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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3). 자기보다 하나님을 높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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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3). 자기보다 하나님을 높인 사람

사무엘상 17:41-4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08-29

말씀내용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평가하십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마음이냐 하는 것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하시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 언제나 은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람도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교만한 사람, 자기를 높이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즐거워지십니까? 인간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찌 피조물의 교만함을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이 가진 또 하나의 면모는 자기 보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자기 보다’라는 말이 조금은 걸립니다. 사실 제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만 높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본능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참을 수 없는 본능(26)
사람이 참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오늘 그 유명한 골리앗과의 싸움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참을 수 없는 본능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그가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은 그가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선 것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행위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울과 같은 사람이 보면, 그것은 자살행위였습니다. 의로운 자살행위라고나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다윗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본능 같은 것이 중생과 함께 심겨지게 됩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이나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을 다윗은 듣게 됩니다. 이것은 우연인 것 같지만, 실상 하나님께서 맞추어 놓으신 타이밍에 다윗이 이 전쟁터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군대에 간 세 형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남은 다섯 아들 중에서 다른 아들들을 보낼 수 있었음에도 막내인 다윗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골리앗이 나와서 모욕을 하는 그 현장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흥분하여 옆에 있는 겁에 질린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26).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여러분의 아버지를 모욕한다면 참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분이냐에 상관없이 내 아버지를 욕하면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딸들도 그런 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지 내가 속한 교회라는 조직에 대한 비난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구별을 해야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 혹은 여러분이 나온 학교, 여러분이 몸 담고 계시는 회사를 비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 대한 비난은 자식들에게는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아니, 하나님께서 본문의 다윗이란 인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본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엘라 골짜기의 대결: 세상 앞에 선 하나님의 교회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군대와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는 아주 넓은 골짜기로 비가 오면 강이 되지만, 비가 오지 않는 철에는 넓은 계곡을 형성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처럼 자갈이 많은 골짜기도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두 군대가 40여일 이상 대치를 하면서도 어떤 진전이 없었던 것은 한 쪽이 밀고 올라가도 결국 후퇴하는 진영도 고지로 올라가게 되기 때문에 쉽게 끝낼 수 없는 지형적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블레셋이 했던 것이 바로 거인 골리앗을 내세워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신장이 3m에 달하는 거인 골리앗은 나와서 자기와 싸우자고 하면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기를 계속했습니다. 이 작전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A. 반응1: 두려움 그리고 남의 이야기 하듯..(11, 24~25)
먼저 11절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욕이 40여일 계속되는 동안, 그런 두려움은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24~25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점점 사기가 떨어졌고 그나마 도망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울은 왕으로서 그저 골리앗의 목에 현상금을 거는 것 밖에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떠난 왕은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저 거인 놈을 보았느냐? 저 놈을 죽이면 왕이 사위로 삼고 재물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준다더라”는 것이 그들이 하는 말의 전부였습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말하는 것 아닙니까? “너 한 번 나가봐”하면서 말이지요. 이것은 거대한 세상 앞에 서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시대가 참 많았습니다. 세상의 위세는 너무나 거대하고, 교회는 그에 비하면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어른 앞에 서 있는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또 세상은 교회를 모욕하고 비난합니다. 교회는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나 들리는 소리로 이런 저런 말들을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라는데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상황은 우리가 사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마치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처럼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B. 반응2: 분노(26)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다윗입니다. 그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는 분노감을 표출했습니다. 아니, 표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하나님, 자기의 전능자, 자기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골리앗은 하나님을 모욕하지 않고,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습니다(10).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를 모욕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창 12:3). 하나님의 백성이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런 깊은 의식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의 본능입니다. 다윗은 이런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출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3.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대박’이 아니다(34~37).
다윗은 지금 어떤 의도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 간이 부어가지고 잘난 척하려고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될 절호의 기회라는 계산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용기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와의 교통과 만남을 통한 살아있는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숨을 건 싸움에서 용기 있고 흔들림 없는 손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결과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행동을 소개할 때, 이런 경고 문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하지 마세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다윗의 행동이 아무 준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믿음인 것처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대박이 터져서 부자가 됐다는 식으로 믿음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신앙의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고 다루어가시는 과정에서 매일 매순간 주님께 대한 순종의 태도와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믿음이 자라난다는 대원칙을 넘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커져있더라 하는 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A. 매일의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윗이 보여주는 이런 신앙의 용기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사울이 너는 골리앗과 싸울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다윗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양을 칠 때, 사자와 곰으로부터 그것들을 쳐죽이고 양을 건져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37절이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셨다는 자신의 하나님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기에 다윗은 오늘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서 신앙의 용기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매일 매순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가지 않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용기를 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런 엄청난 일?골리앗과 싸우는?을 맡기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곧 순교의 제물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깊이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그 믿음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매일 매순간 일상의 삶 속에서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이야기들이 있으십니까? 모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알려주기를 기뻐하셔서 스스로를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면서(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관념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는 점점 깊어가는 것입니다.

