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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상 - (6). 종교의 우상

빌립보서 3:4-9, 로마서 10:2-3, 빌립보서 3: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0-08

말씀내용
우상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우상은 종교의 우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1년 9월 11일 3000명 이상의 귀한 목숨이 희생된 뉴욕무역센터 테러는 종교의 우상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비록 언제나 이런 참담한 폭력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의 우상을 섬기는 일은 기독교의 안팎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칼빈의 말대로, 죄인의 마음은 끊임 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우상이 가장 위험하다고 보는 이유는 종교의 우상이 자신의 착함과 올바름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기만적 속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스르고 심지어 주와 복음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서 틈만 나면 자리를 헤집고 고개를 드는 종교의 우상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도 사상누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의 우상은 교회와 신앙을 허무는 마귀의 손에 들린 결정적 무기입니다.


1. 유대주의자들이 섬기던 종교의 우상 (빌 3:2-3)
본문은 당시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을 상정하고 읽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는 기독교를 유대교와 혼동하는 문제가 늘상 발생하였습니다. 그 문제의 핵심은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는 문제였고, 은혜와 공로의 차이의 문제였습니다. 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를 원한다면, 유대 율법의 멍에를 수용해야 하고 특별히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일종의 기득권으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라는 언약의 외적인 표를 상징이 아닌 실재로 여기는 잘못에 빠지곤 했습니다. 우린 할례를 받았으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고, 너희 이방인은 할례 받지 못한 저주 받은 백성이라고 여기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할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인치는 표로 할례를 받은 것이지요.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표인데,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의 표이고 심지어 우린 할례를 행했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이런 백성을 향해 마음의 할례를 강조함으로써 몸에 행한 할례는 하나의 상징이고 표임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할례였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종교의 우상으로 작동함으로써 그들을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했던 모든 종교적 동기와 열심을 이해할 수 있고, 지금 바울이 서신을 쓰면서 의식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에서 바울 사도는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립보서 3:2).”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사람을 개라고 하는 것은 은유로 표현되는 욕이지요. 바울이 지적하는 개들은 몸에 행한 할례를 구원의 표로 여기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강조했던 구약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때가 이르러 마음의 할례가 육체의 할례를 대신했으므로 우리가 진짜 할례파라고 말하면서, 할례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제사나 성전 의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역에 ‘성령으로 봉사하며’는 ‘성령으로 예배하며’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고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둘째와 셋째 특징은 상호 배타적인 것인데,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했고 바울 사도가 암시하는 마음의 할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죄인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중생,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새 사람이 된 것의 결정적 변화를 이어서 설명하는데, 이것은 종교의 우상으로부터의 자유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3절에서 말한 진정한 할례파의 두번째, 세번째 특성이기도 합니다.


2. 종교의 우상을 섬기던 사울 (빌 3:3-9; 행 23:6; 5:34; 22:3; 7:58; 8:1-3; 눅 18:21)
4-9절에서 기록된 바울 사도의 진술은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즉 그가 중생하기 전의 모습과 그 이후의 모습을 놀랍게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3절에서 이미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특징은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진술은 중생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확신을 그리스도께 두지만, 그렇지 않은 종교인(여기서는 유대주의자들)은 결국 무너지고 말 자신 안에 그 확신을 둡니다. 그것이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근거는 인간의 사회적 특권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바울은 자신의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종교적 우상을 뜨겁게 섬기던 바울 이전의 사람, 사울을 살펴보지요.
주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가진 확신은 너무나 확고했습니다. 그 확신의 기초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었고,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생득적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것입니다. 먼저 생득적인 것으로는, 그가 율법대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 그가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라는 것,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 끝으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는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의 우월감은 유다 지파 만큼이나 대단했습니다. 그들이 할당 받은 기업은 예루살렘이 속한 곳이었고, 유다의 멸망 후에도 순혈을 유지했으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이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대부분의 당대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나 아람어만 사용했던 반면, 자신은 국적 뿐만 아니라 교육 수준에서도 히브리어에 능통한 히브리인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로서(행 23:6) 당대 유대교 최고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아래서 수학하기 위해 부모에 의해 일찍이 예루살렘으로 보내어졌었습니다(행 5:34; 22:3). 이것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자부심과 확신의 근거였습니다. 여러 모로 바울은 자기 만큼 조건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것은 더욱 그의 확신과 자부심을 높여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이 육체를 신뢰하던 후천적인 조건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교회를 박해했던 열심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私刑, 린치)의 장면에서 주동자로 처음 등장했고(행 7:58), 각 집을 수색하여 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김으로써 교회를 잔멸하는 자였습니다(행 8:1-3). 그의 열심은 만족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스라엘 밖의 회당들에게 보내는 공문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잡아올 수 있는 권한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메섹으로 출발하여 가는 여정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열심을 언급합니다. 이 종교적 열심이 바울에게 의로움이 되었고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이전의 자신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것(계명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던 부자 관리를 능가하는 자기 의입니다(눅 18:21).


