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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7).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라

시편 97:1-12, 출애굽기 19:16-18, 히브리서 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9-27

말씀내용
1. 문맥과 구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한다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그럴 수 있겠다고 반응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어떻게 기뻐할 수만 있겠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97편은 잘 다루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93-100편의 시들이 우주적 제국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찬송인데, 특별히 96-98편을 떼어서 보자면, 96편과 98편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다루고 있는 반면, 오늘 살펴볼 97편은 하나님의 심판과 반역자들의 파멸이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어두운 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데렉 키드너는 “96:10 이하에서 사랑하는 주인의 귀환을 그렸다면, 이 시편은 정복자의 두려운 다가옴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당신의 영광에 반하는 모든 악을 종결하고 완전한 의를 성취하실 것이기에, 우리가 그저 자기 방식대로 환상을 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께 부여된 강력한 위엄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헛된 확신과 육신의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주제는 참된 신자들에게는 기쁨을 주며 찬송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97편의 구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매우 상이한데, 존 스택(John H. Stek)의 구조 분석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97편은 1-6절, 8-12절로 두 단락으로 나뉘고(두 단락은 각각 히브리어 단어 42개와 43개로 구성됩니다) 7절로 연결됩니다. 두 단락은 각각 ‘즐거워하며 기뻐할지어다’로(1절),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나이다’로 시작하고(8절), 첫 단락은 땅(1절)과 하늘(6절)에 대한 언급으로 울타리쳐지고, 둘째 단락은 시온과 유다의 딸들(8절) 그리고 의인(12절)으로 둘려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첫째 단락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심판이 나타남을 묘사하고 온 세상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드러난 영광을 보고 그 다스리심을 기뻐할 것을 요청합니다. 둘째 단락은 특별히 시온 즉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할 것을 말합니다. 첫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가져오는 두려움이 강조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온 세상의 반응은 마땅히 즐거움과 찬송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2. 두려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1-6; 출 19:16,18; 삼하 22:8-15; 시 18:8-15; 벧후 3:12; 고후 10:4-5)
1절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라고 시작하는데, 현재시제로 “지금 여기서 여호와께서 항상 다스리신다”고 번역이 되지만, “여호와께서 여기서 왕이 되셨다”는 완료시제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만일 이 시편을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켜야 한다면, 머잖은 과거에 일어난 기념비적인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확립된 것을 노래하는 찬송일 수 있겠지만, 97편 전체가 미래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여호와의 왕되심에 대한 반응으로, 시인은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라고 말하는데 이 요청은 바람이나 호소 이상의 절박한 명령에 가깝습니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에 대한 당연하고 필수적인 반응은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즐거움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왕국에서 살기를 거절하는 것이 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땅과 섬들에게 기뻐하라는 말은 거기 사는 백성, 사람들을 가리키는 환유법입니다. ‘허다한 섬’은 특별히 멀리 배를 타고 나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의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시인은 땅과 허다한 섬으로 하나님의 통치 범위가 미치는 온 세상을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2-5절은 그것을 묘사하는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강림이나(출 19:16,18)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경험했던 상황들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다윗이 큰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지은 시와 표현이 매우 유사합니다(삼하 22:8-15; 시 18:8-15).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주는 자연적 징조는 먼저 ‘구름과 흑암’입니다(2). 하나님의 개입이 청명한 파란 하늘이나 광야 여정 가운데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찬란하게 빛나는 구름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상징하는 두껍고 어두운 구름과 함께 나타나는 것은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제멋대로 행하는 독재자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와 공평으로 통치하시기에 일어나는 두려움입니다. ‘의와 공평’은 의로운 심판이라는 의미입니다. 의는 언약적 질서를, 공평(공의)은 언약의 심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무질서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주는 두번째 상징은 ‘불’입니다.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3).”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불로써 대적들을 사르십니다. 불은 심판과 정화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의 세번째 상징은 ‘번개’입니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4).” 번개는 불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기도 하지만, 고대세계에서는 종종 신의 무기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사무엘하 22:15).” 그래서 번개는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하나님의 능력과 진노를 의식할 때 더욱 그러했습니다.
네번째 상징은 5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산들이 밀랍 같이 녹는 현상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이보다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불 앞에서 산이 밀랍처럼 녹아 내리는 이미지는 “우리가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 하나님을 완전히 저항할 수 없는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John Calvin, Sermons on the Book of Micah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3), 25.) 사도 베드로도 심판의 날을 묘사할 때,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했습니다(벧후 3:12). 물론 본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임하실 때 일어나는 엄청난 현상들을 묘사하지만, 하나님의 이 능력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두렵고도 전능하신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안심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떤 두려움도 없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린도후서 10:4–5).”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6절에서 시인은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자연계에 일어나는 대변혁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은 앞에서 묘사한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을 가리키는 듯 보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의를 선포한다는 표현은, 언어적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세상 모든 존재 앞에서 부인할 수 없도록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의와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그 통치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땅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절대 통치가 확립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땅은 즐거워하고 허다한 섬이 기뻐해야 마땅합니다(1).


