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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8).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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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8).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시편 119:57-64, 신명기 10:9, 열왕기상 19:1-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6-15

말씀내용
시편 119편의 여덟째 연, 57-64절은 각 절이 히브리 알파벳 헤트(ח)로 시작합니다. 이 본문의 중심 개념은 첫 절과 마지막 절에 있는데 57절의 ‘분깃’과 64절의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확증하는데, 이 확신을 가진 시인은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임을 알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오늘 우리가 그 뜻을 새겨야 할 내용입니다. 이 말을 조금만 비틀면 다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사람의 분깃이 되십니다.” 두 문 장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살펴볼텐데, 먼저 스펄전이 정리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고(56) 하나님께 간구하며(58) 하나님께로 돌이키고(59)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얻으며(61,62)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고(63) 하나님의 선하심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기를 갈구했다(64).”

1. 분깃 (57; 시 16:6; 신 10:9; 신 19:14; 레 25:8-55)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신선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고백이 가지는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 안에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분깃’은 우리 일상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분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기업’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의 각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할당하여 주시는 모습을 기록하는데, 그 땅을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최적의 아름다운 유산입니다(시 16:6). 그래서 기업 혹은 분깃이라고 할 때, 이것은 물리적 땅을 넘어 자신이 누리는 최고선과 행복, 인간이 품는 가장 바람직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고백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명기 10:9; 참조, 민 18:20; 신 18:2; 수 13:14).”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은 대신, 당신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는 고백은 레위 지파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편 119편이 레위 지파 사람의 기도라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의 기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주신 현실 상황이 신실한 성도의 고백으로 확장되는 것을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별도의 분깃을 주지 않으시고 당신이 그들의 분깃이 되겠다고 하신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레위 지파가 제사와 성막(성전) 일에 전념해야 해서 다른 지파 사람들처럼 농사를 짓고 기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현실적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더 깊은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허락 받은 약속의 땅이 하나님이 주시려는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증명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들의 영원한 목적지였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그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분투해야 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그들의 삶의 불균형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땅이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분배하여 주신 기업의 경계표(지계석)를 옮기지 말라고 하셨고(신 19:14; 27:17; 잠 22:28; 23:10) 희년 제도를 통해(레 25:8-55) 형제-동포들 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영구화될 가능성을 차단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율법 제도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레위 지파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땅과 소유, 물질을 통해서 그것이 너희의 최고선이며 행복이라고 여기지 말아라.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영구적인 게 아니다. 오직 나 여호와를 너의 분깃, 최고선과 행복으로 여겨야 한다”는 교훈을 레위 지파의 삶을 통해 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 지파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그들의 기업, 분깃이 되신다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입니다. 레위 지파를 보면서,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이렇다할 분깃을 갖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분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고백이 내세에서만 유효한 고백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생과 내세에서 나와 나의 가족을 돌보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 나의 최고선이고 행복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이 저의 전부입니다’라는 뜻이며, 레위 지파와 같이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실한 성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지금 시인이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2. 순종 (57b,59,60; 호 6:4; 히 4:7)
우리는 이 여덟 절의 본문에서 시인이 가진 순종의 의지를 여러 곳에서 발견합니다. 57절 하반절에서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고 했고, 60절에서는 신속하게 지체하지 않고 순종했다고 하였으며, 63절에서는 주의 법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순종에 대한 시인의 열망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는 고백에 이어 나오는 당연한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최고선이며 자신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시고 금생과 내생에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 순종은 억지 순종이 아닌,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는 순종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57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종이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온전한 순종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게 드리사,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의를 얻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누구든지 그리고 반드시 넘어집니다. 우리의 순종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59절에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 행위를 생각하는 것은 자기 의를 강화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의 회개는 언제나 자기 행위를 생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기 행위를 생각한 시인은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다’고 말합니다. 이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신자의 삶에서 날마다 회개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거의 눈치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행위를 생각하고 돌아보고 매일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회개는 참된 신자의 삶의 특성일 뿐 아니라, 순종하는 삶의 기초입니다.
날마다 회개함이 시인이 말하는 순종의 첫 단계라면, 두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않는 순종입니다. 60절입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요소가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리까지는 가지만, 순종을 행하는 일에서는 서두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결심이 아무리 진지하고 죄의 깨달음이 아무리 깊어 보여도 순종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대로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호 6:4; 13:3).
칼빈은 우리가 순종을 지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사탄의 역사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의 탐심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로부터 나는 안전하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그럴 만큼 강한 자는 없습니다. 칼빈을 인용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도 마치 절뚝거리듯이 하나님께 나아오며 한쪽 날개나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낳은 부패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그 무게로 인해 우리는 느려지고 걷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선에 전념하고자 할 때 우리는 연약한 본성이 어떠한지를 너무도 잘 보고 체험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데 느리다 해서 결코 놀라지 맙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원래 본성은 그런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악과 맞서 싸웁시다.”
신자의 성숙함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신속하게 지체 없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둘려줍니다: 사탄의 전략 회의가 열렸답니다. 원수들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할 방법을 논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 귀신이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 주겠다”고 말하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너무 많아서 그건 쉽지 않다는 핀잔을 듣습니다. 둘째 귀신이 “심판 따위는 없다고 말해 주겠다”고 발언하자, 이것도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진 것이기에 없애기는 어렵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자 셋째 귀신이 말합니다. “저는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겠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거야!”라고 말하고 그것이 전략으로 채택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순종을 미룸으로써 영적 손해와 화를 당합니다.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말한 히브리서 기자의 촉구는 이점에서 우리 영혼을 깨우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득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성도들은 ‘오늘’이라는 이 강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순종하는 것은 영적 생명의 원리입니다.