B. 작은 일에서 큰 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런 일에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의 작은 순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자나 곰이 양 새끼를 물고 가면, 그저 있는 양들이나 데리고 도망하게 된다면 그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상황들 속에서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믿음을 사용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아니라, 계산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빨리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결단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고 그것을 깨달으면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순종이 없다면, 결단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없는 믿음은 머리 속의 믿음이고 관념적 믿음이며, 힘이 없고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믿음일 뿐입니다. 다윗이 보여주는 믿음의 용기는 매일 매순간의 삶 속에서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깨닫게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큰 일로 인도하시고 다윗이 한 고백대로,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삼하 22:35)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요행이 결코 아닙니다.

4. 다윗의 마음(45~47)
제가 여러분과 함께 주목하고 싶은 본문은 45~47절에 다윗이 골리앗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의 마음, 그의 동기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주존심(主尊心)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주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자기는 죽어도, 자기 이름은 땅바닥에 떨어져도 그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주존심이 있습니다.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말합니다(45). 네가 모욕하는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인지를 보여주리라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이름이나 가문의 이름을 모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그대신 그에게는 주존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답답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다윗이 참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B. 온 땅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두번째로 다윗은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합니다(46).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있게 될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소년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스라엘에 계신 하나님이 온 땅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될 때, 승리가 자기 이름에 가져오게 될 결과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면 엄청난 결과가 찾아오겠지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에 있는 것은 그런 종류의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의 승리로 인하여 온 땅이 이스라엘에는 그들을 지키시는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마음 중심을 차지한 생각이었습니다. 다윗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계실 뿐입니다.

C. 구원은 창과 칼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기를
세번째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다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는 병력이다. 문제는 능력이다. 문제는 크기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다윗이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물맷돌 실력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물맷돌 실력 하나를 믿고 목숨을 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의지하고 신뢰했던 대상은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 자기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던 그 하나님입니다. 그는 사울이 입혀주는 갑옷을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구원이 창과 칼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라는 것을 자기 앞에 있는 무리들이 분명히 보고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증명하고 싶으십니까? 내가 누군지를 몰라주어서 화가 날 때가 있습니까? 아직도 그런 자리, 그런 수준에 머물러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는 십자가에서 아직도 죽지 않았느냐?” “너는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서야 나를 좇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우리는 종종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라고 핑계를 대곤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모든 것은 주님께 달린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다면, 우리의 말주변이나 논리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싸움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말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말싸움에서 다윗이 이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그의 목을 벰으로써 이겼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에서 보낸 편지에서 “내가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볼텐데,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고전 4:19~20). 또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세에 타락한 양상을 설명할 때,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5). 종종 말만 잘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신학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말을 잘 합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경건은 말로 하는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능력입니다. 다윗은 오늘 말만 잘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골리앗을 대적하여 죽임으로써 경건은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었습니다. 말만 잘 하는 사람이 될까 두려워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창과 칼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나의 열심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이것이 성경이 소개하고 싶은 다윗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의 마음입니다. 자기 자존심에 죽고 사는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심을 뜨겁게 품었던 인물입니다. 자존심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 엘리압의 지나친 모욕에 대해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흥분시킨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과연 다윗이 가졌던 이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자기가 속한 지역교회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이름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가 질문을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간구가 우리의 간절하고 절박한 간구가 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서 무릎을 꿇게 되고, 그 일 때문에 가슴이 상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토로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골리앗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자존심에 죽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주님의 이름 때문에 기뻐합니까? 주님의 이름 때문에 여러분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이익 앞에서 견딜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경멸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보다 하나님을 높인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당신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존중했고, 높였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