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성경장절분류 > 하나님과 우상 - (1). 하나님과 돈

추천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하나님과 우상 - (1). 하나님과 돈

마태복음 6:19-34, 디모데전서 6:9-10, 디모데전서 6:17-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8-20

말씀내용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돈과 염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이보다 더 친숙한 주제는 있을까 싶습니다.


1. 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생
돈은 염려를 수반합니다. 많으면 많아서, 없으면 없어서 염려합니다. 그래서 돈 걱정하지 않고 사는게 가능할까 생각도 합니다. 돈 걱정 가득한 세상에 돈에 대한 책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돈과 염려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복음은 이런 돈 걱정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인생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냅니까?
성경의 답을 살피기 전에 잠깐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해결책을 먼저 들어보겠습니다(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의 인용입니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기에,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에 기초하여,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루소의 방식대로 부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됩니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뛰어난 철학자가 돈에 대한 염려와 관련하여 제시하는 답입니다. 이것이 괜찮은 답이라고 생각 되십니까?
이 철학자가 제시하는 답은 실현 불가능하거나 너무 보잘 것 없는 답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도 돈에 대한 염려를 전제하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 사람들은 돈을 어디에 보관해야 안전할지 염려합니다. 고대인들은 밭에 감추어둔 돈이 불안했다면, 현대인은 주식에 넣어둔 돈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또 주님은 이방인들—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돈과 관련된 염려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다고 전제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1-32a).”


