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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0). 우리가 영광의 문에 들어갈 때

시편 100:1-5, 사사기 51:11, 히브리서 4: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11-22

말씀내용
시편 100편은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저는 이 시편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제 장례식의 본문으로 삼아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0편이 특별히 성도의 죽음에 맞추어진 시편은 아닙니다. 이 시편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의 예배와 관련된 시편이고, 특히 [감사의 시]라는 표제는 시편 전체에서 유일하게 100편에만 붙여진 표제입니다. 그러나 100편 외에도, 감사를 주제로 하는 시편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제오권이 시작하는 107편이 그렇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107편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와서 추수감사절에 자신들의 경험을 담아 고백했던 특별한 시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에 오기 전, 노숙 방랑, 투옥, 박해로부터의 구출을 경험했고, 신대륙으로 오는 동안 바다에서 겪은 위험, 굶주림,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 등을 겪었습니다. 이 시편은 그 경험들을 담아내고 있기에, 그들에게 107편은 특별했던 것입니다. 107편과 함께 특별히 [감사의 시]라는 표제를 지닌 100편은 그들이 추수감사절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읽곤 했던 시편이었습니다. 일부러 시기를 맞춘 것은 아닌데, 마침 내일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이고, 우리 교회는 특별히 지키지 않지만 지난 주일이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킨 주일이라는 점에서도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감정이 조금 특별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리처드 필립스가 100편을 추수감사절을 위한 맞춤 시편이라고 말했다는 점에서도 오늘 한 해를 마감하는 계절에 전하기에 시의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편 100편은 감사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는 100편을 묵상하며 ‘참 장엄하다 그 보좌(Before Jehovah's Awful Throne)’라는 아름다운 찬송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까지 부르던 예전의 ‘새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던 이 찬송은 슬프게도 지금의 찬송가에는 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우리가 영광의 문에 들어갈 때]라고 붙였는데 여러분은 이 제목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영광의 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물론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성도가 죽음의 문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말씀드렸듯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시편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적용에서, 이 시편을 성도의 죽음과 연관지으려고 합니다. 본문 4절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라고 말합니다. 설교제목은 여기서 온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 구절에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성소로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그의 문을 지나 그의 궁정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중의적 의미로 이 시편을 적용할 것입니다.
100편의 구조를 보면, 두 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3절이고 후반부는 4-5절인데, 각각의 연은 감사하라는 요구와 그 이유의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즐거운 찬송, 기쁨의 섬김으로! (1-3; 창 2:5; 요 2:1-12; 고전 10:31; 사 51:11; 계 6:16; 히 4:16; 유 24; 행 17:23; 롬 11:36; 요 10:11-12, 14-16)
먼저 전반부인 1-3절을 보지요. 1-2절은 찬양하라는 부름이고 3절은 찬양할 이유를 말합니다. 1-2절에는 명령형 동사가 3개 나옵니다. ‘부를지어다’, ‘섬기며(섬길지어다)’, 그리고 ‘나아갈지어다’입니다. 이 세 명령형 동사와 함께 4절에 나오는 명령형 동사들이 모두 복수 명령형이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 시편이 성도 개인을 향한 말씀이라기 보다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교회 즉 예배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번째로, ‘부를지어다’를 보겠습니다.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찬송이 아니라, 경이로움과 경탄의 반응으로 부르는 찬송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정, 그 임재로 들어가는 백성의 정상적 반응이고 태도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여호와가 모든 땅 위에 절대 주권자로 인정받으시되, 찬양하는 큰 소리, 충성을 외치는 소리 혹은 대대적으로 경축하는 팡파레 소리 가운데 인정을 받으셔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온 땅’에게 이 명령을 합니다. 3절에서 보겠지만,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찬송을 돌리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두번째로 살펴볼 동사는 ‘섬기며(섬길지어다)’입니다. 여기서 주어지는 조건은 ‘기쁘게’입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동사는 일상적인 노동을 의미하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에도 사용되지만, 동시에 예배의 맥락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예배 행위와 노동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2:5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세기 2:5).” 여기서 땅을 ‘간다’는 동사가 ‘섬긴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범죄한 후에는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로부터 단절되었지만, 범죄하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의 삶은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시려는 동기를 그대로 드러내듯이,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죄가 이 기쁨을 깨뜨릴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기쁨은 신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만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정서는 바로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첫번째 표적으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요 2:1-12),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류가 죄로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시켜 주려고 오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할 때(고전 10:31),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세번째로 주목할 단어는 ‘나아갈지어다’입니다. 이 단어는 4절에서는 ‘들어가며’로 번역된 같은 단어입니다. 나아가고 들어오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고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때 ‘노래하면서’ 나아가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여기서 ‘노래하면서’라는 단어는 그냥 밋밋하게 ‘노래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뻐 뛰며 환희로 소리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때 너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껑충껑충 뛰며 찬송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이사야 51:11).”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기에, 그럴 자격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심판의 날에 하듯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요한계시록 6:16).”라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모든 것은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히 4:16),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설 수 있습니다(유 24). 2절에 대한 스펄전의 설명은 놀랍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하나님은 행복한 백성이 경배해야 하며, 쾌활한 정신은 그분의 본성과 행위, 그리고 그분의 자비에 대해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감사와 일치한다.”
