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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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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12-20, 스가랴 4:1-6, 다니엘 10:5-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9-15

말씀내용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시려고 사람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지금과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된 뒤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 보다, 그 일을 성경 안에 제한하시지만,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살았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쓰기 위해서도 그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고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 영광의 주님을 뵈옵는다는 것(사 6:5; 단 10:8-9; 마 17:6; 출 33:19, 22-23)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 중에는 이사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 또는 다니엘 선지자와 같이,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그 영광을 환상 중에 목도한 사람들이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뵙기도 하였습니다(마 17:1-8; 막 9:2-8; 눅 9:28-36).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과거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방식으로, 사도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뵙는 환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입으신 당신의 모습을 요한에게 보이신 것은, 요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1절에서 보았듯이, 이 모든 계시는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즉 모든 성도에게 보이시려고 먼저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입니다(1:1). 그래서 주께서는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고(1:11) 19절에서도 ‘네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1:19).
구약의 선지자들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환상 중에 뵈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거의 죽음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뵈었을 때, 엎드렸다고 했습니다(겔 1:28). 엎드렸다는 말은 죽었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때로는 깊은 잠이 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8-9).”
이런 것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선지자들이 보였던 일반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세 제자도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마 17:6).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놀라운 환상을 보았던 요한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17절 상반절입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요한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계실 때, 주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그가 사랑하시는 자’ 또는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썼던 사람입니다(요 13:23; 19:26; 20:2; 21:7,20). 그러던 그가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승천하신지 거의 60여년 만에 만나 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영광의 주님을 뵙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을 때,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3:19). 이 말씀을 비추어보면, 육신의 상태로, 현재 우리가 가진 몸을 가지고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거룩한 기쁨 보다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는 지극히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기절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스스로 사형판결을 느끼고 죽은 자처럼 엎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죄악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십니다. 요한에게 보이신 것을, 기록된 형태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하셨고, 모든 성도는 그 기록된 모든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령 안에서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숨기시는 것은, 우리가 누릴 은혜와 복락을 거절하여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시려 하심이 아니고, 지금은 감당할 수 없기에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기쁨을 유보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요한계시록의 1차 수신자인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날마다 직면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숨기신다고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거절하심이거나 그들을 상하게 하심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감당할 수 없는 장래의 기쁨을 감당할 수 있을 때에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보호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하는 모세에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2-23).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행하심으로써 모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차매, 요한에게는 주께서 당신의 영광의 모습을 필요한 만큼 나타내 보게 하셨습니다. 고난 당하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이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성도에게 당신의 영광을 다 나타내 보이신 것은 아닙니다. 이제 모든 성도는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성령 안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위로가 충만해질 것이고,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이 못났고 실패한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열쇠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입니다.


2.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모습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요한이 보았고 기록한 바,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의 특징들을 일일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구약 선지서나 유대 묵시문학에서 가지는 전형적인 환상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들은 구약의 개념들과 깊이 연결됩니다. 특별히 다니엘 7장과 10장 그리고 스가랴 4장의 본문들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런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요한이 본 계시-환상이 요한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과거 선지자들이 보았던 환상들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관된 구약의 말씀들을 참고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주님을 알아가는데 크게 유익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길을 갈 수 없을 만큼 상세한 묘사는 되도록 피하면서, 꼭 필요하다 싶은 것들만을 언급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본 그리스도의 모습을 개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개별적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이 자료를 가지고 영광 중의 그리스도의 온전한 초상화를 그려보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상 공장인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도로 요한에게 이 환상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형상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 묘사들은 은유적인 표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특징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 하나 강조하고 나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묘사들 각각은, 2장과 3장에 걸쳐 기록된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보내진 메시지들 속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그 교회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주님은 이 여러 특징적 묘사들 가운데 하나의 특징으로 묘사되고 있고, 그에 따라 그들을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을 우리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각각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이제 한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요한이 보았던 그 영광의 주님을 우리도 영안을 열어 보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심정으로,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A.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1:12-13,20; 2:1,5; 슥 4:6; 마 5:14; 단 7:13-14)
요한이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고는(1:10), “몸을 돌이켜 자기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일곱 금 촛대였습니다(1:12). 주님은 일곱 개의 촛대 사이에 계셨습니다(1:13). 그러나 주님은 가만히 서 게신 것이 아니라, 2:1에서 쓰고 있듯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습니다(2:1).
1:20을 보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본래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게 있었는데, 성소 안에서 성소를 비추는 일곱 등불을 가진 순금 등대, 히브리말로는 ‘메노라’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5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만들라고 명하시는데, 살구나무 형상을 본 떠서, 하나의 등대에서 양 옆으로 뼏어나간 일곱 개의 가지 끝에 일곱 등잔이 있는 형태였습니다.
스가랴 4장으로 와서 보면, 한 천사가 스가랴 선지자에게 이 금 등대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도록 격려하라는 사명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성전 재건은 안팎의 도전들로 말미암아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주는 순금 등대의 환상은, 안팎의 반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성전 재건을 마치도록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금 촛대는 교회라고 한 말씀과 같이, 스가랴서에서도 금 등대는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고, 그들이 빛을 밝힐 수 있도록 공급되는 관유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으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4:6에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을 때,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환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 온 세상의 어둠을 향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만일,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존재의 이유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 되고, 주님은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것입니다(2:5). 촛대를 옮기다는 말은, 결국 그 교회를 무너지게 하시고 사라지게 하시겠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스가랴서에서 성전의 완성은 결국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소망을 보게되는데, 그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소망입니다.