3. 종교의 우상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빌 3:7-9)
7절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매우 강한 부정의 의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했고(육체를 신뢰했고) 그 확신에 젖어서 살았는데, ‘그러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에 자부심을 가졌던 그가 마음의 할례 곧 중생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먼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 유익하던 것’이라고 말할 때 복수로 ‘것들’이라고 했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했을 때는 단수를 사용했습니다. 그 많은 유익들이 하나의 손실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이 결정(?)은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 옮겨가기로 한 결정이 아니었고, 가치 있는 소유물을 포기하는 결정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손실의 포기였습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실은 자신의 파멸에 기여해왔었다는 것을 깨닫자 크게 전율했던 것입니다. “금 인줄 알고 껴안았는데 똥이었더라”는 것이지요. 바울에게 이런 급격한 전환이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8-11절은 하나의 긴 문장인데(헬라어에서) 여기서 그는 유익들이 해가 된 것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리는 종교의 우상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8-9절만 보려고 합니다. 그가 7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말한 것은 8절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됩니다. 이 지식은 구약적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과 은혜로 자기 백성을 아시는 것, 그 백성이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지적인 것이라기 보다, 체험적이고 인격적이며 친밀한 사귐을 의미합니다.
저는 9절에서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말을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데, 이 말을 하는 배경에는 바울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어떤 두려움인가 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혼자 설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두려움이 없습니까? 예전에는 혼자 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로움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 자기가 내세울 수 있다고 여기고 살았던 그 의로움들은 한낱 쓰레기(배설물)에 불과할 뿐 아니라, 도리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말의 뜻입니다. 9절에 이어지는 말씀이 이것을 입증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제껏 자기가 가졌다고 여긴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고, 자기의 태생과 자기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서려고 하는 자가 필요로 하는 의로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에게서 난 의로움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련의 명제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신뢰하고 복종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종교의 우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남으로써 이 우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착함과 의로움으로 얻어내야만 한다고 여겼고, 또 그렇게 수고하는 만큼 그것이 자기의 구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던 바울은 드디어 그 헛된 수고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죄인이 거듭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신의 수고로운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진짜를 얻었기에 결국에는 드러나게 될 모조품을 만드느라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4. 종교의 우상이 작동하는 방식(롬 10:2-3)
우리는 바울에게서 종교의 우상이 작동하는 예를 살펴보았습니다마는, 사실 종교의 우상 숭배 행위는 교회의 안팎에 차고 넘칩니다. 우상의 본질은 섬기는 자가 그 안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 민족적 혈통, 지파, 그리고 종교적 열심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았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거짓된 종교적 확신은 견고해 졌습니다. 그는 이미 이전에, 자기의 경험에 빗대어, 유대인들을 이렇게 묘사했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종교의 우상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에게서 처럼 극단적으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성전(聖戰)이나 명예살인과 같은 것들이 아니더라도, 종교의 우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종교의 우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신앙적이고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좋은 가치들을 표방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우상은 어떤 우상 보다 더 기만적 입니다. 구약 시대에 종교의 우상은 율법과 성전에 대한 열심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범했고 성전을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스데반도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죽일 만큼, 그리고 잔인해도 되는 정당한 권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게 할 만큼, 종교의 우상은 기만적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현대판 종교의 우상들이 작동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성경적으로 정확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도 거짓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은사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특별히 사역자들 가운데서 많이 보게 되는 종교의 우상입니다. 사역의 성공도 비슷하게 작용할 수 있고, 올바른 도덕적 삶이 종교의 우상이 되는 일도 흔합니다. 이외에도 교육의 정도, 능력, 칭호, 심지어 재산 등이 종교의 우상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우상들이 작동할 때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리를 잘 모르거나, 사역에서 풍성한 열매를 보지 못하는 사람, 도덕적으로 자신과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우상들이 작동하게 되면, 교회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까칠한 판단자들로 가득해지게 되고, 율법의 공기로 채워지게 됩니다. 공동체는 세워지지 않고 무너집니다.
이런 종교의 우상은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작동합니다. 지난 날 일본의 국가주의도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종교적 우상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행했던 홀로코스트 역시 종교적 우상과 국가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을 제일 잘 보여주는 인물이 요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우월감,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 보다 나은 도덕적 우월감이 요나의 불순종과 불쾌한 감정의 원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10:2-3에서 말씀한대로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자기 교회가 가지는 어떤 외적 특성 안에서 자신들의 자신감과 정체성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의 우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른 교회와 교인들을 우습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기 보다는 교리의 정확성이나 교회가 가진 어떤 외적 특성에 의존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잠언이 말하는 거만한 자가 되고 맙니다. 자신을 더 이상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견해가 옳다고 믿는 우월감은 갈수록 심해지고 교회는 이런 사람들로 점점 더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숨이 막히고 복음을 들이마실 수 없게 됩니다. 교회가 육체를 신뢰하는 방식은 정말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왜 종교의 우상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정리하면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즉 중생하고 나서 종교의 우상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를 자유하게 한 열쇠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 그 지식 때문에 그는 과거 유익하던 모든 것이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들임을 즉각적으로 알았습니다.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일어난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거저 주신다는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의는 쓰레기임을 알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제법 쓸모가 많았고 자기 만족을 준다는 차원에서도 쓸 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6.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가치에 대한 재평가 말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여러분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육체의 자랑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더 이상 그것들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더 이상 그런 것들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 일이 일어나려면, 바울이 알았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주시는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서 종교의 우상들을 보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그것들을 버리게 만듭니다.
만일 그런 일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바울이 알았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돌이켜 주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육체를 신뢰하던 모든 것, 종교의 우상들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이 여러분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고, 심판의 날에 여러분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만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아니면 그날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삶의 가장 큰 만족이 되시고, 심판의 날에도 당신이 이루신 의로움으로 우리를 덮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