3. 악인들의 줄 (61-62; 롬 12:17,21; 롬 8:32)
만일 우리가 신속하게 순종하지 않고 순간 방심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인들의 줄에 얽매이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윌리엄 벤게메런은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다’는 표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인이 사용하는 이미지는 원수들에 의해 꼼짝 못하도록 온갖 밧줄로 묶인 사람의 모습이다. 악인들이 악한 말과 음모와 억압으로 지배하는 상황을 묘사학고 있다.” 악인의 줄에 매이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성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시인은 보여줍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신 분들은 모르도르로 향하던 프로도가 징그러운 여왕 거미 쉴롭(Shelob)을 만나 죽을 뻔한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쉴롭이 프로도를 거미줄로 칭칭 감아버린 모습처럼, 시인은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악인들의 줄에 두루 얽혔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도들을 공격할지라도, 성도들은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대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라는 말에서 그렇게 하려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12:17,21). 악인들의 줄에 얽혀 있는 상황에서 성도가 주의 말씀을 기억한다고 할 때, 이것은 또한 이 상황 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임을 인정하겠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거두셨거나 감하셨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주의 법, 복음을 기억함으로써 설령 한 밤 중에 깨어 일어날지라도 주께 감사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왜 시인이 한 밤중에 일어나겠습니까? 악인들의 줄에 얽혀서 괴로움이 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괴로움이 깊을 때 한 밤중에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시인은 주께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그럴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고 또 잊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 모두의 삶에서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인의 고백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이 아닙니까? 한 밤중에 일어나면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히는 대신 주께 감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4. 성도의 교제 (63; 왕상 19:10,14,18; 딤후 4:10-11)
시인은 좀 더 나아갑니다. 시인은 자기를 얽어 맨 악인들의 줄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을 주목합니다. 자기 옆에는 악인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성도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남을 만큼 강한 존재로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 믿음은 그것을 하게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악인들의 줄에 얽혔을 때, 믿음으로 혼자 이겨내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혼자 조용히 이겨낸 다음에 성도의 교제로 돌아와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있는 적대적 환경 만이 아니라,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이 자기 옆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주를 경외하고 주의 법도를 지키는 모든 형제들과의 즐거운 교제와 공동체적 삶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점에서 보면, 왜 사탄이 성도를 공격하는 포인트가 성도를 홀로 있게 하고, 성도의 사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 조차, “오직 나만 남았거늘(왕상 19:10,14)”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탄에게 넘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엘리야만 남았다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18).”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도 그를 떠난 동료들로 인해 외로움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을 디모데후서에서 고백하지 않았습니까(딤후 4:10-11)? 홀로 남겨지는 상황은 실로 성도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형제들과의 결속-연결로부터 자유로운 신자는 없습니다. 시인은 신실한 성도들 및 거룩하고 온전한 삶의 모범을 갖춘 사람들과 연결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자는 혼자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소명을 이루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붙들어줄 수 있는 경건한 어른과 친구들을 찾으십시오. 자신의 믿음을 흔들고 시험에 들게 할 친구가 아니라. 경건한 친구를 분별하고 찾으십시오.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프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진실히 대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그 여정에서 만나서 동행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허영의 시장에서 순교한 믿음, 그리고 천성문에 이르도록 끝까지 동행했던 소망의 존재는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런 친구를 사귀십시오.
이 시편의 내용은 시인이 혼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적대적 세상을 감당하고 사는 다른 신자들과 언약적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시인이 그들과 함께 부르는 합창입니다.

5. 주의 인자하심 (64; 사 6:3)
끝으로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함을 봅니다. 사실 이 표현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던 때 하나님을 모시던 스랍들이 선포하던 내용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이사야 6:3).” 말 그대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언약적 사랑과 돌봄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습니다. 창조 세계의 단 한 뼘도 사탄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육안으로는 사탄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실종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시인은 믿음의 눈을 열어 보며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가득하고 자기 인생에서 넘쳐 흐르며, 여호와께서 자기 분깃이 되심을 더욱 힘있게 고백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에서 던졌던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임을 알고 고백한다.” 그리고 조금 비튼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사람의 분깃이 되신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를 믿는 신자는 그가 주의 인자하심을 얼마나 확신하는지에 관계 없이, 하나님이 그의 분깃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진정성 있게 하려면, 주의 인자하심을 깊이 확신해야 합니다. 그 확신이 깊을수록 그 고백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구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고 더 힘있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지요.

6. 교훈과 적용 (창 13:9, 14-17; 눅 16:25; 6:24-25; 시 17:14-15)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은 분명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당신은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 질문은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고 그 언약적 신실하심과 돌보심과 사랑이 자기 인생에 넘치는지를 보고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며 돌보실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입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저의 분깃이시니 저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분쟁이 생겼을 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롯이 떠난 뒤에 동서남북 보이는 모든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당신의 언약적 인자하심을 보여주십니다(창 13:14-17).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땅과 하나님 사이에서, 혹은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곤 합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서 누릴 걸 다 누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주의 법을 잊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4–25).”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누릴 것을 생각하면, 세상 정신에 사로잡힌 자들의 분깃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지 알 것입니다. 시편 17편은 세상 재물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연약한 성도들에게 그들이 장차 누릴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명확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게 당신 자신을 주옵소서!” 시편에 기록된 아삽의 기도도 그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편 73:25–26).”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