3.기쁨과 즐거움을 맞이하는 하나님 (8-12; 요일 5:21; 시 126:5-6)
첫째와 둘째 단락을 이어주는 7절을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두번째 단락으로 가겠습니다. 둘째 단락은 범위를 좁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할 기쁨과 즐거움을 묘사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시온과 유다의 딸들로 묘사됩니다. 이들은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9).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크게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는 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악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언약의 배타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운 심판에서 악을 미워하는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시고 악인의 손에서도 건지실 것입니다. 이 권면은 사도 요한이 첫번째 서신을 끝내면서 준 마지막 권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한1서 5:21).”
11절에서 시인은 비록 그 전반적 의미는 분명히 드러나지만, 평범하지 않은 상징 언어를 사용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11).” 빛은 거룩함, 진리, 이해, 기쁨, 생명을 의미하고, 빛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함을 가리킵니다. ‘빛을 뿌리고’라는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데, 빛의 나라로 인한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빛이 온 사방으로 뿌려진다는 뜻일 것입니다.
특별히 뿌린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씨를 뿌린다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데, 지금은 눈물로 뿌리지만 기쁨으로 거둘 날이 있음을 알고 지금도 즐거워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이 말씀을 묵상해보면,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은 겉모습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빛과 기쁨을 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고질적인 죄와 싸우면서도 자신의 성화를 위한 긴 투쟁 속에서, 고난과 핍박의 계절도 견딜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딕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주의 자녀들은 의의 열매를 지금 당장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땅에 뿌려진 곡식에게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 같이 시간을 주어야 하리니 때가 되면 곡식이 싹이 나고 익어 추수하듯 경건한 자의 고난도 위로의 열매를 보리니, 의인을 위하여 빛이 뿌려지기 때문이다.”(David Dickson, A Commentary on the Psalms (1653;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5), 2:184. Phillips, R. D. (2020). Psalms 73–106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편집자). P&R Publishing.) 칼빈도 이 말씀을 비슷하게 해석합니다. "의인들이 거의 세상 밖으로 추방되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고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쁨을 씨앗처럼 널리 퍼뜨리시거나 닫혀 있던 기쁨의 빛을 드러내게 하신다.”(Calvin, Commentaries, 6:68. Phillips, R. D. (2020). Psalms 73–106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편집자). P&R Publishing.)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두번째 당부는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그의 거룩한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 말씀과 행위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들을 의미합니다. 12절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영광, 그리고 온 세상의 심판자로서 지니신 존엄한 절대 주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을 기억할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이 드러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다스림의 혜택이 빛과 기쁨이고 그것을 한껏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벤게메랜의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주님의 과거 행적, 현재의 통치, 축복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장엄한 비전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다스리심을 생각하며 악에서 떠나야 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4. 교훈과 적용 (7; 삼상 5; 히 1:6; 출 19:16; 히 12:21; 사 6:5; 합 3:16, 17-18)
우리가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을 살펴보았는데, 두 단락을 연결하는 7절은 아직 살피지 않았습니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7).”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모든 우상들은 다 무너지고 우상숭배자들은 모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조각한 신상은 물론 돌과 나무로 깎아 만든 형상만으로 제한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허무한 것,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이런 우상들로 자랑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패배를 상징하는 환유법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깨어졌던 것처럼, 그날에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우상은 무너지고 그 허무함의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삼상 5).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는 말에서 ‘신들’은 모든 우상들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하나님께 경배할 리는 없습니다. 다른 해석은 신들을 재판관이나 통치자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번째 해석은 천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인데, 실제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브리서 1:6).” 그렇다면 이 말씀은 모든 천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성육신 혹은 재림)과 연결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선포하는 사건이고, 그래서 이에 대한 천사들의 최고의 반응은 겸손하게 마음을 숙이고 그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첫 단락은 참된 하나님의 현현은 얼마나 큰 두려움과 떨림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나타나셨을 때 모든 백성은 떨었고(출 19:16), 모세도 두려워 떨었습니다(히 12:21). 이사야도 두려워 떨었습니다(사 6:5). 하박국은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하박국 3:16). 이것은 우리가 요즘의 CCM 가사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마치 친구처럼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벼움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기쁨으로, 그러나 경건하게, 그리고 가장 큰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날에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떻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지금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현재에도 종말론적 전망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미래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숨겨진 방식으로 그 다스리심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가운데에서, 때로는 고난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할지라도, 자신을 악으로부터 지키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지혜로는 가늠할 수 없는 가장 선하신 일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언젠가 영광 중에 오셔서 그 나라를 ‘나타난 방식으로’ 완성하실 것을 끊임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은 공예배와 각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예배를 통해서 표출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숨겨져 있을지라도, 성도가 예배하는 그 자리에서는 결코 숨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 다스리심은 2-5절에서 묘사하듯 온 세상이 보도록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날을 사모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데렉 키드너의 이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을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의 전체 정신은 최후의 승리를 이미 성취된 사실인 것처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11절의 명사 '기쁨'을 관조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것으로 규정합니다. 하박국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성립되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셔야 합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제한이 있다면 완전한 주권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아더 핑크가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고 기독교 진리 체계의 무게 중심이라고 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세상의 폭풍 속에서 신자가 살아갈 힘과 위로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권능을 가지신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니,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잊지 마십시오. 크리스퍼 애쉬의 이 말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시내산의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지도자가 이 의로운 하나님의 진노라는 소멸하는 불을(3절) 자기 백성을 대신해 견디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내산의 공포가 아니라 시온 곧 대속의 자리에 이른 것은 그분의 피 덕분이다(히 12:18-29).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정의로운 심판을 기뻐할 수 있고 기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