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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 신앙의 두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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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 신앙의 두 관점

요한계시록 1:7-8, 다니엘 7:13, 스가랴 12: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9-01

말씀내용
요한계시록을 하나의 편지로 볼 때, 1장 1-8절은 인사 부분에 해당합니다. 전체 문서의 프롤로그인 셈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프롤로그에서 그가 이제 쓰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요한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면서 암시하고 있기에 이 앞 부분의 내용을 잘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1세기 말 고난 가운데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하면서, 그 은혜와 평강은 오직 성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언급하였습니다(4-5a). 성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희를 얼마나 얼마나 위로할 수 있는지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사도 요한이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요, 그를 아는 지식을 주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송축하였습니다(5b-6). 우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7-8절에서 사도 요한의 인사말의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사도는 신앙의 두 가지 핵심 관점을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 중 하나를 언급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도록 성도들의 주목을 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21세기 한국 기독교회의 강단에서는 사라진 주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중학교 시절 쯤에는 재림에 대한 설교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재림에 대한 찬송도 적지않게 불렀던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조금씩 잘 살게 되고 살만해 지면서, 재림이라는 주제는 강단과 회중석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 재림 신앙은 이단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주께서 오신다!”
6절에서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의 찬송을 돌린 사도 요한은, 이제 독자들의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볼지어다’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26회 사용되는 말인데, 주로 중요한 예언적 선포를 하기 전이나 예언의 절박함을 표시하기 위해 사도가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6절에서 그리스도께 찬송을 돌리고 7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함으로써,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완벽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써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만왕의 왕, 심판의 주로 재림하심으로써 십자가의 승리를 온 세상과 우주에 입증하실 것입니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라는 말씀에서 ‘오시리라’는 우리 개역개정역 성경에서는 미래시제처럼 번역되었지만, 본래 사도 요한이 쓴 헬라어 성경에서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사건이 너무나 확실할 때, 그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현재 시제로 표현하는 문학적 방식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주님의 재림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당장에라도 일어날 사실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와 같은 확실한 현실이 될 때, 신자들의 삶은 더욱 온전하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A.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오신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성도들에게 제시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것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구름과 통곡하는 백성이라는 이 두 가지 예언적 묘사를 재림과 연결시켜서 말씀하신 것은 사실, 요한 이전에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4:30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사도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B. 구름과 함께 오신다(단 7:13).
먼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다니엘 7:13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다니엘 7:13을 보지요.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인자 같은 이’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다니엘은 예언했습니다. 사실 다니엘의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한 제국들을 심판하시고 나서(단 7:9-12)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인자께서 왕으로 등극하는 내용(단 7:14)을 언급하는 맥락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왕권과 다스리심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지금 현상적으로 성도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로마의 황제가 철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정확하게는,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말인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구름을 운송수단처럼 타고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구름이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를 상징했듯이(출 13:21; 16:10; 40:34-35), 여기서도 신적 임재를 수식하는 역할로서 구름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C. 그날에 모든 사람이 애곡할 것이다(슥 12:10)
재림과 관련하여 두번째로 주목할 것은 애곡한다는 주제입니다. 이것은 스가랴 12:10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각 사람의 눈’과 ‘땅에 있는’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 보입니다. 그리고 스가랴 본문의 정황에서 애통하고 통곡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님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7절에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하리니”라는 말씀에서 이 애곡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스가랴서의 본문과 연결해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회개의 눈물이고 애곡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을 맞게 될 믿는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애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본문에서 ‘각 사람’, ‘그를 찌른 자들’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라고 묘사됩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재림은 어떤 형태로 임하겠습니까?
주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보는 형태로 임할 것입니다. 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주님의 재림을 볼 것입니다. ‘각 사람의 눈’이라는 말은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이 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으로 볼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i. 회개의 눈물과 애곡
애통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애통함은 전세계적, 보편적 현상이 될 것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애곡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 중에 재림하시는 주로 말미암아 애곡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광의 주님을 ‘찌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찔렀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처형했던 로마 군인들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무관심했고 예수님을 무시했으며 또는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모든 태도와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나 그 은혜를 가벼이 여기고 살아가는 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주님 재림의 날에, 그들은 깊은 회개의 눈물로 애곡할 것입니다. 본래 스가랴서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애곡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한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기에, 이들이 영광의 주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못하고 가벼이 여겼던 모든 태도와 행위를 기억하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21:24-27을 보지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4-27).” ‘만국’은 참 이스라엘로서 구속받은 백성,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상기시켜 줍니다(창 12:1-3).
주의 백성들이 주님의 재림을 보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며 회개할 것입니다. 이렇게 스가랴서의 예언이 성취될 것입니다.

