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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상 - (5). 힘과 성공의 우상

요한복음 12:43, 마태복음 26:33-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0-01

말씀내용
사람은 자연스럽게 힘을 숭배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성공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힘과 성공을 추구하거나 숭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고 치장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힘과 성공이라는 하위적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가치를 알았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힘(권력)과 성공을 한꺼번에 붙여서 다루는 것이 합당한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루겠다고 생각한 것은, 힘과 성공이 모두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작동하는 특성을 가졌다는 점 때문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힘과 성공으로 자기를 증명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안에 약함이 있을지라도(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비록 대단히 성공적인 삶이 아니더라도 꽤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포장하고 싶어합니다. 약하지만 강하게, 실패라고 느끼지만 성공한 것처럼 보이려는 태도는 우리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기준에 맞는 조건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발생합니다. 바로 이점이 타락 이후에 인간이 예외 없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게 된 태도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굳이 서로에게 자신을 더 나은 모습으로 보여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런 거짓된 시도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습 그대로 용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실제와 포장의 간격
여러분은 물건을 제대로 보지 않고 샀을 때 속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포장지는 그럴 듯 한데, 내용물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 이런 일은 더 많이 발생합니다. 설명과 사진만 보고 구입했는데 실제로는 많이 다른 것이지요. 이런 일은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일 때,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 사람에게 속는 것이지요. 결혼해서 보니 그 사람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속았다고 느낄 만큼 심각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런 차이를 자신 안에서 어느 정도 알고 살아갑니다. 만일 누군가가 속았다고 느낄 정도라면, 그것은 심각한 인격적 장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는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에는 괜찮았던 순간들도 있지만, 실패라고 여겨지는 순간들도 있는데, 우리는 주로 괜찮았던 순간들을 더 많이 말함으로써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하는 욕구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힘과 성공 만큼 좋은 포장지는 없습니다.
성경은 등장 인물들을 미화하거나 포장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영웅들을 보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같이 연약함에 쌓여 있는 사람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온전함으로 빚어가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교사 사건, 천하에 온유한 모세가 백성들에게 성질을 부린 일, 최고의 선지자 엘리야가 죽음의 충동을 느낄 만큼 무너졌던 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성경은 가감없이 기록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주려는 의도이고, 또한 중요한 것은 너희의 포장술이 얼마나 좋은지가 아니라 너희가 진짜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2. 엘리야의 성공과 실패 (약 5:17-18; 왕상 18:20-40; 19:1-18)
엘리야는 구약 최고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로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또 그가 말하자 다시 비가 내리는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약 5:17-18).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악하고 타락했던 시절, 선지자로 부름 받아 이스라엘 역사 최악의 왕으로 기억되는 아합과 그의 사악한 아내 이세벨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역의 절정은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와 대결하여 승리했던 일입니다(왕상 18:20-40). 850:1의 대결이었습니다. 각각 송아지를 잡아 제단에 두고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능력 대결의 현장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바알을 부르고 온갖 자해까지 하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저녁 즈음에 엘리야가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제단 주위에는 도랑을 판 뒤에 송아지의 각을 떠서 제단 위에 벌인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이도 부족하여 그는 통 넷에 물을 채워 번제물과 나무 위에 세 차례나 붓게 합니다. 그러자 물이 제단으로 넘쳐 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다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도 빨아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바알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인생에서만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에서 가장 장엄한 영적 승리의 장면입니다. 갈멜산의 승리는 엘리야 인생의 성공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 속의 엘리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다는 말이 전해지자, 엘리야는 살기 위하여 유다의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합니다. 거기에 사환을 남겨둔 엘리야는 하룻길을 광야로 더 들어가 한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구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하나님께서는 친히 엘리야를 어루만지시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로 먹이십니다. 그는 먹고 힘을 얻어 40 주 40 야를 행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호렙산의 한 굴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시자 그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왕상 19:9-10). 엘리야가 보여주는 이 모습은 철저하게 실패한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갈멜산에서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워 승리한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한 선지자의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를 연이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만일 엘리야의 이야기가 갈멜산의 승리의 이야기에서 바로 그의 승천으로 이어졌다면, 우리는 엘리야에게서 강함과 승리만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삶이 보여주는 것 처럼, 힘과 승리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실패의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3. 힘 아래 감추어진 약함, 성공 아래 감추어진 실패 (마 26:33-35, 51; 14:28-30)
우리는 힘과 용기를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가령, 베드로의 용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 밤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호기롭게도 죽을지언정 그럴 일은 없다고 단언합니다(마 26:33-35).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로마군대와 함께 왔을 때 칼을 뽑아 한 사람의 귀를 쳤습니다(마 26:51). 언뜻 보면 이것은 힘과 용기 같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이 행위를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진면목은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가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 앞에서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고 물 위를 걷는 베드로는, 동시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며 소리 지르는 베드로이기도 합니다(마 14:28-30).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을 겉으로 보이는 용기 뒤에 숨깁니다. 우리의 약함은 겉모습의 강함 속에 숨겨집니다. 그리고 실패의 경험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외면상의 성공으로 포장하여 숨깁니다.
이렇게 실제의 모습과 겉모습의 분리가 심해질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고 누군가 진짜 나의 모습을 알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런 삶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이 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고, 고립감과 외로움은 심화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 안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혼자서도 불편함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4. 약함과 실패로 이끄시는 하나님
아무도 겉보기처럼 강하기만 한 사람은 없으며 일마다 승승장구하며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감추어진 진짜가 다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실패를 공공연하게 언급하셨고 그의 실패를 허용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를 성공의 멋진 이야기로 끝내지 않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는 더욱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약함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수치감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층 더 강력한 자기 보호 조치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강력한 자기 보호 조치는 결국 더 깊은 고립과 외로움, 두려움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의 불안함과 두려움, 수치감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rid Foster Wallace)는 "힘을 숭상하면 약해지고 두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더 큰 힘을 필요로 하게 된다.”고 이 모순적 악순환의 고리를 설명합니다. 힘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다가, 그 우상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겁이 나고 두려움에 노출된 기분을 느낍니다. 하지만 사실 기뻐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힘과 자존심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당신의 몸을 찢어 피 흘려 주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준비가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보호와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 안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약함과 실패를 보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외 없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약함과 실패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약함과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니까? 아니면 점점 더 강력한 자기 보호 조치로 자신을 꽁꽁 싸매고 포장하는 선택을 하십니까?


