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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6). 두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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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6). 두 증인

요한계시록 11:3-13, 스가랴 4:2-3,6, 다니엘 7: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8-23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 11:1-2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되, 특별히 당신의 참된 백성을 영적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환난이 와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 목적은 교회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11:1-13에서 두 개의 중요한 개념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교회가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환난이고 하나는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증인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기간이 마흔 두 달이고(2), 증거의 기간은 1260일입니다(3). 이 두 기간은 월과 일로 표현되었을 뿐 동일한 기간이며, 주님의 승천부터 재림까지의 교회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교회의 증인의 사명을 상고할 것입니다.


1. 두 증인 (3-6)
본문에 두 증인이 나옵니다. 이 두 증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요한계시록 해석의 난제입니다. 이 답을 얻기 전에, 먼저 본문이 두 증인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A. ‘나의 두 증인’ (3; 욘 3:6; 렘 4:8; 마 11:21)
3절은 ‘나의 두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임명하고 부르신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또 이들에게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리니’는 미래시제인데, 나중에 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권세가 어떤 권세인지 5-6절에서 볼 것입니다. 또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깊은 슬픔과, 이들이 증거할 회개의 메시지를 암시합니다. 요나의 증거를 듣고 회개하는 니느웨 왕이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 회개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욘 3:6). 이외에도 성경에서 베옷은 슬픔과 참회의 옷입니다(렘 4:8; 마 11:21). 3절에서 보는 마지막 묘사는 이들이 1260일 동안 예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은 2절에서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도록 허용 받은 마흔 두 달과 동일한 기간입니다. 두 증인의 증거 사역은 항상 이런 적대적 존재들에 의한 환난을 당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4; 슥 4:2-3,6,14; 계 1:12-13,20; 마 5:14; 요 8:12; 5:35; 롬 8:39)
4절은 두 증인의 정체를 좀 더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입니다. 여기서 구약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을 떠올릴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고국에 돌아온 유다 백성을 독려하여 제2성전을 짓게 한 선지자입니다. 당시 두 사람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어느 날 하나의 순금 등잔대가 일곱 등을 가진 그릇을 받치고 있고, 그 양 옆에 두 감람나무가 등잔대에 불을 밝히도록 금기름을 공급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슥 4:2-3). 여기서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이지만, 등잔대의 불을 밝히도록 감람나무가 공급하는 금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성령님을 의존하고 붙듦으로써 성전 재건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b).” 두 인간 지도자가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두 감람나무 사이에 있는 등잔대는 무엇입니까? 등잔대의 불빛은 성소 안에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입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 이 등잔대는 하나였지만, 오늘 본문에서 요한에게 주어진 설명은 두 촛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등잔대와 촛불이 엄밀하게 같은 것인가는 논의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많은 말씀과 표상들을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변형하여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1장에서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뵐 때, 일곱 금촛대를 보았고 거기를 거니시는 주님을 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계 1:12-13). 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밝혔습니다(계 1:20).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서(마 5:14) 주님 자신이 세상의 빛이신 것을(요 8:12)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심지어 주님은 세례 요한을 “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35). 이런 표현들은, 교회가 가진 복음 증거의 사명을 보여줍니다. 주전 6세기 스가랴 선지자의 시대나 주후 1세기 요한의 시대나 성도들은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등잔대와 촛대로서 빛을 발해야 했던 것입니다.
효과적인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효과적인 증거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께 달려 있습니다. 두 증인의 사명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설명한다면, 두 증인이 교회를 가리키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이른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가 ‘이 땅의 주 앞에서 서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스가랴에도 나옵니다.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슥 4:14).”
비록 두 증인은 땅에 있지만, 그리고 박해와 환난도 겪어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의 천상의 궁정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물리적으로는 위험한 세상에 있지만, 언제나 변함없는 주님의 주권적인 임재 안에 안전히 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롬 8:39).
