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내가 사모하는 말씀 - (03). 고난의 자리에서 즐거움이 된 말씀

내가 사모하는 말씀 - (03). 고난의 자리에서 즐거움이 된 말씀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내가 사모하는 말씀 - (03). 고난의 자리에서 즐거움이 된 말씀

시편 119:17-24, 신명기 8:3, 시편 119:10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4-06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119편의 세번째 연(17-24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 김멜(ג)로 시작하는 8개의 절입니다. 첫째 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행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1-8), 그리고 둘째 연에서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둠으로써 범죄치 않으려는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9-16). 시인의 마음 혹은 그의 기도의 골방에 초점이 맞추었던 카메라 렌즈가 이제 세번째, 네번째 연에서는 시인이 처해있는 전경을 넓게 잡아줍니다. 그 환경은 시인에게는 꽤나 적대적인 환경입니다. 그래서 3,4연은 적대적 세상 한 가운데서 부르는 시인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표현되는 노래-기도는 좋은 환경에서만 부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1. 적대적 환경 (19,21,22,23)
먼저 시인이 처해있는 상황을 암시하거나 보여주는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9절에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라는 표현은 시인이 ‘을’의 입장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습니다(21).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경건한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22절에서 그들은 시인이 주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보고는 근거 없는 ‘비방과 멸시’를 해댑니다. 시인은 나그네된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의 비방과 멸시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앉아서 시인을 비방하는 고관들도 있습니다(23). ‘고관’은 권력자, 어떤 의미에서든지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시쳇말로 ‘거물’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시인이 처해있는 상황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실 시인 자신의 상황을 넘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겪으실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이점에서 시인은 그리스도의 예표인 셈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의 길을 따라가는 모든 길따름이들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성도는 이런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시편은,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상황들을 묘사하고 그런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다채로운 기도의 모음집이자, 모든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능한 위로이기도 합니다. 칼빈은 3연을 설교하면서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두고 양육하시는지를 안다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지만 그 점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토록 집착해 있는 것을 보시면서 왜 여기서 살아야 하는지를 상기시키십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기 전에 깊이 생각할 것들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3연은 네 절씩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7-20절은 눈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는 간구이고, 21-24절은 이 간구가 절실한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적대적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조언은 하나님 말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첫째 부분부터 살펴보지요.


