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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8A).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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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8A).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

시편 78:1-39, 신명기 6:6-9, 사사기 2: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4-07

말씀내용
시편 78편은 전체 150편의 시편 중에서 119편에 이어 두번째로 분량이 많은 시편입니다. 우리는 두 번에 나누어 이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시편은 역사를 회고한다는 점에서 105, 106, 136편과 함께 역사시로 분류되지만, 그 교훈적인 목적 때문에 지혜시로도 분류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주제를 만나는데 그것은 자녀양육입니다. 시편 기자가 역사를 통해 교훈하려는 대상이 바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녀들은 ‘후대’(4), ‘그들의 자손’(5), ‘후대 곧 태어날 자손’으로 표현됩니다(6). 역사적으로 주의 교회가 많은 실패를 경험해온 영역 가운데 하나가 자녀양육이었으니, 자녀양육의 문제는 비단 오늘날 우리 세대 만이 직면한 난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상고하는 가운데, 자녀양육이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


1. 역사가 중요하다. (출 10:1-2; 13:14-15; 신 6:6-9, 20-21; 수 4:20-22)
역사는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역사를 제거하면, 신앙의 내용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신념이나 윤리에 근거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건—에 근거하고 역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100년 전의 신학자 그레샴 메이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 복음은 역사 속에서 발생할 일에 대한 설명으로 성립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 발생한 일의 의미가 설명되었고, 그 발생한 일의 의미가 설명되자, 거기에 기독교 교리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이것은 역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것은 교리다. 절대적으로 나뉠 수 없도록 연합된 이 두 요소가 없다면, 기독교도 없다.”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23), 2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모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history)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출애굽기 10:1–2).”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신 일을 아들과 자손의 귀에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출애굽기 13:14–15).” 유월절 규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후일에 자녀들에게 설명해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또 볼까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6–9).” 모세는 자녀들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누구에게 주는 명령입니까? 아버지들에게 준 명령입니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아버지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어머니를 포함할 수 있지만, 그 분명한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는 좀 더 말씀합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신명기 6:20–21).”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의미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한 군데만 더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여호수아 4:20–22).” 요단강을 발로 건넌 뒤, 강 한 가운데에서 열 두 돌을 가져와 돌 무더기를 쌓은 뒤에 그것을 기념비로 삼아 후일에 자녀들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설명해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가르칠 신앙의 내용 특별히 역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강조하십니다.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통해서 신앙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신앙은 더 실제적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감정이나 경외심이 일반적인 인간의 감정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일종의 신앙적 자녀양육의 모범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일은 늘 실패를 거듭하곤 했습니다. 철학자 헤겔이 한 말로 알려진 바(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것을 확인하게 하는 역사적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를 포함하여 깨어있는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역사를 기억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역사—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며,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데렉 키드너가 시편 78편의 제목을 “Lest we forget”(우리가 잊어버리지 않도록)이라고 한 점도 핵심을 잘 짚은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후대에 전해주어야 할 역사 (1-8; 마 13:34-35)
본문 1-8절을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1-6절은 후대에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7-8절은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먼저 1-6절에서 동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서 ‘들으며, 귀를 기울일지어다,’ 2절에서 ‘말하며, 드러내려 하니,’ 3절에서, ‘들어서 아는 바, 전한 바,’ 4절에서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리로다,’ 5절에서 ‘알리라,’ 6절에서 ‘알게 하고, 일러서’입니다. 시편 저자는 말하고 전해줍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1절에서 ‘율법, 내 입의 말,’ 2절에서 ‘비유, 예로부터 감추었던 것,’ 3절에서 ‘들어서 아는 바,’ 4절에서 ‘여호와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 5절에서 ‘증거, 법도’입니다. 이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왔던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율법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2절에서 ‘비유’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잠언’과 같은 단어입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수수께끼이지만, ‘예로부터 감추었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2b). 공동번역으로 2절을 읽으면 그 의미가 잘 살아납니다. “내가 역사에서 교훈을 뽑아내어 그 숨은 뜻을 밝혀주리라.” 이것은 어렵거나 처음 들어보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들어서 아는’ 역사 이야기이며(3), 설명해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태복음 13:34–35).” 여기에서의 비유와 같은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시편 기자가 말하고 전해주려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대상은 1절에서 ‘내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후대 곧 태어날 자손들이라는 것을 4-6절에서 보게 됩니다. 자, 시편 기자가 이렇게 후대들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부모 세대들은 이 일을 부지런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7-8절입니다.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편 78:7–8).”
두 가지 이유가 발견됩니다. 첫째는, 자녀 세대가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조상 세대와 같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소망은 믿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7절의 내용을 데렉 키드너는 인격적 신뢰의 3중 코드라고 부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일을 잊지 않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잊는다’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뜻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뉘앙스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곧 불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그가 하신 일을 기억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행동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조상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은 매우 슬프게 들립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완고하고 패역했으며,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했고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스럽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속성과 그 구원 역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사람의 마음은 완고하고 패역해집니다. 그래서 더욱 시편 기자는 자녀들의 세대가 조상 세대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후대에 이것을 전해주라고 말합니다. 이제 9절 이하의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구속사적 의미를 드러내는 회고입니다.


