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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9).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편 99:1-9, 이사야 57:15, 디모데전서 2: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10-11

말씀내용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주제는 시편과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지만, 시편 92-100편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말하는 시편들은 각각의 강조점도 가지고 있는데, 99편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말합니다. 99편을 구성하는 세 연의 각 후렴구인 3,5,9절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복하는데,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ch)는 이 세번의 거룩함이 이사야 6장에서 스랍들의 찬송을 상기시킨다고 말합니다.


1.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속성입니다. 일반적으로 거룩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이라는 윤리적 개념을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이보다 우선적으로 거룩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절대적 분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거룩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과 구별하는 요소이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속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오늘날 큰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주제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와 구별된 존재로서 저 멀리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보다는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안심하게 해주시는 내재적 하나님을 더 원합니다. 이 문제와 관하여 도널드 윌리엄스의 지적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립과 소외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원한다. 또한 우리의 자존감을 세워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절대성이라는 주제를 가진 거룩함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거룩에 대한 힘겹지만 진정한 접근을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좋든 싫든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와 관련한 도덕적 불쾌감이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이유를 지적합니다. 그는 1987년 5월 25일자 타임지에 “윤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라는 커버스토리를 인용합니다. 여기에는 “천박함, 스캔들, 위선에 휩싸인 미국, 도덕적 기반을 찾다”라는 부제가 있었습니다. 정치학자 스티븐 살케버(Stephen G. Salkever)는 “한때 미국은 부분적으로는 성경에 근거하고 부분적으로는 공화당에 근거한 전통적인 공적 담론의 언어가 있었지만,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고 이제 우리는 공통된 도덕적 언어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통 언어의 소멸은 곧 공통 세계관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미국, 도덕적 혼란이 만연한 미국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도덕적 상대성의 혼돈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교회까지 침투하여 오늘날의 교회로 하여금 점점 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네 가지 요소와 관련 지어 설명합니다. 첫째, 위엄(Majesty)입니다. 위엄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존엄, 주권적 권력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두번째 요소는 의지(Will)인데, 하나님의 의지는 당신 자신을 전적으로 다른 분, 인간의 악으로 인해 더럽혀지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고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요소는 진노(Wrath)입니다. 진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것에 대해 취하시는 당연하고 적절한 태도입니다. 네번째 요소는 의로움(Righteousness)입니다. 의로움은 도덕적 영역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이 네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99편은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전제로 쓰여졌기에,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초월적 거룩하심 (1-3; 계 1:17; 눅 5:8; 사 6:5; 히 12:21; 사 57:15)
앞에서 말한대로, 99편의 세 연의 각 후렴구는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강조합니다(3,5,9). 먼저 첫 연(1-3절)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여 당신의 율법을 따라 통치하시므로 그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라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는 시작 문구는 하나님의 절대 왕권에 대한 묘사로 93편(1절)과 96편(10절), 97편(1)에서도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이 그분 앞에서 떨고, 땅이 진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왕권에 대한 마땅한 반응은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보좌는 ‘그룹 사이’입니다. 그룹 사이는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 그리고 속죄소에 이어지도록 만들어진 두 그룹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룹 사이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했습니다. 2절은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라는 표현에서 시온은 지성소와 성소가 세워져 있는 거룩한 산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라는 표현은, 비록 하나님은 시온 산에 있는 언약궤에서 다스리시지만, 온 세상, 모든 민족을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후렴구인 3절로 이어집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 시인이 찬송하라고 말하는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이라고 할 때,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과 행적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배를 말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예배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지요.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만일, 우리의 주일 공예배나 수요기도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렇게 되면, 그 순간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뵈었을 때,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것 처럼(계 1:17), 또는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을 만나 그 신성을 살짝 스쳐 지나가듯 보았을 때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반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눅 5:8). 우리는 이외에도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탄식했던 것이나(사 6:5), 모세가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히 12:21).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초월적 거룩하심 가운데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죄인인 우리를 불로 소멸치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 살리시는 분이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사야 57:15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이사야 57:15).”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해지는 은혜가 임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알고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도덕적 붕괴와 상실된 공통의 도덕적 언어가 회복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을 부흥(Revival)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에 대한 감각을 압도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회복시켜 주시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예배 가운데 일어납니다.


