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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7).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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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7).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라

시편 77:1-20, 고린도전서 10:11, 하박국 3:17-1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3-24

말씀내용
1.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느낄 때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게 아닌가 생각하는 영적 위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이 오랠 때 우리 영혼은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이때 성도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시편 77편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한 번 7-9절을 읽어볼까요?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시편 77:7–9).”
이것이 이 시편을 쓴 아삽이 속으로 던졌던 질문들인데, 크리스토퍼 애쉬는 “영혼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두려운 불안을 표현한 질문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고 그 약속이 되살아날 수 있는 징후는 없다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개의 질문들에는 ‘영원히, 다시는, 영원히, 영구히’라는 말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공감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데렉 키드너는 이 시편을 통해 “암울한 분위기에 짓눌림의 압박을 경험해본 모든 사람들은 이 고난 받는 동료-시인-의 솔직함과 그 용기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 이 시편은 시인이 개인적으로 당한 고난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슬픔을 1인칭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적 슬픔이건 공동체적 고난이건간에,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도가 타락한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슬픔과 고난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될 때 영적 침체가 따라오기 쉽습니다. 이때 이런 영적 침체를 단순히 죄라고 여기거나 우리 자신의 영적 실패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도 시편 77편을 설교하면서 통풍이나 편두통 등 육체적 질병으로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고 거기서 겪었던 자신의 영적 침체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밤에는 무엇을 하십니까? 그저 주저앉아서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순간들이 우리 인생에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애쉬가 말처럼, “이 시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더 애통하고 더 슬피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주권적 은혜의 위로를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이 시편을 살펴봅시다.