C. 두 증인에게 주신 권세(5-6; 왕하 1:10,12; 왕상 17; 눅 4:25; 약 5:17; 출 7:20; 막 9:4; 말 4:5; 막 9:11; 마 11:14; 요 6:14; 7:40)
이어지는 5-6절은 하나님께서 두 증인에게 주신 권세와, 1-2절에서 측량을 통해 보호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줍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 11:5-6).”
여기서는 구약의 두 인물의 향기가 납니다. 엘리야와 모세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해하려는 원수를 삼킨다는 말씀은 직접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소환하기 위해서 보낸 오십부장과 군인들을 보냈을 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운 사건을 생각하게 합니다(왕하 1:10,12). 6절에서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라는 표현도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3년 반 동안 기근을 주신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왕상 17; 눅 4:25; 약 5:17). 그리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라는 말씀은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했고(출 7:20)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리게 했던 모세를 보여줍니다.
5-6절은 분명히 모세와 엘리야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며, 변화산상에 등장했던 구약의 두 인물이기도 합니다(막 9:4). 4절에서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5-6절에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묘사하는 것을 보면, 두 증인은 특정한 두 인물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두 증인을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고, 또는 주님 재림 직전에 나타날 두 인물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엘리야(말 4:5; 막 9:11; 마 11:14)와 모세(요 6:14; 7:40)가 세상 종말 전에 돌아오리라는 보편적 기대와 관련된 말씀들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 교주들은 종종 자신들을 여기에 대입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두 증인이 증거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권세를 주셨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누구입니까?
D. 두 증인은 교회다(민 35:30; 신 17:6; 19:15; 요 8:17; 창 19:1; 눅 24:3-9; 행 1:10-11; 눅 10:1-24; 행 1:8; 마 28:18-20; 계 2:10,13; 6:9)
죠지 래드(George Eldon Ladd)는 “상징적이고 문자적인 요소의 혼합이 요구된다. 두 증인은 교회의 증언을 대표할 것이다. 교회의 증언은 세상 끝 날에 두 선지자의 등장으로 완성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키지만 언젠가 등장할 두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다른 요한계시록의 본문들에서와 같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근거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합당해 보이는 해석은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두 증인’이라고 표현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구약 율법이 중요한 판결을 위해서는 복수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신명기 17:6; 참조, 민 35:30; 신 19:15).” 이 율법의 원리는 예수님도 언급하신 바 있고(요 8:17), 복수의 천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창 19:1; 눅 24:3-9; 행 1:10-11).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송하신 것도 이 원리를 보여줍니다(눅 10:1-24). 결국 본문은 두 증인이라는 복수의 증인으로써 그 증언의 참됨을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이 두 증인을 교회로 해석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증거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고(행 1:8),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명을(마 28:18-20)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머나 교회에게도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순교를 칭찬하시면서 증거의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계 2:10,13).
교회는 죽음을 불사한 충성된 증인 안디바처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 다섯째 인을 뗄 때 하늘 제단 아래서 신원의 날을 구한 순교자들도 교회의 증인된 사명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입니다(계 6:9).
그래서 윌리엄 헨드릭슨은 “두 증인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통해 증거하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강단에서는 복음이 끊임없이 선포되어야 하고, 밖으로도 선교적 사명을 쉼 없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짐승의 이김과 두 증인의 죽음 (7-10)

A.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7; 단 7:21)
우리가 두 증인에 이어 확인해야하는 두번째 존재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입니다. 이로 인해, 두 증인에게 큰 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계 11:7).”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것은 짐승의 악마적 기원과 특성을 암시합니다. 이 짐승은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 이기고 그들을 죽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시점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입니다. 물론 교회는 모든 시대에 항상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세상의 배척과 거부와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증거의 사명을 마치자, 두 증인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더 이상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은 다니엘 7:21에서 예언한 무서운 형상을 가진 네번째 짐승에게서 나온 작은 뿔에 상응합니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단 7:21).”
