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어메이징 그레이스 - (8). 은혜가 세우는 공동체

요한복음 7:53-8:11, 요한복음 3:17, 로마서 8: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8-13

말씀내용
중고등학교 때 사회 시간에 배운 퇴니스(Ferdinand Tönnies,1855-1936)의 집단 구분이 생각납니다. 그는 가족과 친족, 민족, 마을처럼 혈연이나 지연 등 애정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는 비타산적인 특징을 갖는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 Community)와 회사와 도시, 국가, 조합, 정당 등과 같이 계약이나 조약, 협정에 의해 인위적이고 타산적 이해에 얽혀 이루어진 이익사회(게젤샤프트 Society)로 분류했습니다. 여기서 공동사회로 분류되는 가족과 교회를 한 번 비교해보지요. 가족은 혈연을 근거로 애정이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권속)이라고 하는데(엡 2:19), 교회의 애정 관계를 엮어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고 더 정확하게는 동일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나도 믿어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교회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믿음이 성경적으로 바르고 동일한 신앙고백 가운데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에베소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라고 말씀합니다(엡 4:15). 그러나 이 신앙고백이 교회 공동체의 애정 관계의 근거라고만 말하는 것은 부족해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의 애정 관계의 근거로서 신앙 고백 이상의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피려는 본문은 본문 각주에서 보듯이, 오래된 성경 사본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학자들은 본래의 요한복음에 이 본문이 있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적지 않은 주석이 이 본문을 생략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사건이 주님에게 일어났던 일이라는 보편적 전제로, 성경적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의 주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사건의 전모 (엡 2:19; 4:15; 요 18:31)
기록된 사건은 이러합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8일간의 초막절 행사가 끝난 이튿날 일어난 일입니다. 절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주님은 습관대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7:53-8:1). 이튿날 아침 주님은 다시 성전에 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주님의 가르침이 중단됩니다. 그들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한 여인을 거칠게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음행의 현장에서 발각된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로마 정부가 모르는 상태에서 혹은 묵인 하에 이런 여인들이 사형(私刑)으로 돌에 맞아 죽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녀를 끌고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 본문은 그들의 의도를 고발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a).”
이들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한 지점은 이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형을 명하는 것이 되고, 이는 피지배 민족이 스스로 사형을 집행하는 권한을 금하던(18:31) 로마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법으로는 간음죄를 사형에 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놓아주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이들은 그 심사가 정직하지 못하였고 악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여인이 정말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혔다면, 남자도 함께 붙잡아왔어야 하는데 그들이 여인만 데리고 온 것은 이상합니다. 율법은 간음한 남녀를 둘 다 죽이라고 명하기 때문입니다(신 22:22-24). 또 이런 경우는 공회로 직접 데려가 판단을 받아야 했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로 넘어뜨리기 위해서 이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뭐라고 쓰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이 뭐라고 쓰셨는지 궁금해하고 추측을 하지만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는 대답을 하라고 몰아 부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7b).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뭐라고 땅에 쓰셨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는 뭐라고 쓰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분초가 흐르는 동안, 주님의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습니다(9a).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고 돌로 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다 물러간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는 어느 새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습니다(9b).” 주님은 모두 물러가고 여자만 남은 것을 보시고 드디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 ‘여자여’라는 호칭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부인!’이라는 존칭입니다(2:4; 4:21; 19:26; 20:13). 주님은 이 비참한 여인을 존대하십니다. 여인이 정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자,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고 말씀하시고 이야기는 마칩니다.


2. 등장 인물 분석
이제 등장 인물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지요. 이 등장 인물들이 오늘날 교회의 구성원들이라고 전제하고 이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A.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자기 의로 가득한 심판자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께 온 것은 율법이 정의롭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정의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지적하듯이, 그들은 율법이나 정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에 관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만을 데리고 올 수 있었겠습니까? 간음 현장에 있던 남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는 이야기의 정황 상, 이 여인 자신이 연출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위장했지만, 그들의 동기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것이었으니, 정직함이 없었습니다. 종교적 열심,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자신들을 포장했고, 정의를 시행하는 자들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불의와 거짓으로 의로운 분을 잡아 죽이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부차적으로도 이들의 관심은 긍휼과 용서가 아닌 정죄였습니다. 그들에게서는 도무지 긍휼함도, 사랑도, 연민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조그마한 은혜의 부스러기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감정이 없는 심판자요, 집행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여인은 낙인이 찍힌 ‘이러한 여자’일 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개인 인격으로서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 의가 깨어지고 수치 가운데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의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회개도 용서도 알지 못합니다. 너무나 옳아서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동원하여 말할까요? 그들은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교감하며 자신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패들과 좌절들을 말할 줄 모릅니다. 오직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자신들을 포장하는 죽은 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목마름을 보지 못하기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자신들의 목마름과 깨어짐을 가지고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옳습니다. 너무나 옳아서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울어보지 않았기에, 사람 앞에서도 울 줄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입니다.
B. 간음하다 잡힌 여인—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
한편, 이들에게 붙잡혀온 죄인인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피할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으니 율법이 정한 투석형벌 아래 있으며, 공개적 수치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 의가 산산조각난 죄인을 대변합니다. 이 여인은 수많은 군중 앞에 거의 벌거벗겨진 채 끌려왔을지 모릅니다. 만인 앞에서 회복 불가한 수치와 절망이 이 여인을 사로잡고 있으며, 비참한 투석형의 죽음 외에 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이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긍휼함과 용서이며, 바랄 수 없긴 하지만 존귀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긍휼과 용서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대변합니다. 겉으로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이 여인은 양극단에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나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는 자신들의 양심이 증거하듯이, 이 여인과 다름 없는 죄인이며, 긍휼과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C. 예수님 (신 19:16-19; 요 3:17; 롬 8:1)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쉼 없는 요구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는데(7),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간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입니까? 모든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했는데, 모두가 다 간음을 행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그런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는 율법에서 엄격하게 금지한 위증죄의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신 19:16-19).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는 것입니다(9). 그들은 이 행동으로써, 사실 자신들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지금 율법의 형벌 아래 처한 이 여인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떠나간 뒤에, 주님은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여인에게 물으셨지요(10).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죄하고 심판할 권리를 조금도 가지지 않은 죄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어 했던 것과 달리, 주님은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할 심판자이심에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정죄 대신 용서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7).”고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머잖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죄를 받으심으로써 이 여인이 받아야 할 정죄를 대신 담당하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여인 대신 돌에 맞아 죽은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으심의 근거로 여인은 정죄 대신 용서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하면, 교회 안에는 정죄함이 없고 대신 긍휼과 은혜, 용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예수님의 죽음이 대가로 지불되었기에 결코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11). 이 말씀은 정죄와 심판이 두렵거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복음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아. 내가 너를 위해서 네 대신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너는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받은 나의 아들, 나의 딸이란다. 그러니 이제 그 은혜에 힘입어 거룩하게 살렴! 정죄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네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경험한 내 아들이고 딸이니까 말이야.” 이 은혜가 성도의 거룩의 마땅한 출발점입니다.