3절은 1-2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라는 명령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여기서 시인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은 ‘배운다, 알게 되거나 확신을 갖게 되다, 인정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찬양의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분을 찬양하고 섬길 수 없습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없고, 신앙 없는 찬양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은 지성적 요소를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에서 신을 섬긴 일은 사실 허구인 것입니다(행 17:23).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좋은 인상을 가지거나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예배를 기획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인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말하지 않은 채, 감동을 주려고 예배를 기획하는 것은 예배의 세속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신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할 세 가지 지식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외에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롬 11:36).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조금 더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b).” 이 말씀은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을 말하는데, 그것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셨기에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의 소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 책임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알고 우리 자신을 양으로 아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고 그 모든 필요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상정합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1-12,14-16).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2. 감사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라! (4-5; 시 106:1 107:1; 118:1; 136:1)
이제 두번째 연으로 가보면, 4절에서는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고 하고, 5절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4절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여기서도 우리는 세 개의 명령형 동사를 발견합니다. ‘들어가며’와 ‘감사하며’ 그리고 ‘송축할지어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들어가며’는 2절에서 ‘나아갈지어다’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고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즉 성소로 들어가는 예배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까? ‘감사함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이 말은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선포하면서 나아가고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면서 들어갈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송축할지어다’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 또한 공중예배를 위한 찬송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세운 레위인 성가대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이름은 성품과 행위 모두를 포함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부합합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선명하게 이해하는 만큼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은 이런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5절은 찬양과 감사의 이유를 말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성실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선하심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서 구속 행위, 그리고 모든 행위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가치 있게 하는 모든 일의 근원이 되십니다. 인자하심은 선하심과 함께 짝을 이루어 공식처럼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종종 사용되는 표현입니다(시 106:1 107:1; 118:1; 136:1). 인자하심은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성실하신 사랑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더 언급합니다. 성실하심도 인자하심과 함께 대대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고, 계획을 성취하시고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성실하신 하나님은 대대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고 영원토록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3. 교훈과 적용
앞서 말씀드린대로, 저는 ‘그의 문에 들어가며..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라는 표현을 중의적으로 이해하여 적용하려고 합니다.
A. 예배하라는 명령
이 말씀을 우리는 먼저 예배의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 땅, 모든 백성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이 명령은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가볍게 여겨지는 명령이 되었습니다. ‘불의 전차’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에릭 리델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영국 육상대표 선수로 출전했지만, 자신의 주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에 개최된다는 이유로 출전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200m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땄고 400m에서는 세계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에게 타협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일의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한,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입니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편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명하십니다. 즐거이 외치고 공공연하게 감사하고 그 이름을 송축하라고 말입니다. 이 모든 예배의 행위들은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와 찬송 가운데 행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선하심과 성실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고 또한 지금도 돌보고 계시므로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올 때, 우리는 비록 예배당 문을 지나 들어오지만 사실은 그의 영광의 문에 들어가며 그의 궁정에 들어가는 리허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그 영광의 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요 구속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의 마땅한 태도라고 100편은 말씀합니다.
B. 죽음의 문을 지나서
둘째로, 영광의 문에 들어간다는 것을 성도가 죽음의 문을 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본문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왜 시편 100편을 제 장례식의 본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것을 잠깐 설명드리지요. 영광의 문을 지나는 순간, 제가 뒤를 보고 하고 싶은 말이 1-3절입니다. 뒤에는 제가 사랑하는 남겨진 사람들이 있겠지요.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3).” 아마 그 시간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이보다 중요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목적을 위헤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앞을 바라볼 것입니다. 영광의 문 안에는 저보다 앞서 그 영광의 문을 지나 그의 궁정에 들어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를 환영하고 있겠지요. 그들을 향해 저는 4-5절을 말할 겁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4-5).”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먼저 들어간 이들이 제게 묻습니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것을 내 평생 살아보고 살았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그 영광의 문을 통해 사랑하는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일생 동안 하나님을 예배하러 주일에 예배당에 나아올 때마다 하던 일을 그 영광의 날에 가장 멋지게 하게 될 것입니다. 매주일 예배당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영광의 문을 지나 그의 궁정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고 연습하십시오. 즐거운 찬송으로, 기쁨으로,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매주일 그 문에 들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