본문의 짐승 앞에는 정관사가 있는데 이는 그 짐승이 잘 알려진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이는 그 짐승이 다니엘의 예언과 관계가 있고, 적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박해하는 제국의 통치자를 가리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온다고 할 때, 현재시제를 사용하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을 쓰고있는 1세기 말에 이미 그 짐승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 직전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지만, 모든 교회 시대에 이런 반대와 저항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일입니다.

B. 두 증인의 죽음과 큰 성 (8-9; 계 16:19; 17:18; 18:10,16,18,19,21; 시 79: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의 손에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7:21에서 작은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라고 한 점을 보면, 두 증인이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이 더욱 명백해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두 증인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잔인한 마귀적 세력이 진리와 정의를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는 죽은 것처럼 무력해집니다.
8-9절은 두 증인의 시체가 묻히지도 못하고 사흘 반이나 길에 방치됨으로써, 그들의 패배와 죽음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비참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여기 ‘큰 성’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소돔 또는 애굽이라 불리는 ‘큰 성’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그렇다면 ‘큰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킬까요? 8절의 ‘큰 성’은 2절에서 이방인에게 42개월 동안 짓밟히는 ‘거룩한 성’과 대조됩니다. 2절의 ‘거룩한 성’은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언제나 교회는 거룩한 성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큰 성’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외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 곧 바벨론을 가리킵니다(16:19; 17:18; 18:10,16,18,19,21).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1세기 말의 로마 제국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소돔이라 함은 그들의 성적 가증함과 우상숭배를, 애굽이라 함은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로 삼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곳임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는 것도,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지명이 아니라 주님을 거부하고 죽인 세상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큰 성’은 9절에서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로 표현되는 바,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엘 비키는 ‘큰 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곳의 상징이다. 그 도시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시 출현한다. 소돔, 이집트, 바벨론, 로마, 뉴욕, 빠리, 런던(그리고 서울이나 광주)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순교한 두 증인—교회—의 시체가 죽은 채로 방치되어 있는 큰 성은 적그리스도의 악하고 압제적인 폭정 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시편 79편에 예언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시편 79:1–4).”

C. 큰 성의 축제 (10)
10절은 큰 성 사람들의 즐거움을 묘사합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1:10).”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했다고요? 여기서도 ‘땅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두 선지자의 증언은 그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 죽자 그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심지어 서로 예물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땅에 거하는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미워합니다. 그 죽음을 기념하며 경축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3. 두 증인의 부활과 승리 (11-13; 겔 37:10)
9절에서 ‘사흘 반’ 동안을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했다는 말은, 주님이 무덤에 머무셨던 사흘을 생각하게 하지만, 한정된 짧은 기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사흘 반 뒤,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11절입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11).”
사흘 반 동안 큰 성의 길에 방치되어 있던 두 증인의 시신이 갑자기 살아나서 두 발로 일어나 선 것입니다! 방치된 시신을 구경하면서 좋아하던 자들이 얼마나 놀랐고 무서웠겠습니까? 두 증인의 시신이 살아나는 것은 에스겔 골짜기의 환상을 연상하게 합니다. 골짜기에 즐비한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그 뼈들이 극히 큰 군대를 이룬 환상 말입니다(겔 37:10). 두 증인의 시신과 ‘극히 큰 군대’를 이룬 뼈들은 동일한 것을 가르킵니다. 교회가 이렇게 죽은 듯이 버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말입니다.
짐승이 두 증인을 죽였을 때 세상이 승리를 경축하던 즐거움과 기쁨은 일시적이고 헛된 것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두 증인을 향해 들려오는 “이리로 올라오라.”는 큰 음성을 따라 두 증인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원수들은 바라봅니다.
