윗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집은 가정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왕의 관점에서 자기 나라, 정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완전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완전함(תֹּם)’은 무엇일까요? 영어성경들은 이 단어를 integrity 라고 가장 많이 번역했습니다. 이 영어 단어도 우리 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 쉽지 않기에 종종 인테그리티라고 영어 그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정직하고 도덕적 원칙이 확고한 자질, 즉 도덕적 강직성, 온전하고 나뉘지 않은 상태, 정직하고 변하지 않는 확고한 도덕적 원칙.”
인테그리티는 지도자의 자질로서 가장 우선적인 자질로 이해됩니다. 어떤 집단의 지도자든지, 이런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그 집단은 망하는 길로 갈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가치는 지도자의 도덕적 자질로서 인테그리티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Competence Not Character’(인격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슬로건이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의 미국은 더 이상 지도자의 덕목으로 인테그리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집단적으로 망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지도자의 덕목으로서 인테그리티 뿐 아니라, 지도자의 결심도 중요합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할 때 만든 시편입니다. 다윗은 온통 정직하고, 단호하고, 경건하며, 교활함이나 흔들림의 흔적이 없고, 주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고, 그는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모든 일에 주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군주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이 시를 경건한 결심의 시(the Psalm of Pious Resolutions)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성경적 개념이 하나 있는데, 언약의 개념입니다. 우리는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과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맺으시는 은혜언약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려는 언약 개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삼각적 언약 개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달랴의 시대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유다 왕 여호람과 결혼하여 유다의 왕비가 되었다가, 아들 아하시야 왕이 죽자 일가 자손을 몰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6년을 통치한 유다 역사 유일의 여왕이 아달랴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 여호야다 부부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숨겨 양육하였다가 아달랴 통치 7년째에 반정을 일으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이때 여호야다는 왕과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맺게 합니다. 열왕기하 11:17입니다.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열왕기하 11:17).”
이 언약의 개념은 이스라엘 국가 통치가 존립하는 근거가 되었고 왕에게나 백성 모두에게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왕의 언약은 왕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인자와 정의로 다스린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권을 보호하고 유지하여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은 백성들이 왕의 다스림을 받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처럼 그 권위에 복종하여 따르고,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평안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왕과 백성 사이의 언약은 왕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자와 정의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왕의 다스림에 복종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의 결심이 이 언약에 기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왕이 학정을 행하여 언약을 깨뜨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왕의 언약 뿐 아니라, 왕과 백성의 언약도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백성들은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역사 속에서 대두될 때마다 백성들이 가지는 저항의 권리와 관련하여 언약 개념은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하여튼, 다윗은 하나님과 왕의 언약, 그리고 왕과 백성의 언약을 충성스럽게 지키기 위해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2. 가치에 헌신하는 지도자(1-2; 시 89:14; 삼하 6:9)
먼저 1절입니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1).” 다윗은 여기서 NIV, NLT 그리고 우리말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주의 인자와 정의’를 노래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자와 정의’는 물론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시 89:14)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근간입니다. 인자와 정의는 어느 하나만으로 온전할 수 없는, 가장 합당한 통치의 기준이고 가치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바로 이 ‘인자와 정의’가 왕으로서 자신의 통치의 기준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결심을 피력합니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이 결심은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열망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직한 지도자로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완전한 길’을 주목하겠다고 합니다.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고서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그 길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말을 주목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다윗이 이 말을 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왕인 다윗이 제일 먼저 행한 공적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언약궤의 임재는 하나님의 임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인 다윗은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 오기 위해 무리 3만 명을 뽑아 거대한 행진을 거행하지만, 소들이 뛰는 바람에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흔들릴 때 웃사가 언약궤를 잡아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잔치는 거기까지였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삼하 6:9).”라고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바로 이 때 다윗이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보내져 석 달을 지 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한 자기가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왕위에서 다스리는 내내, 전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완전한 길’을 주목하며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합니다. 다윗이 ‘내 집 안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가정에서 궁정, 그리고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속해 있는 단위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통치의 가치를 정하고 그 가치에 헌신하는 왕 다윗을 봅니다.


3. 결심의 세부적 내용 (3-8)
이제 3-8절은 결심의 세부적 내용들입니다. 다윗은 보통의 정치인들이 하듯,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지했으며 자신의 말대로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나는 이런 자들을 참을 수 없고, 이런 자들을 등용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또한 긍정적으로는 ‘이런 자들을 등용하여 함께 하겠다’고 말합니다.


