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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1). 좁은 문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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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름이들 - (1). 좁은 문 좁은 길

마태복음 7:13-14, 누가복음 18:24-25, 마태복음 4:20, 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3-06

말씀내용
계획했던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의 서론으로서 [길따름이들](the Wayfollowers)이라는 주제로 몇 차례 말씀을 나누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 ‘길따름이들’(the Wayfollowers)
언젠가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길따름이들’이라고 불렸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일상에서 길 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초기교회 신자들의 삶의 양식이 불신자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독특한 삶의 특징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사회학적 용어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용어는 후천적 배움을 통해서 무의식중에 또는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구성원들의 행동 양식을 가리킵니다.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되면, 그 아비투스는 바깥 세계에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말 보다, 삶과 삶의 방식으로써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법을 배워 그렇게 사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초기 교회는 세례를 주기 전 최종 면접을 통해 그 삶 속에 기독교인의 아비투스가 형성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아비투스에는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세례를 받기까지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초기교회가 이와 같이 삶의 방식을 강조했던 것은 256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가 쓴 글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의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를 우리의 옷이 아닌 진리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덕을 그것에 대한 (말의) 자랑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알아본다. 우리는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살아낸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과 예배자로서 영적 경의를 지니고 우리가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인내를 보여 주자. 그 덕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공통점을 갖는다.”
초기교회 신자들의 삶의 공통적인 특성인 아비투스는 어디로부터 형성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신 데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함께 동고동락하심으로 당신의 삶을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초기교회의 아비투스는 주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들을 ‘길따름이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길따름이들’이라는 주제로 몇 차례 주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참된 길따름이들로서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2. 당신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마 7:28-29)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여러분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길을 따르는 제자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종종 제자와 신자를 구분하는 분들을 봅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고 신자는 그리스로를 믿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점에서 모든 신자는 제자이고, 길따름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여러분은 진정한 길따름이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진정한 길따름이인지를 보여주는 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 증거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가? 그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시작해서 27절까지는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주님의 설교의 주제는 제자도입니다. 주님은 제자의 특성, 의무, 자세, 그리고 위험 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7:28-29에서 보듯이,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주님의 설교가 보통 서기관들이 하는 설교와 달리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다고 평가하며 놀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순종의 행위 없이 설교를 즐기는 것은 죽은 종교이며, 헌신이 없는 구원의 확신이란 그저 사람의 영혼을 점점 무디게 만들 뿐임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결론부에서 주님은 삶의 행동 양식을 통해서 신앙이 증명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진정한 길따름이는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 두 개의 문, 두 개의 길
이 짧은 본문에는 두 개의 문, 두 개의 길이 나옵니다. 좁은 문과 큰 문이 있고, 넓은 길과 좁고 협착한 길이 있습니다. 두 문과 두 길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제자의 삶의 방식, 즉 주님의 길따름이로서 더 성공하느냐 덜 성공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느냐, 구원을 잃어버리느냐의 문제이고 생명과 멸망의 문제입니다. 두 문과 두 길은 규모와 인기 그리고 목적지가 모두 정반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길따름이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고 협착한 길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왔습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좁고 협착한 길로 행하고 계십니까? 이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봅시다.