3. 왜 실패했는가 (9-11)
첫번째 역사 회고는 9-11절인데, 에브라임 자손의 실패에 대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에브라임 지파를 가리킬 수 있지만 이 지파가 북왕국의 대표적인 지파였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 자손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는 이 실패가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이 무기와 활을 가졌지만 전쟁의 날에 물러갔다는 것이, 에브라임 지역에 있던 실로에서 블레셋에게 패하여 언약궤를 빼앗기고 실로의 성소가 무너진 사건을 가리킨다면(삿 4-6) 이는 에브라임 지파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앗수르에 의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리킨다면, 에브라임 자손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킬 것입니다. 왜 에브라임은 무기를 갖추고도 전쟁에서 패배했습니까? 그 이유가 10-11절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율법 지키기를 거절했으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기이한 일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잊었다는 말이 다시 강조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압도적인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서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잊음의 문제는 믿음의 결핍을 보여줍니다.


4.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이스라엘의 배반 (12-31; 민 11:34)
이제 12-31절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건이 어떻게 백성의 배역 행위와 대조되어 나타나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출애굽과 광야 여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구원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결정해주는 신학적 근거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구원 사건을 잊어버릴 때, 자신들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12-16절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술입니다. 12절의 ‘소안’은 애굽의 도시인데, 애굽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13절에서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신 일은 홍해 도하 사건을 가리키는 게 명백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광야 여정 내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와 인도하심을 상징하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언급합니다. 15-16절은 반석을 깨뜨려 물을 마시게 하신 일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실하게 그들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7-20절에 백성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광야 곧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습니다(17). 여기서 ‘배반하였다’는 표현은 특별히 음식과 물을 달라고 불평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18-20절이 보여줍니다. 그들의 문제는 진정한 배고픔과 목마름이었다기 보다, 마음의 탐욕이었습니다. 18절에 ‘탐욕대로’라는 말과 ‘심중에’라는 말이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또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풀 수 있으랴?”고 물음으로써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도전했습니다(19). 그들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고 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빵과 고기를 공급하시는 능력은 인정하지 못했습니다(20).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1-31절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21절은 하나님이 노하셨다는 말을 “노하셨으면…불 같이 노하셨고…진노가 불타올랐으니”라고 세 번 반복함으로써 그 진노의 크기와 정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22).” 여기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이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보고서도 그 능력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안전의 근원으로 삼을 정도로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한 백성에게 만나와(23-25)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26-29).
이 패역한 백성에게 만나를 주시되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하늘 문을 여셨다’는 표현이나(23), ‘비 같이 내려 먹이셨다’는 표현(24) 그리고 ‘충족히 주셨도다’라는 표현은(25) 모두 풍성함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초자연적인 공급이었고(23), ‘하늘 양식’이었으며(24) ‘힘센 자의 떡’이었습니다(25).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과분한 은혜였습니까? 앨런 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 인생이 하늘의 양식을 먹다니!” 25절에 ‘힘센 자의 떡’은 많은 영어와(LEB, ESV, NIV, KJV, NLT) 우리말 번역성경들이(공동번역, 우리말, 새번역) 번역한대로 천사의 떡, 즉 천사들이 먹는 떡이라는 의미입니다.
메추라기 역시 초자연적인 공급이었습니다(26-29). 하나님은 동풍과 남풍을 마음대로 주장하사(26) 엄청난 메추라기가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28). 풍성하게 주셨다는 것을 여기서도 “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 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 같이 내리셨도다”라는 말씀과(27)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라는 표현(28), 그리고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라는 말씀으로 보여줍니다(29). 그들은 먹고 심히 배불렀습니다. 원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무서운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음식과 물에 대한 그들의 불평은 반드시 부족하고 배고팠기 때문의 문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배가 심히 불렀지만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셨습니다(30-31a).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고 청년을 쳐서 엎드러뜨리셨습니다(31b). 민수기 11장 34절은 이 일로 죽은 자들의 무덤을 탐욕의 무덤(욕심 부린 자들의 무덤),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5. 거짓 회개 (32-39)