2. 눈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17-20)
A. 주님의 말씀이 생존을 좌우한다(17; 신 8:3; 마 4:4; 6:11)
시인이 3연을 시작하는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17).” 얼핏 들으면, 시인은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후대하여’라는 말은 분명히 풍성함, 풍요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시인의 기도를 다 읽어보면, 그가 구하는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영적 풍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잘 살게 해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시인은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 가운데 절박함을 가지고 살려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이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고 시인은 생각합니다.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삶의 실존적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길로 행함으로써 삶 전체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길로 행하는 삶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그런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그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육적 허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 허기를 채우는 문제가 인간의 실존과 생존의 중요한 문제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3을 인용하여 대답하신 것이 그것입니다(마 4:4).
성경은 우리가 육적 필요를 가진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11). 하지만 인간은 또한 영적 필요를 채워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인정하고 그 영적 풍요를 간구합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영적 풍요를 절박하게 원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그것을 간구합니까? 배고픔과 은행 잔고의 바닥남을 느끼듯이, 우리는 얼마나 우리 영혼의 굶주림과 바닥남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기 또 하나 주목할 말이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17절과 23절에서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3연을 감싸고 있습니다. 주의 종은 신뢰와 존엄으로 맺어진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언약에 신실한 방식으로 안전하게 보호하고 돌보실 것입니다. 시인은 비록 자신에게 일어나는 상황과 주변 환경이 자신을 초라하고 보잘것 없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지만, 자신이 주님의 언약 아래 깊이 연결되어 있는 주의 종임을 인식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인식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시인이 처한 것과 같은 적대적 환경 속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119편에는 ‘주의 종’이라는 표현이 13번이나 나오는데(17,23,38,49,65,76,84,122,124,125,135,140,176), 이중 9번이 적들에게 핍박과 압제를 받는 적대적 상황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시인이 바라는 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후대하여 살게 하는 방식을 어떻게 기대하고 있는지를 다음의 기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B. 저는 영적 맹인입니다(18; 시 78:32-33; 엡 1:17)
18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후대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놀라운 것’은 일차적으로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여정에서 나타난 언약적 구원과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과거의 그 하나님, 변함이 없으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눈을 열어 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눈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사실 생사를 가늠하는 절박한 일이라고 시인은 느낍니다. 시편 78:32-33입니다.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목전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기에 그들의 인생이 두려움에 가득찬 무의미한 나날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일들을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는 인생의 생사를 가늠하는 문제입니다. 시인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구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시인이(그는 다윗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한 사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을 열어 주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치 맹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나아가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이것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능력으로 온전하게 파악되거나 이해되거나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나눌 때, 바로 이런 마음, 이런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저 성경 읽기 전에 형식적으로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시인이 가진 마음처럼, 하나님이 내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이 성경에서 나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놀라운 것들을 보도록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라고 기도했습니다. 찰스 브리지스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비밀의 기이함을 아는 더 분명한 통찰력을 갖고 싶으면, 또한 우리 임마누엘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우심을 보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범주를 더 알기 원한다면, 아들 그리스도를 움직여 우리의 문제를 기꺼이 담당하시게 한 그 피할 수 없는 사랑의 기이함을 더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매일 매시간 이 중요한 간구를 우리 것으로 삼아 활용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C. 나그네의 동반자, 주의 말씀(19-20; 히 11:10,13-16; 벧전 2:11; 대상 29:15; 시 119:105; 잠 6:22)
19절에서 시인은 처음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시인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더 나은 본향을 구하면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히 11:10,13-16). 그는 사도 베드로가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불렀던 바로 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벧전 2:11).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믿음으로 고백한 말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역대상 29:15).” 많은 전쟁을 통해 광대한 제국을 이룬 왕의 고백이라고 믿어지십니까? 이 말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고백인 것입니다.
자, 이제 정확하게 하나님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한 시인의 이유를 조금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도성은 화려하고 생생한 것들로 시인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영안이 열려 보이지 않는 세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나라(히 12:28)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나그네 여정을 무사히 마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고백 대로 말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잠언 6:22).”
여러분은 얼마나 공감하십니까? 세상의 화려함이 주는 유혹을 이길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그 말씀에서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볼 수 있어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눈을 열어주실 뿐 아니라, 말씀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20절이 보여줍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20).” 시인은 마음이 지치고 쇠잔해질 정도로 영적 허기와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내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정도로 시인은 자기 영안을 열어달라고 절박하게 자신의 영적 풍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3. 적대적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주의 말씀 뿐이다(21-24)
이제 21-24절은 시인이 이토록 절박하게 자기 눈을 열어 하나님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달라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적대적 세상에서 성도가 의지할 조언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나그네’라고 표현했던 시인의 삶은 더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먼저 그것은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교만한 자는 뻔뻔하고 자기 의가 강하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므로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버리고 자기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22절입니다.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22).” 시인이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라고 할 때, 그는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이와 유사한 표현들을 시편에서 보게 되는데 이런 표현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한 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17절에서 ‘주의 종’이라고 한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 시인은 부당하게 사람들로부터 받게 된 비방과 멸시를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길따름이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부당한 비방과 멸시를 당합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을 향해 자기를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그 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비방과 멸시 앞에서 취한 첫번째 조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자신을 입증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살아 생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입증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를 신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인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부당하게 자기를 비방하고 멸시하는 이들 중에는 고관들, 유력한 자들, 영향력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23).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들의 비방과 멸시에 참여합니다. 이 비방과 멸시 앞에서 시인이 취하는 두번째 조치는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었습니다. 근거 없는 비방과 멸시가 주어질 때 우리는 그들의 비방과 멸시를 곱씹어보고 묵상하기 쉽습니다. 스펄전은 “거룩한 묵상을 방해하는 고관들은 단 5분 간이라도 생각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그들의 비방과 멸시를 곱씹는 대신 ‘주의 율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로 선택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이 여러분을 망가지지 않고 그 상하는 마음으로부터 보호하고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서 숱하게 경험한 바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24).” 그는 자기를 비방하고 멸시하는 자들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 말씀에서 지혜를 구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영원하고 진정 두려워할 가치가 있는 대상인지를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헛됨의 실상을 꿰뚫어보게 하는 눈을 열어줍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고관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이 두려워할 유일하신 하나님을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이런 묵상은 시인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시인의 눈을 열어 주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달라는 절박한 간구를 드린 이유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신 8:3; 요 8:29)
자기 눈을 열어 주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달라는 시인의 간구는 그의 영적 생존이 달린 간구였습니다. 시인은 나그네 된 땅에서 근거 없는 비방과 멸시에 둘러 쌓여 죽을 것만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지 않으시면 자기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존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저 자신과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존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절박하게 눈을 열어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청합니까?
광야 40년의 막바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압 광야에 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말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필요만 채우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 필요를 가진 존재이며 이 필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채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 40년 동안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도 그것을 가르치시려 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광야에서 여러분은 그것을 배우셨습니까?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17–18).”라는 기도는 바로 이것을 배운 사람의 기도입니다. 저는 오늘 저녁 우리 모두가 이 기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이 나그네 여정을 지날 때 고통을 경험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여정 내내 성도의 신실한 안내자요, 충고자 그리고 생명줄이 되어줄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간절하게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눈을 열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생각해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난 자들, 그리고 고관들로부터 부당한 비난과 멸시를 한 몸에 다 받으신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이 확신이 있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주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도 그 말씀 안에서 이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자리에서 주의 말씀이 내 즐거움이 되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