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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상 - (3). 감정의 우상

사무엘상 25:2-13, 사무엘상 18:6-9, 레위기 21:10-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9-03

말씀내용
우리는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정당하게 여겨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없고, 감정을 바르게 다루지 못하여 망가진 인생, 그로 인한 사고들은 인류 역사에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감정을 존중하다 못해 극대화한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녀 양육에서 특히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녀의 감정을 다치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자란 사람들은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감히 내 감정을 건드려?”라고 말하며, 감정이 상한 것을 마치 팔 다리가 잘린 것인 양 반응합니다. 이쯤 되면 감정이 우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감정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은 신앙 생활과 성숙을 향한 여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1. 다윗도 넘어진 문제 (삼상 25:21-22, 30-31)
본문은 다윗이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칼을 뽑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던 때의 일이고 당시 600명 가량의 사람들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갈멜에서 수많은 양과 염소를 키우는 부유한 사람 나발이 양털을 깎을 때 부하들을 그에게 보내 음식과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양털을 깎는 것은 큰 잔치였고, 어느 때보다 관대함이 드러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상시에 다윗은 부하들을 통해 나발의 목자들과 재산을 모든 대적들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해왔기에 마땅히 이런 지원 정도는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부자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10-11)”고 하며 모욕하고 거절합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윗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고 하고 자신도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을 데리고 나발을 치기 위해 올라가게 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사무엘상 25:21–22).” 무서운 말이고 지나친 말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치달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발의 지혜로운 부인 아비가일의 재치있고 빠른 행동 덕분에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비가일이 아니었더라면, 다윗은 감정에 못 이겨 큰 일을 저지를 뻔 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30–31).”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자신의 분노의 감정 때문에 큰 살상을 저지를 뻔 하였습니다. 분노의 감정은 공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발 뿐 아니라, 그의 집에 속한 모든 남자를 다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이를 때,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자신의 감정을 따를 것인지 결정하게 됩니다. 후자를 선택할 때, 사람은 변화무쌍한 감정으로 하나님을 대신함으로써 우상 숭배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 사울의 케이스 (삼상 18:6-9; 20:30-34)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가장 심한 경우를 보여줍니다. 그는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이 악행은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성경은 그 시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사무엘상 18:6–9).” 사울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군대장관으로 삼고 블레셋과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승전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는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으로써(삼상 18:7), 사울도 칭송했지만 다윗을 향한 칭송은 그보다 더했습니다. 사울 안에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고(이것은 그 자체로 악한 감정입니다) 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사울의 인생은 이때부터 쇠락의 길로 향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사울이 얼마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은 많습니다. 다윗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요나단에게도 창을 던져 죽이려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삼상 20:30-34).
사울의 감정은 그로 하여금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광기로까지 이어져 습관적인 광기에 갇힌 채 일생을 살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정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따라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3. 감정은 인정하되 표현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겔 24:16-18; 엡 4:26-27)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만 표출되는 게 아닙니다. 가령, 분노의 감정이 있다고 해봅시다. 모든 분노가 다 격렬하게 터뜨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노는 좌절과 불평과 짜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를 판단하거나 수동적 공격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노는 너무나 깊이 감추어져 있어서 자기가 화를 낸다는 사실을 모르게 드러나며, 친절한 얼굴과 사교적 언사로 포장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노라는 감정 하나만 하더라도 다양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때로는 기만적이기까지 해서 우리 자신이 감정에 휘둘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 조차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이성적일 뿐 아니라 또한 감정적인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감정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 자체를 억누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노애락(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의 정서적 표현과 두려움, 행복감, 놀라움, 혐오감, 수치심 등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고, 이것은 인간됨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아내를 어느 날 갑작스럽게 데려가시는데, 그 전에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에스겔 24:16–18).”
하나님께서 쳐서 빼앗겠다고 하신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은 에스겔의 아내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면, 참으로 잔인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언약을 파기한 유다 백성의 죄로 인해 주어질 심판이 너무 커서 거기에 비하면 아내의 죽음 정도는 울 일도 못 된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감정을 느끼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탄식하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에스겔의 슬픈 감정을 인정하십니다. 탄식하되 조용히 하라는 겁니다. 소리를 내어 애곡하지 말고 초상집에서 보통 하는 방식을 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에스겔이 느끼는 슬픔의 감정은 죄가 아닙니다. 물론 질투, 탐심, 정욕과 같이 죄가 되는 악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비탄, 후회와 같은 감정은 그 자체로 죄는 아닙니다. 가령, 분노의 감정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점은 그 감정이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유발하는가, 방해하는가 입니다. 우리는 죄가 아닌 괴로운 감정을 경험할 때, 그 감정을 주님께 토로하고 주님께서 주실 위로와 채움을 기대하며 겸허하게 주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죄가 되는 감정을 경험할 때에는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믿으며 회개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감정을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은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감정은 인정하시지만 감정의 표현은 하나님의 전체 뜻에 비추어 통제되어야 하고 그 뜻에 어긋나지 않을 때에 한해서 옳다고 가르치십니다.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또는 기분이 상할 때, 우리는 그 감정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표현의 여부와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악한 분노가 일어난다고 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화가 납니다. 너무 화가 나서 폭발할 것만 같아요. 저는 이것이 잘못인 줄 압니다. 저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기 원하며 아버지의 긍휼로 채워 지기 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괴롭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의 뜻에 맡깁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서 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에베소서 4:26-27).” NLT는 그 의미를 이렇게 잘 번역했습니다. “분노가 당신을 조종하게 함으로써 범죄하지 마십시오(And don’t sin by letting anger control you).” 바울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통제하고 조종하게 함으로써 죄를 범하는 자리에 이르러 마귀에게 틈을 제공하는 일이 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4. 대제사장의 감정 표현은 절제되어야 했다. (레 21:10-11; 막 14:63; 출 28:32)
특별히 감정의 표현과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주신 명령을 이해하는 것이도움이 됩니다. 대제사장은 감정 표현에 있어 대단히 절제해야만 했습니다.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레위기 21:10–11).” 그래서 아론은 자신의 두 아들이 성소에서 죽었을 때에도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을 수 없었습니다(레 10:6). 구약의 사람들은 보통 비탄과 슬픔 그리고 절망을 표현하기 위해 옷을 찢곤 했는데,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의 경우가 아니면(막 14:63) 그 어떤 경우에도 옷을 찢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의 옷은 우연하게라도 찢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 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출애굽기 28:32; 참조, 39:23).”
