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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 (6). 약함이 은혜를 만날 때

요한복음 21:15-19, 마태복음 26:69-75, 마태복음 26:33-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07-23

말씀내용
베드로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로 공식적 임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여겨졌고, 베드로전후서, 두 편의 신약 서신서를 남겼습니다. 동시에 그는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수치스러운 경력으로도 유명합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그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그날 저녁 다락방에서 뵈었고(요 20:19-23), 8일 후에도 뵈었습니다(요 20:24-29). 모든 제자들이 다 그랬겠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을 뵈올 때 그리 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처음 제자로 부르셨던 갈릴리(디베랴) 호숫가에서 새롭게 만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던지시고는 그를 다시 제자로 부르십니다. 본문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약함 (요 20:19-23, 24-29; 21:1-14; 마 26:33-35, 75; 막 14:72; 눅 22:60; 삼하 11)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로 돌아와 오랜만에 예전에 하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새 수고했지만 아무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해변에 선 한 사나이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잡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의 말대로 하여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잡았을 때, 요한은 그 사나이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직감하고 “주님이시다!”라고 외마디 말을 내지릅니다(요 21:7). 그들은 그렇게 다시 주님을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묘사하기 위해 많은 문학적 장치들이 사용되지만, 그것들을 다 설명하지 않고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해변에 친히 마련해두신 식탁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거듭 부인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얼마 전 산헤드린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 26:69-75; 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25-27). 본문은 베드로의 이 실패 사건으로 시작해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네 복음서는 베드로의 실패 사건을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고만장한 베드로의 실패를 기록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은혜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 베드로의 실패를 네 복음서에 대서특필하신 성령님의 의도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이 주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시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까지 호언장담했습니다(마 26:33-35).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수하의 귀를 베는 호기까지 부리지만,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굳이 왜 이런 실패가 필요할까요? 이런 실패는 너무나 중요하고 우리 삶에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죄성의 깊이, 약함의 실존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주님을 섬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성의 깊이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실패의 사건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 밤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을 했습니다(마 26:75; 막 14:72; 눅 22:60). 자신만만한 베드로가 이 실패의 순간에 얼마나 깊이 좌절했고 자신에게 비애를 느꼈을 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눈물은 베드로가 은혜를 받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눈물이었습니다. 좌절과 비애 그리고 실패는 하나님의 사람의 필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 자신의 약함을 보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 다윗의 처참한 실패를 성경이 자세히 기록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삼하 11). 다윗과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우리의 약함이라는 실존을 보게 하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다윗의 비참한 실패를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그 실존을 깊고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2. 은혜 (요 21:15-16; 고후 12:8-10)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조건입니다. 강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은혜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보상 만 있을 뿐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베드로식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그가 이미 은혜를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패를 경험하기 전의 베드로라면, “바로 그겁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답니다.”라고 대답했겠지요. 그러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뼛속 깊이 알게 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16).”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약함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약함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약함은 부정적이며 부적절한 핸디캡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약함이 은혜의 필요 조건이며, 실패는 오점이 아닌 강점이라고 말합니다. 실패와 약함이 없는 곳에 은혜와 회복은 없습니다. 폴 워셔의 말입니다. “가장 성숙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세속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에 맞서 고군분투할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도덕적 실패를 애통하지 않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애통은 회심의 한 증거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실수와 실패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 안에서 자기 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놀랍습니다(고후 12:8-10). 그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단정할 수 없지만, 그의 연약함과 관련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약함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약한 것들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 덕분에 약할 때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더 강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함은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핸디캡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의 조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제목이 암시하는 바, 약함이 은혜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약함이 은혜를 만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약함을 기뻐할 수 있고 심지어 자랑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약함은 은혜를 만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자기 약함의 실존을 깨닫는 것이 가지는 부정적 이유도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기 약함의 실존을 깨달을 때 그 안에서 자기 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은혜가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핸디캡이 아니라 은혜를 만나게 되는 최적의 조건입니다.