5. 십자가의 길 (마 7:13-14; 출 33)
성경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진짜가 되려면, 십자가의 역설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힘과 성공은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목이 곧은 백성과 같이 가실 수 없어 천사를 보내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면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겠다고 하는 모세가, 성공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봅니다(출 3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인생을 갈멜산에서 마치지 않고 호렙산으로 인도하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힘과 성공을 숭배하는 삶에서 떠나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차라리 죽는 게 좋겠다고 할 만큼 무너지고 낮아졌습니다. 두려움에 쌓였고 고립감이 그를 삼켰습니다. 실패감과 좌절감이 뱃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 였습니다. 힘과 성공의 우상은 결국 외로움과 절망, 궁극적으로 약함으로 이어지지만,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성공과 힘을 숭배하는 생각과 삶을 거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둥의 신 토르처럼 망치를 들고 나타나시는 대신, 망치를 든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약함과 수치를 온 천하에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그는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약함과 실패를 힘과 성공으로 포장하는 길이 아니라, 약함과 실패를 드러냄으로써 진짜 힘과 진짜 성공으로 가는 길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는 것은 우리를 위험한 자리로 몰아갑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가 되고 싶은 인물들의 성공이 하나의 우상으로 변질되면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성공에 도움이 된다면 악도 정당화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의 화려함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성공하기를 강렬히 갈망하는 중에 도덕적 지적 비판적 능력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의 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6. 교훈과 적용 (요 12:42-43)
오늘 본문은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한복음 12:43).”고말씀합니다.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한복음 12:42).”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의 관원들 중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가는 출교라도 당함으로써 사회적 매장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이 거짓 믿음임을 증거하십니다. 힘과 성공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세상의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약함과 실패를 인정하고 지나는 십자가의 길로 행하는 것은 세상을 역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영광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 결론으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A. 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로!!!
삶의 의미는 소유 획득, 힘과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갈멜산에서 끌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엘리야는 엄청난 승리의 자리에서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로 도망한 뒤에 자신의 살고 죽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실패로 보이는 이 자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성공의 자리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약함의 자리를 지나지 않고는 진정한 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투사요, 갈멜산의 승자로 나타나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약함과 실패, 낙심과 절망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를 자기의 승리로 착각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사로잡고 있는 자기 이야기의 중심에서 그를 끌어내 당신 자신의 거대한 이야기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약함과 실패의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를 자기 중심의 이야기로부터 끌어내어,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위해 부름 받았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힘과 성공과 같은 하위적 가치들로 자기를 증명하려는 싸움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더 이상 약함과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러셀 무어의 말을 조금 길게 인용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아합에게 고문을 당하거나 이세벨에게 쫓겨나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헤롯에게 목이 잘려 나가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이 모든 일에서 살아남았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뭐든 우리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일이 아니다. 아내가 집을 나가 이혼 서류를 보내오는 것,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 아이가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는 것, 병원에서 수술이 불가능한 종양을 발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 것도 최악까지는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바로 지옥이다. 율법의 저주 아래 정죄를 받아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끊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갈 2:20). 이는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고 더는 반복될 수 없다는 뜻이다.
최상의 시나리오도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시나리오는 꿈에 그리던 직장에 들어가거나 꿈에 그리던 배우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다가 밤에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최상의 시나리오는 바로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보았던 것이다. 바로, 영광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영광 말이다. 그리고 이 일도 이미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엡 1:20-21).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 붙어 있는 머리와 몸으로서 유기적인 연합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그리스도의 줄거리가 곧 우리의 줄거리이며, 그분의 줄거리는 실로 영광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이 큰 이야기 속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내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영광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로 하나님께 이미 받아들여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 (갈 6:14; 고후 6:1)
말씀의 두번째 결론은 사람의 영광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우리의 믿음이 왜 온전할 수 없는지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한복음 5:44).” 힘과 성공은 인간이 서로에게서 취하는 영광에 속한 가치들입니다. 이런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 이런 것들에 우리의 행복이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그 가치들을 숭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헛된 영광들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온통 자기 이야기—줄거리—만이 있을 뿐, 하나님의 이야기—줄거리—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증거가 자기 자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고린도후서에서 말씀했습니다(고후 6:1). 반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