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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적 거인, 요나단 (+영어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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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적 거인, 요나단 (+영어통역)

사무엘상 14:6-15 ; 23:16-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09-19

말씀내용
사람은 다 첫째가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문제를 가지고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끝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5). 이 말씀처럼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명단에서든지 자기 이름이 몇 번째로 나오나 관심이 많습니다. 여기서도 어떤 이들은 마음이 상하고 섭섭해합니다. 그래서 보통 가나다 순서로 하지만 여기서도 하씨나 황씨 성을 가진 분들은 언제나 뒤에 놓이게 됩니다. 끝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진짜 첫째, 하나님 보시기에 첫째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첫째의 그늘에 덮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두 사람의 이름 중에 뒤에 나옵니다. 성경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말하지, 갈렙과 여호수아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런 사람이 또 하나 있는데, 요나단입니다. 아무도 요나단과 다윗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윗과 요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건대, 요나단이야말로 주님 보실 때 다윗 보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두 사람 중 둘째에 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늘 첫째에 밀려서 둘째가 되면 우리 마음은 질투심이나 시기심으로 상하기가 쉽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와 다윗은 원수가 되었어도 되었을 관계였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다윗은 적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인물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장수 요나단(삼상 13:3~4; 14:6~15)
요나단은 그저 감수성이 예민해서 다윗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지지해주기만 하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하고 용맹한 이스라엘의 장수였습니다. 우리가 다윗이 위대한 장수였다고 알고 있다면 요나단은 조금도 그에 뒤지지 않는 장수였습니다. 요나단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그가 아버지 사울의 군대의 일천명 군사를 이끌고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입니다(삼상 13:3~4).

A.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13:4; 14:21~22)
이 사건은 언제나 블레셋 앞에서 겁에 질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블레셋과 싸울 용기를 주게 되었고 온 이스라엘이 사울 왕 앞에 모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용맹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필요한 용기를 심어줄 줄 알았던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이 요나단이 역사에 등장한 첫 장면입니다.
두번째 장면은 사울이 기브아 변경에서 단지 600명만의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을 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철제 무기를 만들 수 없게 하려고 이스라엘에서 철공을 다 없앴기 때문에, 그나마 600명 가운데 칼이나 창을 가진 자는 사울 왕과 요나단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의 사기가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때 요나단은 자기 병거든 자만을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건너갔습니다. 요나단은 병거든 군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14:6입니다. “우리가 이 할례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은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의로운 분노로 했던 말과 너무나 흡사한 말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예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승패가 결코 숫자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울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무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표적도 살피기를 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와서 싸우라고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증거로 알고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요나단은 단지 자기 부하 한 사람만을 데리고 높은 산벽을 타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서 소에게 멍에를 씌워서 반나절에 경작할 수 있는 정도의 지경에서 순식간에 20여명의 블레셋 군사들을 해치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사용하셨습니다. 블레셋 진영에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삼상 14:15). 블레셋 군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사울 왕은 멀리서 이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조국을 배신하고 블레셋에 붙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했고, 블레셋을 피하여 에브라임 산지에 숨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여 그들 모두가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싸우려고 모이게 되었습니다(삼상 14:21~22). 이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두 사건을 볼 때 요나단은 언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아는 지혜로운 장수였고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자들에게 용기를 줄 줄 아는 타고난 장수였던 것 같습니다.

B.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14:45)
그런데 이 전투의 날에 사울 왕은 어리석은 말을 했습니다. 승리를 할 것에 너무나 도취되어 그는 블레셋에게 원수를 다 갚기까지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무 것도 먹지 말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먹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맹세를 하게 했을 때 요나단은 이미 블레셋 진영에서 싸우고 있었기에 듣지를 못했고, 전쟁을 하다가 수풀에서 꿀을 발견한 요나단은 지팡이에 찍어서 꿀을 먹고 눈이 더욱 밝아져 더 잘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난 밤에 사울은 이 승리에 도취하여 밤새도록 쫓아가서 블레셋을 도륙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게 되는데, 대답을 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도대체 누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시지 않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여, 제비를 뽑게 되는데 요나단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꿀을 먹은 사실을 자백받게 되고, 결국 요나단을 죽이려고 하는 합니다. 그때 백성들이 일제히 사울에게 말합니다. 오늘의 승리는 요나단이 만들어낸 승리인데 요나단을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의 요구에 못이겨 요나단의 목숨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 만이 아니라 요나단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왕자라는 직위로부터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용맹과 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2. 다윗을 사랑했던 사람 요나단(삼상 18:1)
이 요나단이 아마 다윗을 처음 본 것은 아버지 사울 왕이 악신이 들릴 때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다윗이 그의 집에 왔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깊은 우정이 생긴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직후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가지고 사울 왕 앞에 왔을 때, 그때부터 요나단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었고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A. 다윗의 마음을 보았다(삼상 17:45~47).
요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다윗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외친 말을 요나단은 들었을 것입니다. 삼상 17:45~47절에서 한 말입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어디서 들어본 말이 아닙니까?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갈 때 자기 부하에게 한 말이 아닙니까? 다윗도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고 하며 흥분했었는데, 이것도 요나단과 닮은 꼴이 아닙니까? 이 두 청년의 마음이 서로 통한데에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심,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에 대한 상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들의 열심은 그날에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우정의 열쇠인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그 마음을 보았습니다.