이것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교회의 비밀 휴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올라가는 것인데, 이것은 유대의 고대 문헌들에서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가리키는 전형적 표현 방식입니다. 두 증인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증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바로 그 때, 큰 지진이 나고 ‘큰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7000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지진은 최후 심판의 싸인입니다. 이제 드디어 최후 심판이 시작됨을 암시합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반응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 11:13b).”
이 말은 대규모의 회개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언제나 참된 경배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ἔμφοβος)와 9절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φόβος)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두렵고 무서운 감정에만 쓰이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에서 공포나 혐오를 의미하는 영어 phobia 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13절은 대규모 회개라기 보다 그들이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과 위엄을 인정하고 두려움에 휩싸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와 위엄을 인정받으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경고 나팔 소리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결국 두 증인—교회—을 죽였고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최후의 결산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증언과 고난 속에서 성령님을 붙드는 교회(마 16:18; 요 15:18-19; 약 4:4)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본문은 어두운 세상을 비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교회의 본분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두 증인’ 즉 복수의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언하는 1260일은 이방인에게 교회가 짓밟힘을 당하는 마흔 두 달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는 기간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기간입니다.
교회는 증거를 하는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교회에게 권세도 주십니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마 16:18). 복음의 증거를 확증하는 싸인들도 주십니다. 그러나 짐승과 짐승에게 이끌리는 세상은 교회를 대적하고 죽이려 들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속성은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미워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요 15:18-19). 세상과 벗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약 4:4).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의 성도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요일 2:15-17).
오늘 본문은 어느 특정한 미래에 어느 한 도시에서 일어날 일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오늘 본문에서 본 것과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를 증명합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1685년에 개신교에 자유를 주었던 낭트 칙령(1598)을 폐지하고 카톨릭 절대왕정을 수립했습니다. 이로 인해 해외로 망명한 프랑스 개신교 휴그노들은 있는 곳에서 그들의 영적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루이의 왕통은 1세기 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1789)으로 그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의 모택동이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은 온갖 방법으로 모질게 기독교를 핍박하여 그 숨통을 끊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경축하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들의 승리는 일시적이고 헛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부활했습니다. 북한이 개방될 때에도 우리는 부활한 기독교회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죽은 듯이 그 능력을 상실한 시대가 있었습니까? 제게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큰 성의 길에 내던져진 두 증인의 시신처럼 보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희희낙낙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주의 말씀에 쓰여진 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비키의 말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판을 뒤집어 놓으실 것입니다.(The world may write off the church, but God is constantly turning the tables upon this world.)”
역사에서 교회는 이런 일을 수없이 많이 겪어왔습니다. 그때 그 죽은 것 같은 교회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 이 세사의 판을 뒤집어 놓으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부흥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교회에 찾아오셔서 교회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급격히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입니다. 이것은 우리 벧샬롬교회가 넓은 예배 처소를 얻는 것 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벧샬롬교회가 어떻게 관계중심적 공동체로 회복할 수 있는가 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흥을 구하는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배부릅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증인이 됨으로써 빛을 밝히는 일에 너무나 게으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더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증인의 사명을 두려움 없이, 어떤 불이익과 손해를 보더라도 감당하게 해달라고 엎드린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에게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습니까? 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를, 이 땅의 거리 거리에 시체로 누워있는 한국교회가 살아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윌리엄 스프레이그(William Sprague) 목사님의 글을 읽어드리면서 이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해지며 자신의 무능함을 깊이 느끼는 곳마다, 또한 단순한 도구들로 사용될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고 부요한 복락이 부어졌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신적 감화의 필요성을 조금 밖에는 느끼지 못하고 자신감을 갖고 일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부지런히 수고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노력한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그들이 수고한 자취에 아무 것도 없는 비참함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가장 연약하다고 느끼는 순간과 여러분의 하는 일이 너무 큰 것 같아 보일때, 여러분의 가는 곳에 가장 무서운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소망의 다른 모든 원천에게서 떨어져나간 것 같을 때,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수고하는 수고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기뻐하십시오.” (『참된 영적부흥』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