ii. 심판 앞에서 후회와 고통의 눈물
하지만, 이 눈물과 애곡의 의미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자들이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인유하는 스가랴서의 본문의 원 의도를 넘어,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고 애곡하는 자들은 주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그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될 불신자들과 그들이 흘리는 고통스럽고 비통한 눈물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요한계시록의 큰 주제 중 하나입니다. 가령 18장에서 세상을 가리키는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임할 때, 왕들이 “울고 가슴을 친다’고 말씀하는데(계 18:9), 바로 이것이 본문 7절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 두 견해 사이에 양분되어 있음이 보여주듯이, 이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단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사도 요한이 의도한 것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랜트 오즈번은 그의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독자는 스가랴서의 평행 본문에 비추어 볼 때 회개 주제를 보게 되지만 스가랴서 본문의 이스라엘이 ‘땅에 있는 모든 족속’으로 바뀐 것에 비추어 보면 심판 주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함은 만국의 회심과 만국의 심판이 병행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계속된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고, 반응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보는 자들은 주님을 찌른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든지 아니면, 주님을 찌르고 멸시했던 것에 대한 심판에 직면한 후회의 눈물이든지 눈물을 흘리고 애곡을 할 것입니다. 하나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감격의 눈물이라면, 하나는 두려움과 비통함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요한은 ‘아멘’이라는 말로써, 도장 찍듯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신뢰성과 확실성을 선포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지금까지 모든 말씀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말하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장면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21:5-8외에는 이 구절 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요한계시록에서만 등장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묘사 중 하나로,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자와 끝 글자를 말함으로써 모든 것을 포함시키는 상극법이라는 표현 방식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처음과 마지막’(계 1:17; 21:6), ‘시작과 마침’(계 22:6,13) 등의 표현도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일까요? 사도 요한에게 영감을 주어 이 책을 쓰게 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이런 방식으로 하신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어떤 알파벳도 빠질 수 없듯이, 역사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그 다스리심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돕지 않으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시는가? 1세기 말의 성도들이 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한가하거나 사변적인 질문들이 아닌, 그들의 생과 사가 걸려 있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선언함으로써, 아니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친히 선언하심으로써 고난 당하는 성도들,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십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스릴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의 서문인 1-8절 중에서도 4-8절을 또 하나의 작은 문단으로 볼 때, 이 부분의 처음과 끝을 맞추어 표현한 수미상관의 표현방식입니다. 4절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했는데, 이제 8절에서도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라는 말로 마치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실 뿐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언은 더 나아가 ‘전능한 자라”로 당신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전능한 자’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 9번 등장하는데, 구약 성경의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70인역이 헬라어로 번역할 때, 주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만군의 여호와’라고 할 때는 언제나 땅의 모든 세력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권세를 강조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권능, 통치권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능한 자라’고 스스로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시고, 그 시대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장 눈 앞의 고난을 직면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것보다 더 필요한 관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성도들은 주눅들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프롤로그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언으로 마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3. 신자가 가져야 하는 신앙의 두 핵심 관점
이 말씀은 오늘 21세기 복잡한 정세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도전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세상의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야할 신자들이 견지할 신앙의 두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에 대한 관점이고, 또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어느 시대에나,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견지했던 관점들이었습니다.

A.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한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참된 신자들의 심령에 평안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앞서 4-5절에서 보았듯이, 은혜와 평강의 궁극적 원천은 성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8절에서 말씀하시는 성부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이시며, ‘전능한 통치자’이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원수를 갚으실 것이며, 심판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그 가진 증거를 인하여 고난을 받은 주의 자녀들을 당신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순간도 보지 못하고 놓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부족하여 개입하지 않으심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시고, 시간 안에서만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큰 박해를 당해야 했던 1세기 말에서 3세기까지 로마제국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며, 신앙의 박해를 받아야 했던 16세기 유럽의 신자들과도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도 수많은 질문을 야기할 만큼 다양하고 많은 고난들이 존재합니다. 병약함으로, 경제적 곤핍으로, 관계의 상실로, 또는 극복할 수 없는 육체적, 정신심리적 장애로, 다양하게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무엇을 다르게 합니까? 다양한 고난 가운데서 우리가 이런 신앙적 관점을 견지할 때, 우리는 고난의 현실이 주는 무게에 압도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일임을 확신한다면, 성도는 믿음으로 인내로 견디며, 순종할 힘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내 인생에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그의 주권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고, 기적 밖에는 바랄 것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 조차도, 아니 시작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그런 순간들입니다. 언제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죽음의 문을 지나 영원으로 들어갈 때,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을 그렇게도 괴롭혔고 그것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수도 없이 느꼈던 그 모든 순간들의 고통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우리의 가슴은 벅찬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온전하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주여, 주는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우리 앞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B.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인이 견지할 두번째 관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점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한 관점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점을 함께 견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약속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으며 소망 가운데 인내하게 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관점을 상실하게 된다면, 신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신앙의 관점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재림 신앙을 놓치면, 하나님의 주권 신앙도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주권 신앙이 해이해지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를 포함한 21세기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재림 신앙이 무너진 것입니다. 재림 신앙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해도 살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보통의 신자들에게서 주님 재림에 대한 절박함, 간절함, 긴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영적, 도덕적 해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두려움 대신, 사랑하는 구주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기쁨으로 맞으려는 설레임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타락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오실 때, 저와 여러분은 눈으로 그리스도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로 통곡할 것입니다. 그때,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사랑하신 구주를 친히 뵈올 때, 내가 그분을 홀대했던 일, 내가 세상을 더 사랑하여 그분을 사랑하지 못했던 일, 내가 범죄함으로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일 등 모든 일들이 생각나서 회개의 눈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그날에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면(마 25:23), 우리 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와 형벌 때문에 두려움과 비통함의 눈물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일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시펀 기자가 말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망하리니”(시 2:12).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구름과 함께 오십니다. 우리 모두가 보게 될 것입니다. 도적 같이 오신다고 하였으니, 우리가 기대치 않았던 순간에 오실 것입니다. 주의 재림은 우리를 옥죄는 협박이라기 보다, 우리를 모든 더러움과 죄악에서 지켜주는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온 세상,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자녀들, 우리 배우자, 우리 부모.. 모두를 주권 가운데 다스리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고 믿음으로 견디십시오. 주님께서 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