3.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
이제 교회란 무엇인지 정리해 봅시다. 교회에는 머리 되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야기에 등장한 두 종류의 사람이 모두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의로 가득한 판단자들이 있는 반면, 여인처럼 정죄의 비참함 아래서 용서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그 은혜를 경험한 죄인도 있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이 여인처럼 용서의 은혜를 받고 감격했지만, 세월과 함께 자기 의가 조금씩 쌓여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자리로 서서히 옮겨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익숙해진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리를 떠나게 된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다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쪽에 계십니까?
교회는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성경에서 찾아낸 내러티브 즉 하나님의 본성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주는 내러티브의 공동체이다. …그들 공동체의 특성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한 기억의 방식을 배우는데 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와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됨, pp.142-143)
A.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동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이야기를 가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본성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이 경험한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이야기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변하여 판단과 정죄로 일관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교회의 본질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주님과 복음을 대적했듯이 말입니다. 말씀을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용서의 은혜를 받은 이야기가 잊혀질 때 교회의 본질은 무너집니다. 용서의 이야기,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것은 교회에게 중요합니다. 용서의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들려져야 합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복음의 본질의 이야기들이 계속 전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용서 받음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B. 시선이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
용서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시선을 배우고 닮아가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본래의 시선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선처럼 판단과 정죄를 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들의 차갑고 무서운 시선도 보았지만, 또한 자신을 향한 주님의 시선도 보았습니다. 죄인을 향한 긍휼과 자비,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그 시선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그녀의 영혼의 깊은 목마름, 한 번도 채워져 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헛된 우물을 파고 또 파면서 부도덕한 길을 걸었던 그녀의 목마름을 긍휼히 보시는 시선이었습니다. 이 시선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시선을 변화시켰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시선으로 사람을 대하는 대신,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셨던 주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합니다.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 그리고 용서받은 여인의 변화된 시선이 가득한 공동체입니다.
C.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공동체
그래서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죄인이 용납됩니다. 이 말을 오해 없이 들으십시오. 우리는 교회 안에 누룩과 같이 죄가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고전 5:6). 교회는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은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1). 이 말은 다시 죄를 짓게 되면, 너를 정죄하고 쫓아낼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녀를 정죄하는 대신,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용서 받은 자로서 다른 범죄한 형제들을 정죄하는 대신 용서의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들이 아니라, 형제의 죄악을 정죄하는 대신 용서하고 은혜로 용납해주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은혜로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이런 은혜가 보장되기에, 자신의 죄악과 약함을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4. 은혜가 세우는 공동체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세워져 갑니다. 교회를 세우는 힘은 은혜입니다. 세상에 이런 공동체, 이런 조직은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 받고 받아들여진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은혜로 사랑할 만하지 않은 존재인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모인 무리에게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등장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의 삶의 구석진 곳에서도 범죄는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들을 정죄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범죄한 여인도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 사람들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고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여기에 참된 교회가 있습니다. 복음의 용서하는 능력,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용서와 은혜에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버린 이 죄인인 여인, 그리고 그녀를 용서하시는 주님이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강점이었던 옳음과 바름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은혜가 교회를 세웁니다. 여러분이 여인과 같이 큰 용서의 은혜를 입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은. 성경적이고 참된 교회를 세워가는 방편이 됩니다. 교회는 이 용서하는 은혜, 값없이 받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옳음과 판단 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은혜가 세우는 공동체는 판단과 정죄 대신 용서와 은혜가 흘러가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받아 누리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어메이징한 공동체인 교회를 빚어내고 세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