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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8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 - 두 나라 시민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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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58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 - 두 나라 시민의 정체성

마태복음 5:13-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11-04

말씀내용
두 나라 시민의 정체성 (마 5:13~16)

교회에서는 신앙 좋고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직장에서의 그의 모습은 능력이나 성실함에 있어서 그다지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교회 안에 이런 범주에 들어가는 신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는 아닙니다. 극단적인 경우라면,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사람이지만 직장에서는 아주 부도덕하고 성희롱에 가까운 짓을 하는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의심해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교회와 직장이라고 단순화시켜서 말을 했지만, 직장은 가정일 수도 있고, 보통 자신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와 세상이라고 단순화시켜서 말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썬데이 크리스찬’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비정상적 신앙 행태를 꼬집고 비웃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교회생활로 축소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소금이고 교회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금은 교회 안에서만 부패 방지의 기능을 하고, 빛은 교회 안에서만 밝히 빛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부패로부터 방지하는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서 너무나 요원한 말씀이 되어버렸습니다.

1. 신앙 성숙의 장애물—정체성 혼란 (마 22:17)
우리의 신앙이 참되고 바른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시간을 두고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그 사람을 변화시켜 갑니다. 이것을 성화라고하고, 성품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성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과 성품의 괴리 현상을 우리 자신에게서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너무나 많이 보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네 신앙이 틀렸어!”라고 비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의 근저에는 올바르지 않은, 비기독교 세계관이 있고, 특별히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얻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가지지 못할 때, 불균형적 신앙의 양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주 동안 함께 상고할 주제,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은 우리 모두의 신앙 성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리즈 말씀을 통해서, 이 주제에 관한 성경적 입장을 배우고 확인하고, 또 교정할 것은 교정하고 바로 세워가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어거스틴이 쓴 『신국론』 혹은,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 이름을 들어보셨거나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좀 더 자세히 다루려고 합니다마는,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이라는 주제는 멀리 어거스틴의 『신국론』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종교개혁자들인 마르틴 루터나 존 칼빈도 어거스틴과 똑같은 입장은 아니었지만, 이런 ‘두 나라’ 구도의 연속성 안에서 소위 두 나라 이론을 말한 바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특별히 어거스틴 이래로 이 주제, “두 나라(혹은 두 도성)”이론을 다루어왔습니다.
이 주제는 단순히 신학 이론이 아니라,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령,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 22:17)”라고 물었을 때처럼, 이 문제는 이론이 아닌 현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정치체제(국가, 왕국) 아래서 살아갑니다. 신자는 모두 원튼 원치 않든 두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신자는 교회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지만, 또한 동시에 세속 나라에서도 자기 위치를 분명히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고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두 나라의 관계와 두 나라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두 나라는 각각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이 두 나라 안에서의 삶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의 관점을 형성하는데 중요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숙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에 중요합니다.
앞에서 간단히 보았듯이, 만일 이 주제를 잘못 배우고 잘못 알게 되면, 교회에서는 매우 성실하고 열심을 다하지만, 직장 생활이나 시민으로서의 삶에서는 저급하고 모범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세계관이 좋은 신앙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이제 몇 주 동안 우리가 함께 상고할 주제인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은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설교나 가르침의 주제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던 조금은 생소한 주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성숙]이라는 대주제 아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리 신앙의 성숙함,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신앙 성숙의 장애물이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세상은 악하고 죄로 가득하므로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서는 가능한 최소한의 활동만을 하고 모든 에너지는 교회 안에서 쏟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자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런 식의 가르침만을 받아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신자는 결코 바람직한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대개 교회와 세상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가르침은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입장이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아지게 된 것일까요?

2. 세상에 대한 신자들의 적대감은 어디에서 왔는가? (요일 2:15; 요 15:19; 3:16)
이런 생각들이 가능하게 된 성경구절들을 몇 개 찾아보지요.
먼저 요한일서 2:15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그 다음 구절들이 보여주는 바,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은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공존할 수 없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교회와 세상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이 말씀으로 볼 때 명백합니다. 만일, 이 두 구절만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별 수 없이 앞에서 말한 바,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서는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쏟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교회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몇 구절만을 뽑아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이단들이 주로 하는 짓입니다. 참된 신자들이라면, 언제나 모든 성경(Tota scriptura)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성경의 어떤 곳에서 그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럼, 위의 구절들과는 사뭇 다른 구절 하나를 소개합니다. 잘 알려진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도 세상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세상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아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앞에 요한일서를 쓴 사도 요한이 여기서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대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에서는 신자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까, 요한일서의 명령대로, 세상을 미워해야 합니까? 세상은 신자에게 사랑의 대상이어야 합니까,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교회에 속한 교인이기만 합니까, 아니면 또한 세상의 국가의 시민이기도 합니까? 이 두 가지의 삶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까?