성취와 관련하여 우리가 하나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구약 성막에는 일곱 개의 등잔을 가진 하나의 순금 등대가 있었다면, 요한의 환상에서는 일곱 개의 금 촛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한 국가와 민족에 머물렀던 은혜가 마지막 때에 모든 민족에게 미치게 되고 보편적 우주적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환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금 촛대 자체가 아닙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계셨다 또는 거니셨다는 사실입니다. ‘인자 같은 이’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논의가 있지만, 이는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표현도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다니엘 7:13-14에서 빌려온 표현입니다. 주님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을 보고 요한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일곱 금 촛대가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일곱 교회라고 할 때, 요한은 비록 교회가 고난 가운데 있지만, 주님께서 교회들 곁에서 교회와 함께 계시며 교회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평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을 요한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주님께서는 당신이 여전히 교회와 함께 계시고 교회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주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주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B. 발에 끌리는 옷과 금띠(1:13b; 단 10:5; 겔 9:2)
이어지는 묘사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입니다(13b). 먼저 우리는 이와 비슷한 묘사를 다니엘서에서 발견합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단 10:5).”
이것은 대제사장의 옷을 연상하게 합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에만 한 번 나오고,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인 70인경에서는 7번 사용되었는데,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장의 옷을 가리키는데 쓰였습니다. 이런 근거에서 이것을 대제사장의 의복을 연상하게 되지만, 고대의 고관이나 통치자들 또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용례 만으로 이것을 대제사장에 대한 묘사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옷차림으로 묘사되는 구약성경의 예는, 에스겔 9장에서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 모인 천사들에게서 보게 됩니다(겔 9:2). 그러므로 여기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주님을 대제사장과 왕으로서 묘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묘사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무와 관련된 묘사라고 단정하면서 본문 1장 안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모두 찾아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묘사는 ‘계시의 수신자’로 묘사되었고(1:2), 그리스도의 왕적 묘사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는 말에서 묘사되었으며(1:5), 마지막으로 13절에서 예수님의 의복 묘사로서 대제사장직이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묘사가 대제사장에 대한 묘사였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모든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여 주시는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1세기 말 신앙의 박해를 마주했던 성도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영원하고 완전하신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들을 중보하시는 주님을 보고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C. 흰 머리털과 불꽃 같은 눈 (1:14; 단 7:9; 10:6)
그 다음에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14a). 이 묘사는 다시 다니엘 7:9과 연결됩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단 7:9).” 여러 묘사들이 유사한 가운데,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라는 묘사가 지금 13절 상반절과 유사합니다.
이 표현은 고대 근동의 노인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노인에게 주어지는 존경받을만 함, 영예, 지혜와 위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다니엘 7:9의 묘사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라면, 요한이 환상 중에 뵈온 분은 그리스도이신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다니엘 7:9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께 붙여진 묘사들을 예수님에게 돌리고 있다면, 이는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묘사는,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다니엘 10: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 10:6).” 여기서는 ‘그의 눈은 횃불 같고’라고 한 것이, 요한의 환상과 유사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역사의 전체 과정을 통치하시는 주님이 가지고 계신 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통찰력, 인간 상황의 정곡을 꿰뚫는 신적 통찰력, 예지,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 묘사가 왜 중요합니까? 1세기 말의 성도들이 날마다 당하고 있는 고난을 주님께서 모르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의 고난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도 보고 계십니다. 친히 그들을 심판하시고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요한이 본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시간상 오늘은 여기까지만 상고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뵈옵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셨습니까?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온전하게 뵈올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언제나 선지자들과 요한이 보았던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리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들이 기록한 말씀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주님을 뵈옵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크나 큰 유익을 줍니다. 그 주님을 뵈올 때,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 은혜는 참된 은혜여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영광을 뵙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A. 위로와 경고
주님에 대한 묘사들은 대개 한편으로는 위로요, 다른 한편으로는 경고입니다. 양날 선 검입니다.
주님께서 촛대 사이를 거니십니다. 주님께서 교회와 교회들 사이를 거니십니다. 교회들을 돌보실 뿐 아니라 교회들을 순찰하십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성도는 힘을 얻습니다. 교회는 자신이 가진 힘, 재력, 부동산, 인적 자원 등 그런 것들로 힘을 얻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오직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어진 직분을 남용하고 오용하여 주님을 뜻을 거스르고 자기 뜻대로 자기 왕국을 세워가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인 것입니다.
불꽃 같은 주님의 눈은 역사의 전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시며 그 속에서 성도가 겪는 모든 신앙의 환난과 참음도 아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눈으로 당신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지 않고 경박하게 자기 자신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예조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꽃 같은 주님의 눈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우리가 힘쓸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입니다. 어떻게 뵐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공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뵈옵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간절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십시오. 그리스도를 뵙는 일이 없는 예배, 성경읽기와 묵상, 기도, 교제는 모두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보이신,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뵙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런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늘 있기를 구하십시오. 예배 중에,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던 중에, 한낮에 기도하다가 영광의 주님을 뵈옵고 감격하고 자비하신 주님의 발 앞에서 사도가 했던 것처럼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지는 은혜로운 역사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풍성히 주어지기를 구합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고, 우리로 겸손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런 복된 은혜가 충만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