2. 죄가 돈을 만날 때 (딤전 6:10)
왜 인간은 돈 앞에서 속수무책일까요? 왜 돈 앞에서는 신앙도 무너지기 일쑤일까요? 도대체돈이 가진 힘이 왜 이렇게 강력할 수 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지배하고 장악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지만(딤전 6:10) 사실,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돈 자체가 악이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돈은 많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돈을 만날 때입니다. 돈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죄가 돈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돈으로부터, 그리고 돈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신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돈이 가지는 잠재적 위험요소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돈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채(빚)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돈이 그 이상의 힘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숭배의 문제입니다. 돈을 벌고 쓰는 영역에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갈망하는 바, 바로 자기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영광에 속하는 쾌락, 안락함, 힘을 갈망하고 이 모두를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루소는 갈망을 억제하면 된다고 했지만, 갈망을 억제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계명 보다 욕구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죄는 우리를 욕구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상숭배자로 전락시킵니다. 우상숭배자는 창조주를 모셔야 할 마음의 자리에 대체물인 온갖 피조물들로 채우는데, 여기에 돈 보다 강한 우상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24).
물질주의로 표방되는 돈은 인간의 전적인 충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돈에게 전적인 충성을 드리기만 하면, 돈도 성경의 약속과 흡사한 약속들을 제공합니다. 그 약속은 인간이 내면에서 갈망하는 현세적인 것들입니다. 안락함, 쾌락, 안정, 여유로운 은퇴 후의 삶과 같은 것들입니다. 세상에는 돈이 주는 약속들로 넘쳐 납니다. 마치 성경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들이 있지만, 그 모든 약속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소멸될 정도로 세상은 돈이 주는 행복한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죄가 돈을 만날 때, 이 약속들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충분한 탐심이 솟아나오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경고와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 보다 더 솔깃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급기야 하나님 보다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돈이 주는 명령에 복종하게 됩니다. 선악과 앞에서 하와에게 일어났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이럴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일이지요.
특별히 돈 문제는 대부분 몰라서가 아니라 거역해서 생깁니다. 하나님의 영광 보다 우리의 욕망이 더 강해서 돈에 무너지게 됩니다. 신자들의 재정 관리의 실패는 쟐못된 예산, 무분별한 소비, 잘못된 투자에서 생기기 보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부정하고 잘못된 생활 방식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가지는 기만적 힘도 함께 작동합니다. 한 예를 들려드리지요. 어느 농부가 키우던 암소가 어느 날 새끼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는 기뻐서 아내에게 말합니다.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주님께 드립시다. 두 마리를 같이 길렀다가 크거든 팔아서 한 마리 값은 주님께 헌금합시다.” 아내가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느냐고 묻자, 농부가 대답합니다. “그건 팔 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농부가 슬픈 표정으로 부엌에 있는 아내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아주 슬픈 소식이요.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당연히 아내가 묻습니다. “두 마리 중 주님의 것을 정해 놓지 않았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주님의 소가 죽은 것을 알아요?” 농부의 대답입니다. “그랬었지. 하지만 난 항상 마음 속으로 흰 놈이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오늘 흰 소가 죽은게 아니겠소?” 이런 식의 일들은 우리 삶에서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경건을 가장한 기만이 돈 앞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죄가 돈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여 반복하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3. 죄가 돈을 만난 결과—우상숭배자의 말로 (딤전 6:9-10; 골 3:5)
이렇게 돈이 주는 약속을 따라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모를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24).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것이 작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신앙이 돈에 굴복하는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돈 앞에서 신앙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경고를 들어보면, 이런 문제는 결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 그런거지, 뭐!”하고 그냥 지나칠 만큼 가벼운 문제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경고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9–10).” 여기서 ‘탐내는 자들’이라고 말했는데 이 탐심이 죄가 돈을 만났을 때 우리 내면에 만들어내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 기초하여, 바울 사도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참조 엡 5:5).”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상숭배는 큰 죄악입니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이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습니까? 마음의 갈망 때문이었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마음에서 씻어낼 수 없는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풍요를 원했고 자녀들을 풍성히 낳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약속하는 바, 당장 눈 앞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믿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깊고 온전하고 영원한 약속을 거절합니다. 그렇게 우상숭배자는 세월과 함께 자기가 숭배하는 대상을 닮아 허망하고 무익한 존재로 변해 갑니다. 이기적이고 저열하고 무정한 존재로 변해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이 사회에서 익숙하게 보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뜬 구름 잡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때로는 신앙이 돈에 굴복하는 현실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실하면서도 현실에 뿌리박은 복음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로부터 우리를 건져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4. 돈 숭배자들에게 주시는 복음
주님은 약속을 새롭게 하십니다. 돈이 주는 약속이 화려해보이고 즉각적으로 보이지만 그 약속들은 모두 현세적이고 한시적인 것들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19-24절은 재물(돈)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25-34절은 염려(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에 대한 말씀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19-20). 고대인들은 보물을 땅을 파서 숨겨 보관하거나 신전에 맡겨 두기도 했지만 늘 불안했습니다. 그 불안한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러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에 헌금 많이 내라는 게 아닙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릴 염려 없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점에서 주님의 말씀은 물질과 소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은(23)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돈이 아니라 충성임을 드러냅니다. 22-23절에서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당대 속담을 인용하시는데, 성한 눈과 나쁜 눈을 말씀하십니다. 성한 눈은 나뉘지 않은 충성스러운 마음을 의미하면서도 관대한 눈, 자비로운 눈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반면 나쁜 눈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눈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영적 건강이 드러나는 한 가지 표지는 물질적 소유의 사용에서 얼마나 관대한가라는 암시를 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1차적 결론을 맺습니다.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염려의 문제인데, 염려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염려는 주로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인데, 이것이 모두 먹고 입는 문제와 연관이 되므로 결국 돈(재물) 걱정입니다(25). 주님은 새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하나님께 먹을 것을 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을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26). 아무도 걱정해서 키를 키울 수 없습니다(27). 27절에서 ‘키’로 번역된 단어는 ‘나이, 목숨’을 의미합니다.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한 자가 한 규빗, 약 45cm이니, 키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느냐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걱정을 많이 하면 수명이 단축되면 단축되지 연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의복 때문에 염려한다면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28). 하나님이 백합화에게 입혀 주신 옷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치장한 것보다 나으니,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지 않으시겠냐고 하십니다(29-30). 31절은 소결론이지요.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일들을 미리 적절하게 생각하는 것을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도록 우리 마음을 분열시키고 방해하는 일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위해, 몸을 위해, 옷을 위해 염려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지만, 너희가 염려할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영혼입니다. 신자는 자기 영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늘 아버지가 계셔서 너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염려를 그치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부요하게 하는 길은 돈을 하늘 창고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돈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최종 결론인 33절에서 설명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런 것들—의식주와 육신의 필요—은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후자는 현세적, 한시적인 것들입니다. 주님은 부자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매튜 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그것이 수단이든 목적이든,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너희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애를 써야 하는 주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늘에 닿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며, 너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삶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전적으로 굴복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의 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현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종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에서 다시 한 번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미래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으니,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5. 살 길이 있다!
본문이 들어있는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자는 돈 걱정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욕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A. 은혜가 돈을 만날 때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과 재정 문제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만족할수록 마음대로 돈을 쓰면서 살고 싶은 유혹을 이기는 힘이 강해집니다. 또 감사하는 사람은 손 안에 없는 것보다 손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은혜는 우리를 알 수 없는 불안에서 자유하게 해줍니다. 은혜는 죄를 이깁니다. 어떤 빚더미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높지 않고, 돈이 일으키는 어떤 수렁도 하나님의 은혜 보다 깊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의 지배 아래 살지 않고 은혜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이기에, 죄가 돈을 만날 때 일어나는 우상 숭배의 결과로 나아가지 않고, 은혜가 돈을 만날 때 일어나는 선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B. 영원한 나라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기 (딤전 6:17-19)
내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크고 내가 이 땅에서 산 날 수와 비할 수 없이 긴 삶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물질적이고 이기적으로 돈을 쓰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망각하면 영원한 유익 보다 눈앞의 쾌락과 위로에 돈을 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기억하지 못하면 물건을 획득하는 경험으로 마음의 갈망을 해소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합리적 경제생활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꿰뚫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성실과 타이밍과 현존과 공급을 믿어야만 돈 걱정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돈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이 가능합니다.
땅에 쌓아두는 보물은 덧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한시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원한 나라가 실재하며 언젠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것 외에 돈을 쓸 정당한 이유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하늘의 창고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 우리의 인생이 더 큰 실재와 연결되어 있다면 돈도 더 큰 실재와 관련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C. 돈 보다 낫고 돈 보다 참되신 분 (요 14:18; 히 13:5; 롬 8:32; 사 46:3-5)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우리에게는 돈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돈 보다 더 낫고 돈 보다 참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8). 히브리서의 약속은 어떻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3:5).”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아들을 주심으로 모든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주신 많은 영원한 약속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이사야 46:3–5).” 주님은 돈이 주는 약속과 비교할 수 없이 더 낫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