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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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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사무엘상 16:13-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08-22

말씀내용
1. 왕의 첫번째 사역: 섬김
다윗은 왕으로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사무엘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서, 두번째는 유다의 왕으로서, 마지막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 행위는 분명히 왕으로 세운다는 상징입니다. 처음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사실 다윗은 하나님 보실 때 왕이 된 것입니다. 비록 사울이 왕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하나님 보실 때 왕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다윗이 바로 왕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름부음받은 왕으로서 제일 먼저 한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으로서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왕중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같이 계시면서 섬김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섬기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섬겼던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는 그 삶의 너무나 많은 국면에서 그리스도를 예언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마치 그리스도와 같은 자리에서 기도하였고, 그의 기도들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기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울의 악신을 만나게 되고, 또 마귀의 상징인 골리앗과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시고 성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그 삶을 통해서 주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주님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신자들은 이미 하나님이 보실 때, 왕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고통을 겪고 어려움을 감당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얼마나 알고, 믿고, 확신하고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을 기록할 때, 성경은 의도적으로 다윗과 사울의 오버랩을 보여줍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반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는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사 함께 하기 시작하셨고, 다른 한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나셨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사울의 상태를 지혜롭게 판단했습니다.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지금 왕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은 제대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처방도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수금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악신이 이를 때 수금을 타게 하면 왕이 편안함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을 추천했습니다. 다윗에 대한 그의 소개를 들어보십시오. 18절입니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수금을 연주할 줄 알고, 용감한 용사이고, 잘 생겼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아버지 이새가 왕에게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왕의 집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 사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를 자기 병기 잡은 자로 삼았습니다. 23절은 사울에게 악신이 임할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이 낫고 악신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서 사울과 함께 그의 집에서 살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정 기간 이 일을 하였고 그 후에는 이전과 같은 목자의 삶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한 일은 사울 왕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종종 이런 일은 부당해 보이고, 조급함을 자아내고, 우리를 초조하게 하곤 합니다. “내가 왕인데, 언제까지 나는 이런 물러갈 왕의 뒤치닥거리나 하고 앉아있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훈련시키시는 놀라운 시간이 됩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특징
다윗은 이미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말할만큼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처럼 복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반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처럼 저주스럽고 비참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 다윗이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데, 몇 가지 그 특징들을 가르쳐줍니다.

