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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6). 만국의 찬송가

시편 96:1-13, 역대상 16:23-33, 시편 29: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9-06

말씀내용
‘만국의 찬송가’라는 제목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1976년 미국 IVF가 주관하는 어바나(Urbana) 컨퍼런스에서 이 본문을 설교했는데, ‘우리의 국제적 애국가(Our International Anthem)’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노래인 ‘인터내셔널가(Internationale)’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인터내셔널가와 비슷한 것을 의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노동자 해방과 사회의 평등을 주창하는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져서 수십 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1922-1944년에는 소련의 국가로도 불렸고 지금도 전세계 공산당의 당가로 불리는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꽤나 종교적이고(비록 무신론적이지만), 종말론적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전세계의 공산당원들이 부르는 노래가 ‘인터내셔널가’라면, 오늘 제목이 의도하는 것은 만국의 모든 백성이 불러야 할 애국가, 찬송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국가를 제창하자고 하면 모두 일어나서 제창을 하듯, 96편은 만국의 모든 백성이 불러야 할 애국가이고 찬송가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 내용을 살펴볼 뿐 아니라 우리가 먼저 감격을 가지고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1. 96편이 쓰여진 정황과 구조 (대상 16:23-33; 삼하 6:20)
우리는 이 시편이 언제 쓰여졌는지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이 다윗이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 불렀던 찬송의 일부인 역대상 16:23-33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다윗에게 연유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기뻤던 순간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가장 기쁘고 감격했던 순간은 그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을 때라는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왕 답지 않게 배를 드러내며 춤을 추는 바람에 아내 미갈에게 비난을 받을 정도 였습니다(삼하 6:20).
다윗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온 땅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실 일을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H.C. 류폴드는 96편이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으로 가슴이 뛰는’ 시편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왕의 왕이 보좌에 등극하시니, 만국의 모든 백성은 무릎을 꿇고 그 왕을 높여 찬송하라고 시인은 외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세 부분의 구성이 동일한 패턴을 보여줍니다. 먼저 첫번째 부분은 1-6절인데, 찬양하라는 부름(1-3절)과 찬양할 이유(4-6절)로 구성됩니다. 두번째 부분은 7-10절인데, 역시 찬양하라는 부름(7-9절)과 그 이유(10절)입니다. 마지막으로 11-13절도, 찬양하라는 부름(11-12절)과 찬양의 이유의 절정(13절)을 보여줍니다.


2. 왕의 영광 (1-6)
먼저 1-3절에서 시인은 왕의 영광을 노래하라고 촉구합니다. 여기 세 절에는 6개의 명령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노래하라, 노래할지어다, 노래하여, 송축하며, 전파할지어다, 선포할지어다.’ 이 동사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줍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말은 예배를 드릴 때 늘 새로운 노래를 작곡, 작사해서 불러야 한다거나, 매번 알지 못하는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인은 늘 새롭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로이 경험하고 누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의도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새롭게 우리에게 주어지고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은혜, 과거의 은혜로 감동 없는 틀에 박힌 노래로 찬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크리스토퍼 애쉬는 여기서 ‘새 노래’가 의미하는 것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롭게 모집되는 성가대, 점점 커지는 성가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에서 2002년 월드컵 때 전국민의 함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96편에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비단 한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만국의 국민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상상해 봅니다.
1-2절에서 우리는 순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하늘(위)을 향하여 여호와께 노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옆으로) ‘온 땅’이 노래하는 일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위로 여호와께 노래하고 그의 이름을 송축한 뒤에, 옆으로 온 땅, 세상을 향해서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해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의 찬송이고, 이어서 온 땅을 향해 찬송하라고 전파하고 온 땅이 여호와께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2절 하반절에 ‘전파할지어다’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은 이 단어를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εὐαγγελίζομαι)로 번역했습니다.
먼저는 위로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하고 송축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노래하라고 전파하고 선포하는 것, 이 순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데릭 키드너는 이 순서가 (감동이 없는) 정적인 예배와 (먼저 하나님을 높이는 가슴이 없이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전해지는) 피상적인 설교에 대한 교훈을 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찬송하지 않고 찬송할 수 없는 분을 찬송하라고 세상을 향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왕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백성들 중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 선포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영광은 창조 역사와 구원과 심판 행위를 통해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말한다는 것은 그분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고, 그분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말하는 것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4). ‘신들’은 인간 지도자나 천사들을 가리키는 용어이지만(시 82:1; 8:5; 95:3), 여기서 이방 나라들이 섬기는 비현실적인 신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5절에서 시인은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우상’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쓸모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nothing, vain)’이란 의미입니다. 우상 곧 거짓 신들은 어리석고 힘이 없고 실체도 없고 진짜가 아닌 아무 것도 아닌 허상이란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으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현대인들을 과거 고대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같은 우상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죄인의 마음에는 우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무엇이든, 그것들은 쓸모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는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은 의인화되어서 마치 여호와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수행하는 수행원으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우상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 네 단어에 담아서 표현합니다. 존귀는 왕권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로 인간 왕에게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존귀를 부여하셨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리고 위엄은 ‘꾸미다, 장식하다(사 64:1), 존경하다, 공경하다, 아름답다(사 35:2)는 뜻으로, 왕들만이 장식할 수 있는 온갖 고가의 보석으로 장식한 왕의 위엄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능력은 모든 피조물과 모든 우상들과 구별되시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이고, 아름다움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시고 모든 우상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온 땅이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고 시인은 촉구하는 것입니다.