3. 사랑 (요 13:36-37; 빌 4:4; 벧전 1:8)
이제 오늘 본문을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 연거푸 물어보신 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왜 특별히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을 다짐받으시고 새로운 각오를 다잡아 주실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시는 대신 왜 굳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왜 중요한가, 얼마나 중요한가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본문 이해와 관련하여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신약성경이 쓰여진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네 개가 있는데, 여기서 주님은 처음 두 번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ἀγαπάω)로 질문하셨고, 세번째는 친구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φιλέω)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리아(φιλέω)로 대답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아가페를 100%의 사랑, 필리아를 60%의 사랑이라고 수치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알게 된 베드로가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으므로 필리아로 두 번을 대답하자, 주님은 세번째로 필리아로 물으셨고 베드로도 필리아로 대답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가페와 필리아가 서로 혼용되는 개념이므로(요한복음 3:35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할 때 아가페를 썼는데, 5:20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필리아를 사용함), 그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 입장 또한 적지 않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해석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그것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 세 번 물으심으로써, 자기 의가 철저하게 무너진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에게 입증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옆에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가 이전의 그가 아님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패로 무너진 베드로를 공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모든 성경 독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기 의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서는 자신만만함이 사라졌고, 그는 자신의 죄성과 약함의 깊이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전히 그리고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스스로 자신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모두 대답합니다. 이전에는 주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했지만(요 13:36,37), 이제는 “주님이 옳습니다. 주님이 저를 더 잘 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의 지식과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를 아시는 주님의 지식을 의존합니다.
자, 이제 진짜 질문, 주님은 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 또는 각오와 다짐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사랑이 따름과 섬김의 조건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는 길은 그저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결코 기쁨의 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빌 4:4).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성과만 만들어내면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은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네가 나를 따르는 길은 기쁨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길의 끝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베드로전서 1:8).” 어떻게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보지 못한 주님을 사랑하여 고난까지도 기쁘게 당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1세기라는 고난과 박해의 시간에 주님의 신실한 길따름이들로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함은 은혜의 필요 조건이고, 다시 이 은혜는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첫번째 반응은 보지 못하는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을 위해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해도 왕 자신에 대한 소홀함을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위해서 하는 많은 일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성도들이 주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 자신을 소홀히 대하고 있는지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질문을 오늘도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4. 따름 (요 21:18-19; 골 1:29)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이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는데(요 21:18), 이것은 21절이 설명하듯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3년 전 갈릴리 호숫가, 거의 그 자리에서 베드로를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요 21:19).”
왜 주님은 “나를 따르라”는 새로운 부르심을 주시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베드로가 배워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육으로는, 육신의 방식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자신만만함, 패기, 의욕, 각오와 의지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게 왜 안 됩니까?”라고 묻고 싶으십니까? “그렇게라도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훌륭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말하자면 베드로가 결정적 실패를 경험하기 전의 모습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것의 결국은 자기 의를 높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다른 무엇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이 고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로새서 1:29).”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를 의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실력을 믿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걸어가는 길입니다. 날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 사랑의 동력은 식고 맙니다. 그 은혜를 받는 길은 자신의 실패 속에서 약함의 실존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진실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자는 설 수 없습니다. 아니, 자신이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설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작은 존재임을 알기에,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해서 주님께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을 따라 이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약함이 은혜를 만날 때
찬송가 중에 흑인영가의 번역인, [십자가를 질 수 있나?](찬 461장)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면, 누가 과연 “제가 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못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요(마 16:24; 막 8:34; 눅 9:23). 이 길을 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 인생 중에서 우리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옵션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길은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십자가도 사랑할 수 있고 그 십자가도 영광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따름은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여기에 황금 사슬이 있습니다. 약함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결코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알고 누릴 수 없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만, ‘두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지라도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이 길을 걸어가는데, 다시 난관에 봉착합니다. 육신의 힘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싸움을 어느 순간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실패하고 넘어짐으로써 자신의 약함에 떨어집니다. 이 약함이 다시 은혜를 만날 때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쁨으로 주님을 따를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황금 사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이 황금 사슬이 끊어질 때마다, 다시 자기를 의지하는 자리에서 나와서 주님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황금 사슬은 성도의 삶에서 지속됩니다.
존 라일의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며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이른바 교회 다니는 사람, 그저 예배 참석자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 한 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임을 아십시오. 이런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는 약함이 은혜를 만나고 있습니까? 은혜를 만날 만한 약함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그저 강한 자입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 일이 여러분의 삶에 깊게 경험되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