3. 성경에서 ‘세상’이 의미하는 것들(요일 2:15~16; 요 3:16; 1:10; 14:30; 16:11; 고후 4:4: 마 5:43~44)
이런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성경이 세상이라고 말할 때,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본격적으로 생각할 것은 신자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한 말씀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요 3:16). 요한일서 2:15에서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신자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성경이 세상이라고 말할 때, 세상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의미하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세상입니다. 비록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이 타락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중립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도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죄인이어서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악의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피조된 물질 세계가 아니라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령, 요한복음 1장 10절을 보면 그 구별이 잘 드러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앞에 두 번 등장하는 ‘세상’은 첫번째 의미에서 창조된 세계를 말합니다. 세번째 나오는 ‘세상’ 즉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은 두번째 의미의 세상 즉 사람들입니다. 자, 여기까지 보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사랑하지 말라고 한 세상은 첫번째도 두번째 의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첫번째 의미에서의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두번째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마 5:43~44).
그러면 성경에서 사용되는 세상의 세번째 의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세속적인 방향을 향하여 가는 체제를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의 시스템, 세상의 가치관, 물질 자체 라기 보다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쾌락, 유흥과 야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고(요 14:30; 16:11),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신’이라고 불렀습니다(고후 4:4). 사도 요한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런 토대에서 한 말씀입니다(요일 2:16). 사도 요한이 사랑하지 말라고 한 세상은 이런 의미의 세상입니다. 마귀의 영향력 아래서 번창하는 악한 체계와 정신과 관습과 그 모든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아버지와 세상을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이원론이라고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원론적 요소가 있지만, 이것은 영지주의나 플라톤 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론적, 우주론적 이원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임시적이고 도덕적인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세상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2:16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여기서 ‘세상’은 첫번째 의미로 창조된 세상을 의미하거나 두번째 의미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번째 의미, 즉 타락한 세상의 악한 시스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마귀에게서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4. 두 나라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교회는 하나님께 속했고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세상 모두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두 나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한편으로는 교회에 속한 교인으로서 살아가고, 또 한편으로는 시만 통치의 영역인 국가에 속한 시민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 두 나라에 속한 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좋은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단지 교회라는 영역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 우리가 속한 직장,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국가 안에서 우리는 책임있고 선량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잘 감당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는 교회와 세상이 적대적이고 대립적 관계에 있다고 배워왔고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소극적이고 어쩔 수 없는 참여를 한 반면, 오직 교회의 영역에서만 모든 힘을 쏟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하는지는 배워서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에서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잘 몰라서 너무나 서툰 모습을 드러내기가 일쑤입니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교회가 집단으로서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라(요 20:21~22).
그 결과, 성도들과 교회는 세상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에서는 악한 영향력이 세력을 키워갔고, 점점 쓰나미와 같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협하는 지경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풍전등화의 조국에서, 그리고 일제에 강점당한 조국이라는 세상에서 상당한 영향을 나타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 초기에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바른 방식으로 대처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의 숫자는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와 교인들의 영향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세속 문화에 침식당하고 있고 성경적인 요소들을 잃어버려온 것입니다. 세상을 적대적으로 간주하고, 우리만의 세상인 교회당을 세우고 그 안에 모여드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 결과입니다. 한 나라의 시민으로 살기로 작정했고, 세상이라는 나라를 버린 결과입니다. 우리의 왕국이 커져가면 갈수록,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더 부패하고 어두워져 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 세상 안에서 일정한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믿는 성도들을 주님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금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부패를 방지하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소금의 기능을 하려면,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소극적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만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필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필드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금으로서 소금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면서 세상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주님은 성도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비추셨듯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추려면, 교회당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그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삶이 더 많이 노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겁이 날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뭐 대단한 차이가 있지도 않은데, 교회 안의 형제와 자매들이라면 모를까,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 삶이 노출되어야 한다니..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존재가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빛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선교회 대표로 일을 할 때, 선교사를 훈련하고 파송하면서 선교사님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가서 무슨 큰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땅에 가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믿음으로 사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당을 지을 수 있고 병원이나 학교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로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들어야 할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삶에 더 익숙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반적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때로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속한 직장이나 세상에서 충분히 살아갈 시간이나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어쩔 수 없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소속은 오직 교회라고 믿고, 한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 나라 시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직장과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모범 시민으로 살라고 주님은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보내십니다. 저는 다시 저 자신과 여러분을 향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는 것은 교회당 안에 머무는 삶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나 여러분이 속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잘 살아가십시오. 직장에서 믿음으로 살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고 고민하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이것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소금으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다락방에 숨어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주님은 우리를 교회로 파송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내셨듯이,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라고,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 20:22).”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우리가 이미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소금과 빛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빛이 세상 사람들 앞에 잘 비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마 5:16).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의 착한 행실로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구원하라거나 세상의 문화를 구속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이 없이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이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의 직장 생활, 가정 생활이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와 교회에서의 일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 그런 은혜를 간절히 구해보셨습니까? 세상에 들어가서 한 시민이요,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감당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교회생활로 축소되지 않게 하십시오.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다가가시고, 착한 행실로서 그 이웃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일들이 일어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면서 사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소금으로, 빛으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시다. 날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빛고을 광주에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