놀랍게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2절입니다.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시편 78:32).” 이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죄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가 없다는 것을 봅니다. 윈스톤 처칠의 말입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의 일을 반복하고야 만다.”는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의 말도 여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습니다(33).” ‘헛되이’라는 말은 수증기나 숨 같이 본질의 공허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반역으로 인해 그들이 치르는 고통스러운 대가였습니다. 하지만 34-35절은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주는 듯 합니다. 그들이 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편 78:34–35).”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를 의미하는 전형적 표현입니다(34). 그들은 또한 ‘기억하였습니다(35).’ 잊어버렸던 자들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회개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슬프게도 그들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36-37절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편 78:36–37).”
그들이 간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회개의 동기는 그저 심판을 피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회개를 인정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회개는 피상적인 아첨이었고 거짓이었습니다. 마음에 정함도 없었고 언약에 성실함으로써 회개의 진정성을 드러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반응은 다시 그들을 향하여 긍휼함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38-39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시편 78:38–39).”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여기서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부서지기 쉽고 도덕적으로 약한 존재인 ‘육체’이고,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아 허무한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죽을 인생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은 하나님의 긍휼,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 세대가 이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크심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고전 11:1; 삿 2:10)
말씀을 정리합시다. 여러분, 특별히 부모로서 자녀들을 길렀거나 기르고 계시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자녀들에게 들려줄 하나님의 구원 역사, 그 사건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역사와 신앙의 이야기들이 있습니까? 그 이야기들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들려주십니까? 구원 사건을 잊어버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 교육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모태에서 고등학교까지 교회에 다니며 말씀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적대감이며, 그들의 정체성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좀 서글픈 면이 있습니다. 8절은 “자녀들아, 너희는 조상들처럼 살지 말아라”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할아버지 처럼 살지 말아라.” 혹은 “너는 나 처럼 살지 말아라.” 하는 말들로 들립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11:1).”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입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참된 신앙과 참된 회개를 보여주는 부모입니까?
우리는 혹시 사사시대의 슬픈 흐름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사사기 2:10).” 저는 오늘 우리의 시대가 사사시대와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더 약한 것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역사에서 배우는 은혜가 있어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는 자녀들에게 역사에 근거한 신앙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큰 싸움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영국 사회가 불과 한 두 세대 만에 세속화가 가속화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 1-2차 대전 이후에 도시가 붕괴된 것을 다시 건설하느라 아버지들이 바쁘고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도시가 발전하고 잘살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물질주의, 풍요주의에 빠졌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들이 바쁘고 분주하면서, 자녀를 제자 삼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강성환, 길미란, 『복음에 견고한 자녀양육』세움북스).
2021년의 한국교회 그리고 부모 세대들이 많이 돌아보고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까? 그러나 소망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반석에서 물을, 하늘에서 양식을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불러 먹이신 주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결국 우리의 패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긴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확인합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그치지 않는 탐욕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