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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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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정체성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0:38, 로마서 8:31-3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6-12

말씀내용
1. 세례에서 세례로 (막 10:38; 눅 12:50; 요일 5:6)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가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요구되는 죄와 부정을 씻는 의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일은 기꺼이 죄인과 같이 여김을 받으시는 비하이고 굴욕의 사건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반응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첫번째 세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두번째 세례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38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일찍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또 하나의 세례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십자가의 죽음을 세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새 언약 아래서 세례는 옛 언약의 표인 할례와 연결됩니다. 할례는 남성 성기의 끝 부분을 잘라내는(cut off) 의식입니다. 할례에서 ‘잘라내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생후 8일 만에 행해지는 할례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하나님께 잘려 나가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받을 세례라는 표현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와 죄의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잘려 나가는 심판을 받으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이 받으신 두번째 세례입니다. 세례는 죄에 대한 심판의 표이고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눅 12:50). 그렇다면 주님의 공생애는 세례로 시작하여 세례로 마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사도 요한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5:6a).”고 표현하였습니다.


2. 정체성의 싸움 (마 4:3,6; 눅 4:13; 요 10:30; 마 27:40; 고후 13:4; 마 27:46)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지점은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 성부 하나님의 이 정체성 선언 직후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신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마귀의 시험의 핵심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6)이란 말에 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하시자 마자, 마귀는 바로 달려들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첫번째 세례에서 두번째 세례인 십자가 죽음으로 향하시는 공생애 여정에서 내내 정체성의 싸움을 싸우시게 됩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했던 마귀는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고 기록했습니다 마귀는 계속 예수님의 주변을 돌면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께 도전했고 시험했습니다.
한 예입니다. 수전절(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동상을 세우고 돼지를 제사지내는 등 성전을 더럽힌 일이 있었는데, 주전 164년 유다 마키비우스가 군대를 일으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하나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정말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대답하시는데(요 10:30),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넘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 거부와 공격을 아셨음에도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에도 그 정체성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말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광야에서 얼마 동안 떠난 마귀는 주님 주위를 내내 맴돌면서 사람들을 통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 자신을 증명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끝내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당신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주님은 공생애의 시간 동안, 당신이 세례를 받으실 때 주셨던 성부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을 붙드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눈 앞에 두신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의 음성을 붙들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실 때에도(마 27:46)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을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성부 하나님의 애정에 대한 그분의 예민한 인식과 성부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한 없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재로서의 인식은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였고 십자가까지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그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삶을 시작하였고 그 여정을 걸어가는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3. 복음과 정체성 (롬 8:35-39)
복음은 절망하는 죄인에게 들려지는 좋은 소식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주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종교는 구원을 받으려면 이런 저런 선을 행하라고 요구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셨다고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례는 “제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는 절망하는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구주가 필요합니다.”라는 공적 고백에 근거하여 베풀어집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들으셨던 것과 동일한, 하늘의 소리, 성부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선언합니다. 종교는 “선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에서의 구원은 마지막에 전체의 삶을 평가받고 결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삶을 지금부터 지켜보고 너를 최종적으로 구원할지를 결정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출발점인 첫 믿음과 세례에서 선언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마르틴 루터가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교리라고 불렀던 이신칭의의 교리는 처음 믿는 순간 그 믿음의 참됨을 보시고 “죄 없다”고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주셔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믿는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언약의 객관적 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으로 영원한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불안함과 염려가 아닌 사랑과 안정감과 확신 아래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세례 때 주시는 하나님의 정체성 선언은 단순히 “너는 누구다”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의미는 “나는 너를 사랑하며 기뻐하고 네 가장 깊은 갈망을 채우기 위해 헌신할 것이고, 네 창조적 소명을 절정에 이르게 할 것이란다.”라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자의 삶에는 평탄함 만이 있을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험이 닥칠 때 신자는 어떻게 이 고비를 넘어갑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음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신자들은 믿음 때문에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과 같이 종일 죽임을 당하는 상황들을 겪을 수 있습니다(롬 8:35). 하지만 그 모든 것,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롬 8:39)”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의 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삶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을 얻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 답게, 그 신분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4. 시험의 본질—정체성 시험 (마 4:4,7,10; 롬 8:31-34)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신자는 일평생 마귀의 시험의 타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본질은 주님에게 그러했듯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정체성 도전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에게 이 마음을 줍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는 충분치 않아. 너는 부족한 존재야.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은 너처럼 살지 않아.”라면서, 우리 근원의 수치심을 자극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광야에서 주님은 시험하는 마귀를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이런 마귀의 시험에 주님께서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마 4:4,7,10).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권위로 마귀를 대적하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마음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고 그 목소리에 주의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선언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은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귀야, 아버지께서 내게 ‘내 기뻐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너는 헛소리 그만 하고 물러가라.” 이것이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는 주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기뻐하는 대상이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선언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시험,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우리의 정체성을 흔드는 마귀를 대적할 말을 가르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사실, 이 앞에서 바울 사도는 폭탄 같은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5. 주목하는 삶 (히 12:1-2)
오늘 세례를 받는 소희 자매만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은 늘 마귀의 이런 시험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신자의 정체성 선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을 늘 붙잡으십시오. 시험과 환난 속에서 마귀는 여러분의 정체성을 흔들며, 여러분이 얼마나 부족하고 한심한 존재인지를 속삭일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여기서 ‘얽매이기 쉬운 죄’라는 말은 ‘산만해지기 쉬운 죄’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을 끊임 없이 산만해지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목소리, 복음 안에서 여러분에게 확증된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버지의 그 목소리,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고, 나의 기쁨이란다.” 산만해지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내내 아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의 주요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만드실 주 예수님을 주목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천성문에 이르러 사랑하는 구주를 뵈옵기까지 아버지의 그 선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새 정체성을 주목하고 붙들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