3. 왕이 마땅히 받으실 영광 (7-10; 29:1-2)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만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도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명제는 다시 두번째 단락(7-10)에서 강조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하는 영광이 있습니다. 7-8절에서 시인은 3번이나 ‘돌릴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영광과 권능’ 그리고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할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7-8절은 시편 29:1-2절과 매우 유사한데, 찬송하라고 촉구하는 대상이 틀립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편 29:1–2).” 29편에서는 ‘권능 있는 자들’을 향해 말하지만, 96편은 ‘만국의 족속들’을 향해 말합니다. 본문은 특정인이 아닌 세상 모든 인간에게 선포하는 촉구이고 명령입니다.
9절에서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라는 말은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함의 아름다운 것으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시 29:2). 이 거룩한 옷은 성소에 합당한,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기 위해 입어야 할 정결한 옷입니다. 말하자면, 성급히 조심성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니, 합당한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일은 두려움과 떨림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다시 10절에서 찬송의 이유를 밝힙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10).”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므로 세상은 궁극적으로 의롭게 세워질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왕이시기에 그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데릭 키드너는 이것은 장래에 주어질 완벽한 정부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 나라가 세워질 때에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찬송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4. 왕의 귀환 (11-13)
세번째로, 11-12절은 다시 하나님의 피조물인 만물을 향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라고 명합니다. 이번에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주체가 만국 백성에서 모든 만물로 확장됩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11-12).” 하늘, 땅,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 그리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 숲의 모든 나무들이 소환됩니다. 이 본문(11-13절)은 이사야 40-66장 안에서의 내용들과 많은 유사점을 가집니다(가령, 사 44:23; 49:13; 55:12; 40:10; 62:11 참조). 이사야 선지자도 하늘과 땅, 산들과 숲, 나무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의 절정이 13절에 소개됩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3).”
이미 10절에서 암시되었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도덕 질서가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심판하시며 진실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말론적 심판은 모든 악한 자들이 멸해지고 의인들을 신원해 주시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너졌고, 이 세상 임금인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이 뒤집힌 모든 질서가 완벽하게 바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계 22:20; 5:13-14; 7:9-10)
시인이 바라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요 19:30) 이미 그 약속을 성취하셨고, 재림하실 때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그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에는 만국 백성이 부를 노래가 있다고, 그 노래는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만물이 부를 노래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그날을 갈망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재림의 약속과 그 갈망의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 그러므로 96편은 다른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만민 가운데 높임을 받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시간, 지리적으로는 땅의 끝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사도 요한은 그날에 부를 노래, 그리고 누가 그 노래를 부르는지를 환상 가운데 목격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요한계시록 5:13–14).” 이 모든 피조물 뿐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찬송하는 모습을 봅니다(계 7:9-10).
놀랍지 않습니까? 자, 이제 이 시편 기자의 촉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이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신다!”우리가 노래하지 않는 분을 노래하라고 세상에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찬송하고 기뻐하지 않는 분을 세상에게 기뻐하고 찬송하라고 권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교회는 먼저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며 즐거워하고 새 노래로 노래하는 일차 성가대입니다. 그 노래가 참될 때, 우리는 온 세상, 만국 백성을 향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7).”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희생을 감수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빠진 섬김과 순종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 성가대의 찬송을 마음으로 같이 부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맞습니다. 종종 주님을 섬기는 길에서 고단하고 피곤하여 그것을 놓치곤 합니다. 오늘 이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노래를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교회는 어떤 점에서 먼저 부름 받은 성가대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영광에 찬 노래는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이 성가대는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이 성가대의 노래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인종과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어서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국제적인 성가대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합창단도 이렇게 기쁨에 겨워, 즐거워함으로 늘 새로운 감격으로 노래한 합창단은 없었고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천국국립합창단의 단원들은 계속해서 늘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모일 때마다 멋진 새 노래들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날을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최고의 아름다운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국 백성을 향해 와서 함께 찬송하자고 외치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산과 밭과 숲과 나무들을 향해서도 하나님께 마땅한 찬송과 영광을 돌리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