B. 자기 생명 같이 다윗을 사랑했다(삼상 18:1, 3~4; 19:4~7).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변치 않을 우정에 대한 언약이었을텐데,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 언약은 이 둘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생기게 되고, 어떤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이 우정을 지키겠노라는 언약이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그 증거로 자기의 입었던 겉옷과, 군복, 칼, 활과 띠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장군이 이런 것들 을 누군가에게 준다면 그것을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과 사랑을 성경이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 언제나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했다는 표현은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가볍게 지나칠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주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주로 받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가졌고 다윗은 가지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요나단의 인물됨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기에 자기의 생명을 걸고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을 설득하여 다윗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삼상 19:4~7). 처음에는 성공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는 자신마저 아버지가 던진 창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겪게 됩니다(삼상 20:30~33). 이렇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줄 아는 사람, 요나단(삼상 20:14~16, 30~31)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더 놀라운 요나단의 고백은 삼상 20:14~16에 나옵니다. 그가 아버지사울에게 쫓기기 시작한 다윗에게 한 말입니다.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고 말합니다(삼상 20:14~15). 이 요나단의 말은 비록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이미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자 요나단에게 이런 말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가보면, 사울 왕이 요나단에게 하는 말에서 이것은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요나단이 다시 한 번 다윗을 변호하자, 이번에는 사울이 미친듯이 화를 냅니다. 삼상 20:30~31입니다.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이 일로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까지 창을 던졌습니다. 요나단이 바보가 아니었다면, 사울 왕이 말하는 이 내용을 왜 몰랐겠습니까? 요나단은 바보라서 다윗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았고 그것을 인정했기에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보장된 왕위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아래 복종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4. 두 종류의 질투: 하나님을 위한 질투 대 사람에 대한 질투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요나단이란 인물은 과연 다윗에 대하여 조금의 질투심이나 시기심 같은 것들도 없었을까? 과연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질투심(jealousy)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사울 왕이 악신이 들려서 망하게 되는 과정에도 다윗에 대한 질투심은 놀랍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게 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마음도 시기(질투)였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질투는 교회 공동체와 관계를 망치는 주범으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다툼이나 분쟁과 함께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질투를 부정적 뜻으로만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할 때 그렇습니다(출 20:5; 34:14; 신 4:24).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 관계를 맺으신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크기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유익과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을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투가 사람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발람의 꾀에 빠져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바알을 섬기기 시작한 일로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전염병을 주셨고 이 사건에 가담한 지도자들을 목매어 달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가운데 보란듯이 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음행을 하기 위해서 장막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때 비느하스가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 창으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에 임한 전염병이 그쳤고(2만 4천명이 죽고 나서)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민 25:11). 이런 질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예를 위하여 특별한 열심을 내는 이런 질투를 하나님은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질투가 요나단과 다윗의 마음에서 우리가 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예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질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위한 질투가 분명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질투심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교회와 신앙 생활에서 이것은 거의 절대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질투가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열심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뒤로 숨게 되고, 자신의 욕심과 정욕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정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 말입니다. 왠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현장을 보게 되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깁니다. 때로는 그것이 약해서 요나단이나 다윗처럼 자기의 목숨이나 손익을 걸고 일어서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영광이며,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질투심으로 불붙게 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인물인 요나단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가 가진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한 열심 혹은 질투심이 그로 하여금 자기의 왕위를 위협하는 다윗을 향한 질투를 품지 않을 수 있게 하였고, 오히려 다윗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버지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의 기도는 이것이었을 겁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 질투심을 유발하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첫째가 되어야 하고 내가 중요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투심을 어떻게 죽일 수 있고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위한 열심, 하나님을 위한 질투심이 일어날 때에만 여러분은 사람을 향한 질투심을 이길 수 있고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5. 참된 경건(삼상 23:16~18)
요나단은 무엇보다도 경건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가 기도했다는 표현을 우리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이 무엇인지, 삶의 생생한 증거를 통해서 우리를 가르쳐줍니다. 그에게서 보는 경건은 세 가지 내용을 가집니다.

A.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정과 복종(삼상 23:17)
첫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정과 그것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대로 입니다. 그가 길보아 산 전투에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다윗을 만났을 때는 아버지 사울과 함께 다윗을 추적할 때였습니다. 두 사람은 비밀리에 숲 속에서 생전에 마지막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때,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삼상 23:17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모호한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두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맺고 헤어집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문제가 아닙니다. 요나단은 그 뜻이 자기의 이익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뜻 앞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왕위는 내가 아니라 다윗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확실하게 말한 것입니다.

B. 믿음을 세워줌(삼상 23:16~18):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는 삶?성숙
요나단이 그렇게 다윗에게 말했을 때, 다윗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을까요? 다윗은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 마음과 몸이 다 지쳤고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때 요나단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삼상 23:16). 요나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고, 블레셋과 싸울 용기를 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요나단은 다윗의 믿음을 세워주는 인물로 여기 등장합니다. 요나단의 삶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서게 하는 힘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성숙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미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지하려는 마음을 빼앗고 허물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 경건한 어른은 지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는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요나단이 보여준 삶입니다. 적어도 이 모든 성경의 기록들에서 요나단은 다윗보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는 너무나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C. 사랑: 참된 교회 공동체의 이상은 바로 이 형제의 사랑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과 사랑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처럼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주신 새계명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라고 썼습니다. 형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형제 사랑이 없다면 거기에는 하나님 사랑도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형제 사랑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지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35).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윗이 아니라 요나단의 입장에서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형제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여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십니까? 그렇게 사랑하실 수 있습니까? “누가 그렇게 날 사랑해?”라고 묻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오늘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것은 내 교회다. 너는 네 생명처럼 네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겠니? 그것이 네가 나를 사랑하는 표시란다.”

D. 우리들의 요나단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15:13~14)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5:13).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요나단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사셨고 친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요나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부요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인간 요나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요나단, 진정한 요나단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용맹한 장수셨고, 그분은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실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요나단이 되신 주님을 인하여, 그리고 그 주님을 알수록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한 영적 거인인 요나단과 같은 자리로 인도해주셔서, 이 교회가 주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 앞에서 증거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