A.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
첫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에서 일정 기간 섬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집으로 돌아와 다시 목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궁정에서 통치하게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잡은 놀라운 기회를 이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내가 언제 다시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집에서 남아 자기가 왕이 될 기회를 엿보는 다윗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대신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노력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꾀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애를 썼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다윗이 알았던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전능한 능력을 사용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체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분의 주권적 능력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고, 지나치게 나대지 않으며, 초조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B. 신앙적 착각에 자신을 빠뜨리지 않는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신앙적 착각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신앙적 착각이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그저 자기 원하는대로 생각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부름을 받아 사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보통 사람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생각이 돌아가겠습니까? 그는 이제 막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사울이 자기를 와서 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아, 하나님께서 놀랍게 일을 하시는구나. 그 타이밍이란!”하면서 우리는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랬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나 의도가 그 마음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착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자기가 바라는 방향으로 일이 풀려나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착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궁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양치기가 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그런 착각에 몰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는 그런 착각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일이 사실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안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안과 불신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 신앙적 착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C. 하나님의 비밀 훈련 과정이 있다.
세번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비밀 훈련과정으로 훈련시키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비밀 훈련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냥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하나님의 훈련은 사람이 많은 궁중에서 보다는 은밀하게 들(광야)에서 일어납니다. 물론 궁중은 편안하고 걱정없는 삶을, 들(광야)은 외롭고 힘든 삶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혼자 있을 때 일어납니다. 다윗이 양을 치면서 홀로 밤을 지새울 때, 하나님은 다윗을 붙드시고 훈련을 시켜주었습니다. 이런 훈련이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 생활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오해 한 가지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과정이 시작됩니다. 새신자 과정에서 시작해서 수년 간은 심심할 새 없이 계속해서 과정을 밟아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혼자 조용히 시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분주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혼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습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신앙이 제대로 길러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분주한 프로그램에 의해서 이 모임, 저 모임 몰려다니느라 너무나 바쁜 것입니다. 교제가 불필요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제는 필요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훈련이 교회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일어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훈련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들을 홀로 있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훈련시키십니다. 그것은 누구와 쉽게 나눌 수 없는 깊은 고통이나 외로움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시간을 주시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뭔가를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양을 치면서 홀로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이 그것이었고,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사울에게 쫓겨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보냈던 그의 청년기가 하나님의 비밀 훈련의 시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신자의 실패 원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충분히 파고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이 시편은 다윗이 쓴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광야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 훈련 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제대로 그 훈련을 소화해내셨습니까? 내 인생은 왜 남들과 달리 이 모양일까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훈련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승리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D. 오해와 외로움은 필수다.
네번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오해와 외로움은 필수라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다윗은 먼저 큰 형인 엘리압으로부터 조롱과 무시를 당합니다. 이것은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군대에 간 세 형을 위하여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왔을 때,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참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큰 형인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하여 말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17:28).” 이것은 엘리압의 영적 무지와 어두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붓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하나님께서 세운 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라는 외모의 기준으로 다윗을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사울의 반대를 직면하게 됩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우려 한다는 말을 듣고 사울은 다윗을 만류합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17:33).” 사울도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것은 인간적 조건과 계산 뿐입니다. 영적인 차원을 그들을 보지 못합니다. 세번째로 다윗은 골리앗에게 모욕을 당합니다. 골리앗은 싸우러 나오는 다윗을 향하여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라고 하면서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17:43). 다윗은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에서 아무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그의 열심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통달한다고 해서 영적 분별까지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분별이 없는 세상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골리앗을 넘어뜨림으로써 보여주시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오해와 외로움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홀로 설 각오를 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저 길을 가도, 나는 혼자라도 이 길을 간다는 확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확신입니다.

E. 영의 세계를 직면한다.
다섯번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영의 세계를 직면합니다. 영의 세계에 대한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과 세상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자기 왕의 상태를 제대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은 하나님의 신이 사울을 떠나자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악령이 역사하는 사울을 보면서 자신이 거룩한 성령의 지배와 은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인간의 기질은 그냥 사회적, 물리적 환경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영적 요소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영향력 아니면 마귀가 주는 악한 영향력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악령에 시달리는 사울을 통해서 악령의 존재를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 민감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이런 종류의 영적 민감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사울에게 악신이 들릴 때 수금을 탐으로써 악령과 싸워야 했고, 이런 영적 싸움을 통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인생을 보다 깊게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세계를 직면하고 살아가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전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악한 영들을 만나서 대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거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이 영적 싸움을 감당할 것이고, 의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는 매일 악령에게 굴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생각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음악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여기에도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냥 수금을 탔습니다. 하지만, 악령은 사울에게서 물러갔고, 사울은 그 마음에 상쾌함을 얻었습니다. 음악에서 노랫말에만 긍정 혹은 부정의 영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곡 자체에도 영적 영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음악치료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발견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이 그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서 영적 실재를 대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F.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 무엇인지..(시 51)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사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발견했습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악신이 사울에게 와서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지옥은 영원토록 마귀에게 시달림과 괴롭힘을 받는 곳입니다. 아직은 어렸던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인간이 비록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 하나 어떻게 할 수 없이 악신에게 지배를 당하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무서울 정도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후에 자신이 밧세바를 취함으로써 범죄하였을 때, 그 유명한 참회의 기도시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그는 주 앞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실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친히 보았습니다. 다윗의 두려움은 죄에 대한 다른 결과들이 아닙니다. 그는 주 앞에서 쫓겨난다는 것, 그리고 주의 성신을 거두어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사울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두려움 중의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떠나신다는 것,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그와 함께 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서는 하나님의 신이 떠났습니다. 이 사건이 이들의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나는 그저 나야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인생은 명백한 실패입니다. 우리는 사울의 말로를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남은 삶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사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까? 성경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까? 그런게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믿는 자들, 자기의 죄인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역사가 아니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사울처럼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은혜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히 허락하여 주사, 우리로 하여금 남은 평생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을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