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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주일 2014 -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참 놀라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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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주일 2014 -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참 놀라운 소식.

마태복음 1:21, 누가복음 2: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2-21

말씀내용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참 놀라운 소식> 마 1:21; 눅 2:18

1. 사람들이 다 놀랐다(눅 2:18)!
누가복음 2장 18절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듣고 다 놀랐다고 말합니다. 여기 놀랐다는 말은 두려움이 있는 놀라움입니다. 목자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장 8절부터 그 이야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 인근에서 한 밤에 양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고 한 천사가 그들의 곁에 섰습니다. 우리는 그 광경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목자들도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명이 함께 있었기에 그것은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으니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다윗의 동네에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다윗의 동네는 베들레헴입니다. 이것은 작은 촌에 불과한 베들레헴 사람들이 가지는 자부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마치자,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들립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목자들은 서둘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집집을 다니면서 물었겠지요. 결국 멀리 나사렛에서 호적하러 왔는데 부인이 만삭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봤습니다. 그가 메시아입니다. 이 이야기를 목자들은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다 놀랐다고 18절은 말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있는 놀라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와 비슷한 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는 원한을 품은 형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렇게 멀리 길을 떠나 보지 않았던 사람이 홀로 그 길을 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밤이 되어 광야에서 홀로 잠을 자는 것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밤에 야곱은 하나님의 현현을 보게 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고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이제 그의 이야기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하며 두려워했습니다(창 28:16). 바로 이런 두려움인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2. 놀라움에 대한 추적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 정황을 조금 더 추적해보겠습니다.
A. 동방박사들(마 2:1~12)
먼저 그 자리에는 동방박사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에서 별을 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루 이틀의 간단한 여행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 길을 왔습니다.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나셨는데 이는 그냥 왕이 아니다 하는 정도의 계시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아, 바로 이런 분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놀란 것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는 바로 하늘이 보내신 분이라는 인식과 느낌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하고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B. 요셉(마 1:20~23)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동방박사들 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혼한 아내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은 채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이것은 돌로 쳐 죽여야 할 사안이지만, 요셉은 그저 조용히 관계를 끊음으로써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계시의 형태로 주어진 꿈이었습니다. 천사는 아내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말라고 하면서 그 임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텐데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할 것이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것을 성취하는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은 잠이 깨어 천사가 말한대로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나 그들은 호적을 하기 위해서 원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아내 마리아는 만삭이었지만 여관을 구하지 못해서 가까스로 마구간을 구하여 거기서 해산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이미 이 계시를 알고 있었기에 이분이 예수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다시 한 번 이 아기가 어떤 분인지를 말해 준 것입니다. 어찌 두려움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C. 마리아(눅 1:26~38)
우리는 이제 마리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가장 많은 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꿈이 아니라 생시에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말합니다. 천지개벽할 일입니다. 정혼하고 아직 결혼식을 남겨두었기에 남편과 동침한 적도 없는데, 어찌 아이를 가진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가브리엘은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고, 나실 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며 다윗의 왕위를 가지고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왕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이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참 큰 믿음입니다. 그녀는 그녀의 친족인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때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온다”고 말합니다(눅 1:43). 내 주의 어머니는 내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금씩 더 분명하게 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산을 하게 되고 지금 눈 앞에 자신이 낳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더 두려움으로 놀랐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정황을 생각해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 중 한 사람도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두려움에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소식은 정말 두려워하고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과 밖에서 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구유에 누우셨던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3. 인생의 가르침, 철학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웃기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소위 ‘세계 4대 성인’이라고 해서 예수님을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공자와 함께 분류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가르침을 찾으려고 생각하는 시도인데, 이런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산상보훈을 아주 사랑했고 그것을 자신의 비폭력투쟁의 이론적 기초로 삼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고, 그분이 오신 목적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이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가르침이나 철학적 가르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똑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정교한 인생관과 윤리 혹은 철학 이론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아무 소용도 없는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철학과 지식과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그것을 세워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그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자기 만족과 자기 추구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단지 지적인 만족을 위해서 성경을 혹은 주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인생의 가르침이나 철학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4.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보여주시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은 주님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는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고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면서 상과 의자들을 둘러엎으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인들이 싫어하는 모습이고 관용적이거나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분노 조절에 실패한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들을 예외로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본을 보여주시려고 오셨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본받아 삶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은 절대로 죄인에게 평강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한계입니다. 주님은 본받는 삶을 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5.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오셨을까요?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의 중보자로서 선지자직을 가지고 오셨지만, 단지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뜻을 이루시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만 잘 듣고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6. 사회 개혁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하나 더 다룰 오해는 예수님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오신 개혁가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신 혁명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이런 오해들이 있어왔지만, 그 뿌리는 오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주된 오해가 이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의 영광을 온 세상 위에 회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중에 이런 유대인 대중들의 메시아 오해를 의식하셔서 자신을 감추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습니다. 이 오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나라로 혼동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혼란스러워하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것이지만(계 11:15) 아직은 아닙니다. 주님은 타락한 세상을 개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7.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께서 나시기 전에 천사가 요셉에게 전해준 메시지에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목적으로 오시는지에 대한 참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요셉이나 마리아가 붙여준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영원 전에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실 성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에게뿐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이 이름은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서 계시되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이 이름의 의미 안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목적이 명확하게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요 17: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8. 복음: 객관적인 역사(고전 15:3~4)
어떻게 주님께서는 이 목적을 성취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은 복음에 대한 가장 간결한 요약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가르침이나 복음 전파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복음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3장 25~2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를 흘려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그들과 화목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신약 성경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선지자 이사야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8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5~8).”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복음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 역사 속에 일어난 객관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죽으시는 것이었을까요? 잘 가르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렇게 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정말 그것이 가능했다면 물론 주님은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지 않으셨겠지요.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잘 가르쳐주기만 하면 자기들이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희망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엡 2:1).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3:20).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선언입니다. 인간은 어떤 가르침으로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지식과 학문을 성취하고, 아무리 높은 권좌를 누렸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침상에 누워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가 가졌던 지식이나 권세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권세와 명예와 성공이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뉴스 미디어를 통해서 매일 매일 확인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어떤 사회 프로그램을 제시하시거나 그런 사회를 만드시거나 혹은 선한 인생에 대한 희망적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복음을 전하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얻을 복음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9:30).”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바로 예수 이름의 뜻,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 일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심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전해준 뒤에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임마누엘!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이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의 이름의 궁극적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이 필요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9. 놀라야 할 소식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참된 교회는 지난 스무 세기 이상 동안 이 복음을 믿어왔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들은, 주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이 소식은 정말 두려움으로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우리를 더 큰 두려움으로 놀라게 할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이르지도 못할 명령을 주신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들이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사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기 죄를 담당하신 죽으심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그 복음의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이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 성령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성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려고 오신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마땅히 두려움으로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http://www.jmcusa.org/Sermon_Audio/SAKor2014/SAK141221_KimHI.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