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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3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6) - 신자의 사회생활 : 이웃 사랑과 모범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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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3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6) - 신자의 사회생활 : 이웃 사랑과 모범 시민

마태복음 5:38-48, 레위기 19: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3-17

말씀내용
73 신자의 사회생활-이웃사랑과 모범시민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 모범시민이어야 한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이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당연한 명제입니다. 초대교회의 변증가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뛰어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러합니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는 하나 양심이 불량한 교인들이 적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한참 모자라는 교인들이 적지만은 않습니다. 이런 주제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참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이 세상에서 모범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 주제를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과 자연법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이 모범시민이 되어야 하는 근거를 잠깐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범 교인이 왜 꼭 모범 시민이어야 합니까? 만일 모범 시민이 아니라면 그는 모범 교인일 수 없는 것입니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 쓴 책 중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유치원에서 “거짓말하지 마라, 싸우지 마라, 친구를 존중하고 사이 좋게 놀아라, 남의 것을 가지지 말아라, 줄을 서라, 질서를 지켜라, 규칙을 준수하라” 등 이런 많은 가르침을 듣고 행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런 가르침들은 율법이 가르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칼빈은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그것을 따라 살게 하는 유용한 법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복된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일반적으로 세 종류의 법으로 구분됩니다. 의식법, 시민법, 그리고 도덕법입니다. 의식법은 주로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나 절기들과 관련된 계명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써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리거나 유대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깊게 묵상하고 이해하게 되니 그 유익이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시민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맥체인캘린더에 따라 읽은 출애굽기 21~24장이 모두 시민법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정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시민법을 문자적으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민법의 규정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깨닫게 되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도덕법이 있습니다. 이 도덕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유효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도덕법인 십계명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도덕법인 십계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들로서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이고 둘째는 다섯째 계명에서 열째 계명까지로 주로 사람들에 대한 계명을 다룹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요약하신 것도 이와 동일합니다(막 12:30~31). 게다가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은 잘 하는데 이웃 사랑에서는 실패할 수 없고, 이웃 사랑을 잘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두 가지 내용을 지나치게 분리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우리가 십계명의 두번째 내용을 보면, 이 내용은 일반적인 자연법과 그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법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과 해석이 존재하지만, 자연법은 인간이 제정한 실정법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민족, 시대, 사회를 초월해 영구불변의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법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연법이라 불립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법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본성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법이기에, 자연법이나 십계명은 크게 보면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밖의 세상은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그들과 소통하는 관계 속에서 호소해야 하는 권위는 자연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세상에서 실정법의 적용을 받고 그 법에 호소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이 세상에서 십계명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자연법의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는 불신자들의 눈에도 그 신자는 모범적 시민이라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이 가는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객관적이고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크게는 십계명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가 십계명과 같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갈 때, 그 삶으로써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깨달음과 심지어 은혜를 베푸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왜 동시에 모범 시민이 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2. 주님이 해석하신 율법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구약의 율법 특별히 도덕법에 해당하는 내용을 해석하신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해석하시는 주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제정하여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세상에서 신자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원리를 제공해줍니다. 특별히 사람에 대한 계명들, 이웃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우리가 이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38절은 소위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모세의 율법에만 있지 않고, 함무라비 법전 같은 고대의 법전들에서도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자연법에 속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법에 대해서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데요?”라고 묻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 법을 타당한 법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래 이 동해보복법은 원수를 갚고 복수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법이라기 보다는, 지나친 보복이나 징벌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정의를 세우려는 법의 의도가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말씀은 상한선을 두어, 재판을 받을 때 범죄한 사람이 행한 잘못 이상의 보복이나 징벌을 받지 않게 하심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위한 기준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경우에, 이 동해보복법은 개인적인 복수를 정당화하는 구절로 오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 율법 조항을 언급하심으로써 말씀을 꺼내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39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주님은 율법의 입법자요, 수여자로서 율법의 문자를 넘어 의도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먼저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보복하지 말라는 표현 보다 더 넓은 표현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악한 자’는 문맥상 사탄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피해를 준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여기서 주어진 상황은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구약 율법에서 주신 계명을 사용하여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말고, 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은 아주 개인적인 상황에서 주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사회 윤리나 정치의 영역에서 적용해야 하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개인적으로 내게 모욕을 주고, 내게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복을 하지 않고 그를 대적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지만, 만일 이것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횡포이고 시스템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라면 신자는 수동적으로 이것들을 허용하고 침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신자는 달리 행동해야 할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주제는 추후에 다룰 것입니다.