A. 이런 자들을 참을 수 없다 (3-5,7-8; 고후 6:15; 신 13:13; 삿 19:22; 잠 21:4; 28:25; 시 18:27)
먼저 부정적 진술, 3절입니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3).” 비천한 것을 눈 앞에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비천하다는 말은 ‘악하고 쓸모없으며 무가치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무가치하고 천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듯, 다윗도 그런 것을 자기 눈 앞에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교자들의 행위를 미워하겠다고 합니다. 배교자는 히브리어로 벨리알인데, 고린도후서 6:15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라고 할 때 헬라어로 음역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다는 것인데, 무가치한 존재와 악마 사이의 불량배(신 13:13; 삿 19:22)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정부에서 가치있는 공직을 수행할 수 있겠으며, 인자와 정의의 가치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이런 자들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짓을 묵인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4절입니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4).” 사악하다는 말은 ‘뒤틀린, 마음이 비뚤어진, 굽어진, (선택과 애정이) 왜곡된’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마음은 선하고 참되고 도덕적으로 옳다고 알려진 것에서 비뚤어져 있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왜곡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사악한 마음은 정상적으로 보입니다. 60초면 알 수 있을 만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정치권으로 가면 전문가 그룹이 60일이 걸려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로 변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정치권에 만연한 도덕적 회피주의인데, 이것이 사악한 마음입니다. 악한 일은 가치 없는 일인데, 그런 일들을 알지 않겠다고 합니다. 안다는 말은 ‘동참하다, 허락하다, 간섭하다’라는 뜻입니다. 악한 일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다윗은 궁정에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5절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5).” 여기서 다윗은 사람의 성품을 입과 눈으로 설명합니다. 입은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로 설명되고, 눈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로 설명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관리로 일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심입니다. 사람을 뒤에서 은근히 헐뜯는 행위는 은밀히 행해지고 서서히 확산되어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자를 단지 등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멸하겠다고 말합니다. 헐뜯는 일은 언제나 교만과 함께 갑니다. 그래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가 이어집니다. 눈이 높다는 표현은 교만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잠언과 시편에서 언급됩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언 21:4).”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편 18:27).” ‘마음이 교만하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마음이 넓다’인데, 이 말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언 28:25).”고 할 때도, ‘많은’이 같은 단어입니다.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뒤에서 은근히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마음의 교만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사람들, 이웃을 은근히 헐뜯고 눈이 높아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분별해 낼 것이고, 그들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는 그런 자들을 참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7절로 갑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7).” 다윗 왕은 거짓을 행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를 배척하겠다고 말합니다. 거짓된 말과 행위, 인격은 그야말로 다윗이 2절에서 말한 완전한 마음, 인테그리티와 정반대에 있는 자질입니다. 왕은 거짓을 행하는 자가 자기 집 안에 거주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궁정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을 수 없다는 겁니다. 또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고 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어떤 것이든 권위와 명예를 가지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왕은 그런 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8절입니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8).”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라는 표현은 왕이 오전에 제일 먼저 재판을 주재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을 언급합니다. 왕은 송사를 듣고 재판을 하는 일을 통해 여호와의 성에 인자와 정의가 가득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악인들의 행악은 결국 예루살렘 성 안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악인들의 존재는 끊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말하는 범주가 집에서(2,7) 도성 전체로 향하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나라가 인자와 정의가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 말합니다.


B. 이런 사람들을 원한다(6)
이제 긍정적인 면에서 다윗은 이런 사람들을 중용하겠다고 합니다. 6절입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다윗은 먼저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등용하겠다고 말합니다. 충성된 자는 신실한 사람이고 다윗과 함께 인테그리티,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들, 충성된 자들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라고 강력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로 내 곁에 머무는 조력자들, 종들이 되게 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백성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완전한 길’을 언급합니다.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른다’는 말은 ‘섬기다, 시중들다, 돕다, 경배하다’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충성된 자,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는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고 인자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왕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수 7: 행 5:1-11; 잠 28:12,28; 29:2; 왕상 18:3; 사 9:6-7; 계 22:20)
다윗은 모든 통치자, 다스림의 권위를 가진 자가 견지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와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인자와 정의입니다. 이 가치를 위해, 다윗은 모든 악을 뿌리뽑는 일을 가차없이 행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것은 다스리는 자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일 뿐 아니라, 작은 악이 허용되기 시작하면 왕국을 무너뜨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 초기에 하나님께서 아간의 사건을 왜 엄중하게 다루셨으며(수 7) 초대교회 형성의 초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무섭게 다루셨는지를(행 5:1-11)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 왕의 결심을 보면서, 지도자에게 있어서 인테그리티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이런 지도자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생각해봅니다. 단지 정치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 폭력의 문제, 교회 내의 타락한 목사들의 문제, 직장 내의 지도자들의 부패 행위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끊임 없이 미디어를 통해 전해집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지도자들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술과 능력만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완전한 마음, 인테그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충성된 자를 볼 수 없고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들이 사라져 갑니다.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언 28:12,28;29:2).”는 말씀들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을 보면, 타락해도 너무 타락했다고 느껴집니다. 한결같이 비천하고 사악하며 거짓을 행하는 비루한 자들만을 정부 요직에 모아 놓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합의 궁정에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신하 오바댜가 있었듯이(왕상 18:3), 거듭난 정치인들이 시편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공기업이나 조직의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한국교회 안에 목사의 인테그리티 결여 때문에 신음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가정의 모든 가장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모든 지도자는 자신의 삶에서 악을 제거할 뿐 아니라, 악하고 패역한 자들을 끊어내야 할 책임을 가진 자들입니다. 저는 로버트 머리 맥체인 목사가 목사로서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임무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거룩함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패하는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이렇게 결심했던 다윗도 실패한 왕이 되었다는 놀랍도록 슬픈 사실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범죄 뿐이 아닙니다. 다윗 왕은 교활한 속임수로 왕국의 분열과 격변을 가져온 군대장관 요압을 처리하지 못했고, 교활한 참모였고 나중에는 압살롬의 반역을 도왔던 아히도벨을 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두 아들, 압살롬과 아도니야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결한 결심을 했던 다윗은 실패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이 오셔서 인자와 진리로, 그리고 완전한 마음으로 당신의 통치를 이루셨고 영원히 이루실 것입니다. 실패 없이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들의 실패와 함께 망국을 향해 기울어져 가는 조국 유다의 현실 속에서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6–7).”
우리는 이 땅의 정치에 소망을 두지 않고, 때로는 자격 없는 지도자들 때문에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궁극적 소망을 그리스도께 두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