3. 하나님의 통치는 의롭다 (4-5; 대상 28:2)
두번째 연(4-5절)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는 의롭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4절은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고 시작됩니다. 직역하면 ‘왕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정의를 시행하고 세우는 일에 동원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영국의 정치가요 역사가였던 존 달버그-액튼(John Emerich Edward Dalberg-Acton)경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입니다. 본래 이 말은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합니다(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입니다. 이 말은 역사에서 거의 언제나 증명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이 작든지 크든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무한한 권력을 가지셨으나 그 권력이 전혀 부패할 수 없음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과 모든 결정은 언제나 정당하고 항상 옳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의 성품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시고 이루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4), 나아가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높여’라는 말은 명령인데, 우리의 모든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라고 말하는데, 그 발등상은 보좌에 앉아서 발을 올려놓는 발판인데, 언약궤가 하나님의 발등상(발판)으로 불립니다(대상 28:2). 하나님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그 발등상이 언약궤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에는 덮개가 있는데 속죄소(atonement cover) 또는 시은소(mercy seat)라고 불립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려야 했습니다(레 16). 그렇게 함으로써 죄 있는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자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속죄소(시은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온전한 경배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거룩함을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4. 거룩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6-9; 롬 6:23; 히 9:22; 딤전 2:5; 롬 8:34)
이제 세번째 연에서(6-9절) 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조상들에게 신실하셨는지를 말합니다. 6절은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을 언급하며, 이들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는데, 엄격한 의미에서 그 직분을 가리킨다기 보다 이들이 그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 대신 은혜를 그 백성에게 베푸시기 위하여 친히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과 같은 중보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누군가 백성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또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백성의 반응이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7).” 이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고 그들은 신뢰와 복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백성이 경험했던 용서의 은혜가 작용했습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은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입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용서는 “없던 것으로 하자”가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롬 6:23)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습니다(히 9;22). 죄의 삯인 피흘림은 모세와 아론, 사무엘이라는 중보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참되고 유일하신 중보자요,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주님은 죽으심과 부활로써 우리의 중보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로마서 8:34).”
이 용서의 은혜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키는 신뢰와 복종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덕분에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를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할 때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의 삶에서 의를 이루어 내십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여전히 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공의를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하여 그의 백성이 죄의 방종에 빠지는 것을 막고, 하나님의 징계는 여전히 삶에서 죄를 범하는 자녀들을 받아들이는 은혜로운 방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높이고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엡 1:12,14; 사 43:7; 롬 12:1-2; 벧전 1:15-16; 고전 1:30; 마 5:13,14)
우리는 여기까지 시편 99편의 내용을 죽 살펴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시인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라고 세 번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3) 높여 경배하며(5) 예배하라(9)고 명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거룩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거룩함, 거룩한 은혜를 찬송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고(엡 1:12),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엡 1:14).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말한 것이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이사야 43:7).”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삶의 중심이 예배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주일 아침,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요일 저녁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기에,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풍성하게 받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추구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용서하는 은혜에 끊임없이 호소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성산에서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하나님의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고, 인정받고, 경배 받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호하는 장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두번째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바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면 우리 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매순간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롬 12:2).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15–16).”고 기록합니다. 거룩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거룩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일 먼저, 매순간 그리스도께로 도망하고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성도의 거룩은 언제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자기 행위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무한한 차이를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거룩함이 되신 그리스도께 피하고 그에게 숨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참된 거룩의 의지를 허락하시고 거룩한 길로 행하게 하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거룩을 이루어 가십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따라 살아가며 그것을 위해 싸울 것을 교훈하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 질서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패를 날마다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성도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존재로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쉽게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정의를 이루어가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적극적 기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5:13,14).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원리인 정의와 공의를 이루어가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