A. 짐을 버리고 가는 길 (눅 18:22,24-25; 마 4:20,22; 눅 5:11,28)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행하는 것은 짐을 버려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문이 좁고 작으면 그 문 보다 큰 짐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고 하셨을 때, 주님은 당시 도시로 들어가는 큰 문과 대로를 의미하신 것입니다. 거기는 가축들은 물론, 수레로 자기 짐들을 잔뜩 싣고도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옆으로 나있는 작고 좁은 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짐이 없는 사람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관리가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매우 과격해보이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18:22).” 큰 부자였기에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는 그 사람을 보시며 주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누가복음 18:24–25).”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기 때문에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결정은 어차피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죽음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채터누가(Chattanooga)라는 곳에는 바늘귀(Needle’s eye)라고 이름이 붙여진, 큰 바위와 바위 사이로 난 좁은 통로가 있습니다. 어떤 짐도 가지고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조금 더 말합니다. “주님의 지복강화 중 처음 두 지복은 좁은 문의 양편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이다.” 처음 두 지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과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그는 계속 말합니다. “그 두 기둥은 영적 파산에 대한 인식과 죄에 대한 슬픔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오기를 원한다면, 짊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이 파산한 존재라는 사실과 죄 인식 외에 아무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반면, 많은 사람은(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부자 관리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문이 크고 길이 넓은 곳을 선호합니다. 그 문과 길이 결국 멸망으로 인도한다고 주님께서 친히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복음서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묘사하는 방식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고(마 4:20), 요한과 야고보는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마 4:22). 누가복음은 특별히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눅 5:11). 세리 마태도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일을 보다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눅 5:28). 이 동일한 강조들은, 이들이 부자 관리와 달리, 주님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고 협착한 길을 행하는 길따름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지금 당장 모든 소유를 팔아버리고 주님을 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더 이상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지 않고 그 주권을 주님께 양도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라고 말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는 진정한 길따름이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점에서 길따름이는 큰 문과 넓은 길로 행하는 사람이 결코 알 수 없고, 그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평안과 안식을 삶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B. 외로운 길 (마 6:33; 창 18:19)
둘째로,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는 여정은 외로운 길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인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길따름이는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길따름이는 외롭습니다. 이 말은 신자는 아무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사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이 외로움은 길따름이가 세상에서 두 나라에 속한 사람이기에 피할 수 없는 외로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으로 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지만 지금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느 나라에 가서 살든지 우리의 의식 깊이 박혀 있는 일종의 애국심 같은 것을 느끼듯이 말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며 같이 살아가지만, 자기가 속한 본향이 하늘에 있음을 안다면 이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적음을 알기에 외로운 여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은 어떤 단체나 기관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온전한 의미에서 완전히 속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지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는 길따름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존재합니다. 그 기준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판단하고, 그들의 공약을 평가하며, 정당에 대한 조건적 지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금과 같은 대통령 선거 기간에는 광분합니다. 그러나 길따름이들은 대통령 후보들이 메시야가 아니며, 그들이 약속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그들의 주장이 복음이 아님을 압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지지하고 동조하지만 한 사람이나 한 정당에 모든 것을 걸고 동조할 수는 없습니다. 길따름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언제나 먼저이기 때문입니다(마 6:33). 하지만 길따름이들은 이 세상에서 큰 문과 넓은 길을 가는 수 많은 사람보다 더 믿음직스럽고 성실하게 ‘의와 공도’를 행하는 정의로운 모범 시민으로서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창 18:19). 그리고 비록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는 길따름이들은 외롭지만 그 외로움 덕분에 자신들과 동행하시는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길따름이들은 서로를 통해서도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C. 고생 길 (마 5:10)
세번째로,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하는 여정은 고된 여정, 소위 고생 길입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좁다는 의미 보다, 에워싸 밀거나 비집고 들어가다 눌림을 당한다는 뉴앙스를 가집니다. 그래서 ‘협착하다’는 이 헬라어 단어는 ‘환난, 고통, 괴로움’을 의미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즉 이 길은 고생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좁은 길로 행하게 되면 금방 길이 넓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을 부추기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좁은 길로 행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길이며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을 가기도 전에 지레 겁에 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10).”
많은 사람이 애창하는 찬송,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은 사라 F. 아담스(Sarah F. Adams, 1805-1848)의 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이 찬송의 가사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 하는것 옛 야곱이 / 돌 베개 베로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비록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며 험할지라도 이 길이 생명길이기에 은혜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용기와 인내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믿음의 특성입니다. 믿음은 겁이 줄고 용기가 늘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길따름이들은 겁을 덜 먹고 점점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들의 가장 특징적인 아비투스는 인내였습니다. 세상은 길따름이들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들은 저런 죽임과 비참함에 처해짐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써 그 협착하고 좁은 험한 길을 걸어가는가?” 주님이 약속하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 생명은 먼 미래의 천국에서 주어질 어떤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생명은 그들에게는 현재의 고생길에서 더 깊이 누리고 경험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이었습니다. 길따름이들은 좁은 문, 협착한 길은 비록 고생길일지라도, 이 길 보다 더 복되고 은혜로운 길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습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사랑하는 주님을 가장 깊이 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 “나를 따르라!”
주님이 말씀하신 문은 두 개이고 주님이 말씀하신 길도 두 개 뿐입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고, 또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중도는 없습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주시는 주님의 이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로 행함으로써 네가 그리스도의 참된 길따름이임을 보여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입술의 고백이나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는 것으로 우리가 주님의 길따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중에는 오래도록 교회 생활을 하신 분들도 계시고, 모태신앙인도 있으며, 교회의 직분을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 그런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너는 내 제자이니? 너는 나의 길따름이가 맞니?”라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의 부담을 안겨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 28:18). 그분이 여러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은 “네가 나를 따른다면, 내가 네 인생을 책임져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그 좁고 협착한 길을 걸으며 너와 동행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좁은 문, 좁은 길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길따름이가 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멋진 모험을 시작하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상당한 세월 동안 교회 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구원의 확신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른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왜 오래도록 교회 생활을 했어도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을 신뢰함으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본 적이 없고 협착한 길로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맥컬로우의 말입니다. “주의 깊은 관찰을 하려면 연구 방식이 연구 대상과 일치해야만 한다.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가지고 별을 관찰하고, 생물학자들은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며, 사회학자들은 조사와 면담을 통해서 인간의 행동 양식을 발견하며, 정신병리학자들은 깊은 대화를 통해 잠재의식을 연구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탁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주목하게 된다.” (하찮아진 하나님, p.72)
여러분이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당 의자에 앉아서, 많은 설교를 들었다고 할지라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외로운 고생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의 말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그 안에서 인격적인 신앙 관계를 이루었을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를 따르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와 협착하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주님의 길따름이가 가는 길은, 비록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외롭고 고된 길이지만,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고 누리는 길이기에 가장 은혜로운 지복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길따름이가 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처한 현재의 모든 삶의 상황에서, 가정과 일터 그리고 모든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행하는 지복을 누리는 주님의 길따름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