요즘의 한국사회는 미국을 닮아 소송 사회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미국은 가히 만사를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소송천국이라 불립니다. 우리 사회도 지금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전제되는 상황도 유사합니다. 만사를 법에 호소하는 태도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은 법률적으로 정당한 자기 권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개인에게 행해지는 악행, 가령, 모욕과 어떤 요구에 대해서 그것을 허용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물론 그냥 주님께서 말의 흐름을 따라서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물리적 폭력 보다 손등으로 치는 모욕적 상황을 묘사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오른)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치는 것은 가장 경멸적이고 극단적 학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모욕이라도 수용하고 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40절에서 주님은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을 전당 잡는다고 할지라도 그 겉옷이 대개 가난한 사람의 단벌 옷이고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의 대용이기 때문에 인도적 차원에서 그 제한선을 두어 밤에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는데(출 22:26~27; 신 24:12~13), 주님은 속옷을 원하는 자에게 더 비싼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권리 싸움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절대 양보하고 손해를 감수하라는, 자신의 권리와 재산에 대하여 절대 이타적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41절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또 하나의 상황을 언급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여기서 ‘억지로 가게 한다’는 말은 로마군이 식민지의 평민을 향해서 가지는 강제노역권을 상정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군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게 해서 오 리(약 1.5km, 약 1000보)까지 가도록 강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힘이 없자, 로마군인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던 구레네 사람 시몬 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골고다까지 지고 가게 했던 것이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마 27:32).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로마군의 이런 행위를 극도로 혐오했는데, 이것을 모르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굳이 이 민감한 사안을 여기에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유다의 군사적 애국주의자들로부터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군사적 힘으로 유대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로마 군인에게 잡혀 이런 요구를 받게 될 때, 저항하고 분개하지 말고 기꺼이 오 리를 더 가 주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끝으로 하나 더 말씀하신 사례는, 42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민감한 돈 문제로 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다니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면 되지? 여기에 무슨 단서나 해석을 덧붙여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잘 해석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사례들도 마찬가지인데, 문자 자체 보다 그 핵심에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핵심은 돈 보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돈 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편리함과 유용성 보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R.T.프랜스는 이렇게 이 구절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을 삶의 규칙으로서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자멸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곧 도무지 일하려 들지 않는 성자 같은 빈민들이 등장할 것이고 또 다른 성공한 게으름뱅이들과 도둑들로 북적일 것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사람 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웃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43~44절에 주님의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주님은 계속 구약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19:18을 주님께서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주님은 이 구절을 인용만 하신 게 아니라 해석하셨습니다. 모세 율법에서 말하는 이웃은 동료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모세 율법에서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외국인 거류민들도 개인적으로 사랑하라는 명령도 주기는 했지만(레 19:34; 신 10:19) 모압이나 암몬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민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견지했습니다(신 23:4~6). 시편에 있는 많은 저주 시들도 이런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맥락에서 아마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듯 싶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모세 율법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관용적으로 미워하라는 표현이 의미했던 바,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 당시 쿰란 공동체와 같이 종말론적 금욕적 공동체 종파들은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 율법은 너희 이웃 유대 사람 외에 이방인에 대해서는 너희가 사랑해야만 할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구약 모세의 율법 규정을 뒤집는 듯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로써 차별 없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혈통, 민족, 피부색, 기타 모든 것에 의해서도 인간은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자에게 복수하는 대신 기도해주는 것은 적극적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너희 동료 유대인을 사랑하라. 그러나 너희 대적까지도 사랑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면, 주님은 “너희는 너희 대적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고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주십니다.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서 반응하는 소극적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와 상관없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특징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45절을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처음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답게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시면서 이 주제를 마치십니다(48). 바로 이 ‘완전’이 하나님의 요구의 수준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룰 수 있습니까? 사랑함으로써 온전함에 이른다는 것입니다(요일 4:16).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표로 삼아야할 이상입니다.
3. 신자에게 율법이 작동하는 근거—복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습니까? 근거는 언제나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 일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났고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주실 의를 완전히 이루셨고, 우리의 억만 죄악을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시고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우리 인생을 완전하게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는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마 6:8,32). 하나님이 인생을 책임져주는 사람만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할 수 있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그 계명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놓친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는 지지 못할 무거운 짐이 되고 우리는 율법주의의 멍에를 벗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입었고 장래에 주실 은혜를 알기에, 우리는 한없이 연약하여 넘어지는 존재임에도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여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 전제를 언제나 기억합시다. 복음이 우리 존재와 삶의 근거라는 사실은 언제나 생각합시다.
4. 적용—이웃 사랑의 현대적 표현 방식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매우 자세한 사례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웃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현대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어떤 태도로 구체화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본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밖 세상에서 모범시민으로 살아가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사회에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일정한 규범을 따라 살아갑니다. 여기서 주님은, 신자들에게 외적 규범 이상의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최고의 모범시민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일상적인 경우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의 생각을 돕기 위함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추후 [벧샬롬포럼]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됩니다마는, 먼저 조금 피상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지라도 여기서 다루어 보는게 좋겠습니다.
먼저, 장사를 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웃 사랑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장사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차적으로 적정한 이윤을 남기고 폭리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좋은 물건을 팔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절한 것입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자기를 믿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문지식과 직을 통해 최고의 유익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대하고 최대한 공감을 표시하면서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이 주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기억할 말씀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22~4:1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3:22–4:1).”
하나님 앞에서 하듯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나를 고용한 사람을 사랑하는 기독교적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월급을 위해서 주는 만큼,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일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듯이 가장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고용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고용하는 사업주라면, 의와 공평의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고 자신의 위에도 자신을 판단하실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경외함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사업주가 고용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모든 영역에 이웃 사랑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점에서 뛰어난 시민, 모범시민이 되는 것은 모든 영역을 포함합니다. 운전을 할 때는 다른 운전자들을 위협하지 않고 신호를 지키며 운전하는 것도 이웃 사랑의 표현입니다. 특별히 주차가 중요해 보입니다. 한 번 두 번을 더 넣고 빼는 수고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주차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주차는 그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의 모범시민으로 살아가는 것, 중요합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모범시민으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 살아갈 수 있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범시민, 뛰어난 시민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에 한 번 더, 그리고 더 많이 이웃을 배려하고 공동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많아짐으로써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더 좋아지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