왜 대제사장은 유난히도 감정의 표현을 절제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자는 어떤 일도 재난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자는 어떤 일을 당해도 절망할 수 없고, 만일 대제사장이 개인적 슬픔 때문에 옷을 찢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인생에는 하나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선언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성도에게는 인생의 어떤 사건도 하나님이 풀 수 없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우리를 넘어지고 주저앉게 할 그때, 바로 그럴 때마다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5. 감정이 아니라 복음!
정리하자면, 감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좋은 선물이지만, 감정의 표현은 하나님의 전체 뜻을 살펴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감정이 표출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대신, 실용성 여부로 감정 표출을 결정하곤 합니다. 가령, “내가 감정을 표출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후련하고 좋아질거야.”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기분을 털어놓을 권리가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습관이 되고 인격을 형성하게 되면 분노 조절을 할 수 없게 되고 사울 처럼 인생이 망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아랫사람들은 큰 괴로움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대하기 편한 대상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아무에게나 감정을 쏟아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쉬운 상대, 어떻게 감정을 쏟아내도 괜찮다고 여기는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일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인격적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 직장에서의 부하 직원, 때로는 알지도 못하는 상인이거나, 전화 상담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게 되면, 기분과 감정은 그가 섬기는 우상이 됩니다. 이것은 감정에게 최종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거나,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이것이 반복되고 습관과 생활 패턴,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자리까지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감정에 이끌리는 삶이고, 감정은 그의 최종 권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늘 변하는 감정과 기분 위에 여러분의 삶을 세우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 위에 우리 삶을 세워가야 합니다. 기분과 감정 위에 세워지는 인생은 주관적이고 일시적이며 계속 변하고 믿을 수 없는 것에 세워지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이고 영원하며 결코 변하지 않고 완전히 믿을 수 있으며 언제나 완전히 옳은 복음 위에 우리 인생을 세우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감정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주도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 의지하여 이 싸움을 싸우셔야 합니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임에 틀림 없지만, 감정에 최종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감정은 여러분 자신이 아니며, 여러분의 주인도 아닙니다. 다윗이 큰 범죄를 저지르게 할 뻔한 일도 감정이 자신을 조종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고, 사울은 실로 이 일로 인해 인생이 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도를 움직이는 동력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 인생의 동력이 될 때, 우리 삶은 예외 없이 은혜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분노해야 할 대상을 향해 용서를 베풀고, 밀어내야 할 대상을 향해 용납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감정을 표출할 때 일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후련함이나 시원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과 만족감을 지속적으로 주게 될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기분이 나빠서 사람을 죽이는 사건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의 지배를 허락하고 감정을 표출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감정을 마구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C.J.매허니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뜨거운 커피를 쏟아서 노트북 컴퓨터가 망가졌던 일을 고백합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졌습니다. 의자를 집어 던진 적은 없지만, 조금도 다르다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던 저 자신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매허니는 복음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 자신이 분노를 그렇게 표출한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용서를 구했다고 할지라도,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대한 후회스러운 감정과 기분은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기분도 주님께 고백하고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시는 선하고 자비하신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이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야 합니다. 복음중심적 삶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분노의 감정 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판단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감정을 나눌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을 쉽게 쏟아낼 수 있는 편안하고 쉬운 대상에게 감정을 마구 쏟아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언제나 누군가에게 쏟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편에는 인간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외침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고백하고 토로합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다루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영적침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불행은 대부분 자신에게 말하는 대신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때문에 찾아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는 감정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 변하지 않는 진리를 자신에게 계속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싱클레어 퍼거슨은 로이드존스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감정으로 생각한다.”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감정에 떠밀려가는 것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감정이 여러분의 행동을 결정하게 하지 마십시오. 감정을 묻어두기만 하는 것도, 그것을 마구 쏟아내는 것도 성경적 방식이 아닙니다. 감정이 여러분의 최종 권위, 여러분의 주인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실패할 때마다, 다시 분노 조절에 실패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십시오. 나의 약함과 악함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죽으심으로써 나를 감정의 우상을 섬기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건져내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