2. 시편 77편의 구조
77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9절과 10-20절입니다. 앞 부분인 1-9절에는 시인의 영적 고뇌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회상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감정을 여과없이 표현합니다. 그러나 10-20절은 시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내적 감정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회상하는 것, 즉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그 열쇠입니다. 시인이 기억하려고 하는 과거의 은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역사, 즉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인정하면서 영적 침체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3.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을 구하라 (1-6; 창 37:35)
먼저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고통과 슬픔 가운데 버려 두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 시인이 한 일은 위로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기는 하지만, 적어도 1-3절을 기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그는 1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이라고 말합니다. 또 2절에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라고 말하고 3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아직 기도는 아닙니다. 그는 다만 기도하겠노라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미 74편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도 주지 않으시는 상황에서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기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J.J.스튜어트 페로운의 말처럼, 이 결심들은 “시인이 가진 기도의 실재와 간절함 그리고 강력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점에서 성도가 겪는 시련은 믿음을 테스트하는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난의 날에 무엇을 하는가는 그 사람의 신앙을 잘 보여주는 지표가 됩니다. 시인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I)’와 ‘내게(me)’라는 말이 거의 20회 사용됩니다. 반면 ‘하나님’은 6번 밖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기도하기를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연민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시사합니다. 이것이 영적 침체의 상황에서 사람이 빠져들기 쉬운 위험입니다.
2절에서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라는 말은 기도하는 시인의 심정과 태도의 치열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야곱이 아들 요셉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보였던 반응처럼 절망적인 모습을 표현합니다(창 37:35).
지금 시인의 마음이 계속 혼란스럽다는 것은, 3절의 ‘불안하여’라는 말이 잘 보여줍니다. 이 단어는 본래 끊임 없이 몰아치는 파도 소리를 의미하는 말로 ‘뛰놀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런 불안함이 떠나지를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결심합니다. 기억한다는 말은 묵상하고 생각한다는 의미인데, 시인은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도리어 시인을 더 괴롭힙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은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있고 그 하나님이 지금은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현재의 딜레마 때문입니다.
이것은 4-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라는 말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잠들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 괴로움이 감하여 지지 않았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정말 훌륭한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볼 수 없고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성도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인은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시편 77:6).” 이 구절을 풀어 보면 “내가 말하기를, 내가 밤에 내 노래를 기억하고 내 마음에 묵상하겠나이다. 그리고 내 영혼이 부지런히 찾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ESV는 뒷 부분에서 ‘diligent search’라는 말을 썼습니다. 부지런히 찾는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에서 3절에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라는 말과 6절에서 ‘부지런히 찾는다’는 말은 시편 77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입니다. 비록 그 결과가 한 순간 비참함을 가져올지라도, 그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포기하고 중단해 버린 일이 많은지요? 아삽이 이런 하나님의 부재 의식과 영적 침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나아가기를 결심하고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은 시편 77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4. 괴로워도 멈추지 마라 (7-9)
시인이 과거의 은혜를 기억한 것이 가져온 괴로움은 7-9절에 나오는 여섯 개의 질문이 잘 보여줍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은 순간 시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부재 의식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는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이 질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전히 시인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뿐,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월터 브루거만은 “아삽은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아삽이 절망의 깊이로부터 회복을 경험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질문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이제 아삽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릴 것입니다. 부지런히 찾을 것입니다. 아삽은 과거의 은혜를 묵상하는 일이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더 큰 고통을 안겨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과거의 은혜가 장래의 은혜로 자신을 인도할 때까지 말입니다. ‘내가’ 그리고 ‘내게’라는 말이 가득한 1-6절을 지나면서 7-9절은 불신앙의 질문들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 시인의 내면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5. Back to the Bible (10-11; 고전 10:11)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아삽은 7-9절의 질문들을 통해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는 전환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삽은 자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나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7-9절의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시선을 주목하게 됩니다. 둘째 부분이 시작되는 10-11절은 이 시편의 전환점이고 결정적 열쇠의 역할을 합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편 77:10–11).”
10절의 해석은 어렵습니다. 여기서 ‘잘못’이라는 단어는 고통, 슬픔, 병듦, 상처(찔림)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과거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10절의 의미는, 옛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일하셨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도리어 고통스럽고 슬프기만 하다는 고백입니다.
11절입니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편 77: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아삽은 ‘기억하겠다’고 거듭 말합니다. 이것은 피상적으로 성경을 들추어 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성경을 펼친다는 말은 6절에서 아삽이 말한대로 ‘부지런히 (성경을) 살피는’ 일입니다. 지금 아삽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린도전서 10:11).” 이런 깨달음은 피상적 성경읽기가 아니라, 부지런한 찾음(연구)에서 옵니다. 성경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이 성경의 유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 의식에 사로잡힐 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시편을 읽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줍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에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6. 초점은 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12-15)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속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12절입니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편 77:12).” 아삽은 결심한대로, 성경에서 ‘주의 모든 일’과 ‘주의 행사’를 묵상하고 되뇌입니다. 그러자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게 됩니다. 13-15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시편 77:13–15).”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비할 수 없는 위대하심을 봅니다. 그리고 기이한 일로써 모든 민족들 앞에서 그 능력을 알리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여기서 ‘기이한 일’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분명해지듯이, 출애굽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하는 사건들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속성을 따라 행하심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펼치실 때, 여전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상황에 더 몰입하게 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속성을 거기서 발견하고 위로를 얻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의 시작입니다.


7. 하나님의 부재 의식에서 찬송으로 (16-20)
마지막 연인 16-20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삽이 하나님의 부재 의식에서 찬송으로 나아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여전히 아삽은 출애굽 사건을 생각합니다. 16절에서 ‘물들이..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라는 말은 엄청난 두려움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두려워하며’라는 말은 산모가 진통을 크게 느껴 몸을 비틀며 두려워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깊음’은 바닷물의 근원이 되는 태고의 물을 가리키는데, 가나안 신화에서 이것은 신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 깊음이 진동한다는 것은 ‘바르르르 떠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17-18절에 나오는 구름이 쏟는 물이나 우렛소리와 번개는 모두 온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19절입니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편 77:19).”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백성이 홍해를 걸어서 건넌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동행하시고 그들에게 임재하시는 방식은 신비라고 말합니다. 이 신비는 이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아삽이 이성적으로 자신의 상황과 하나님의 역사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앞이 깜깜해 보이고 모든 가능성이 다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고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려 두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신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위하여 성경을 열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주의 발자취는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환난과 고난이 달갑지 않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환난과 고난 속에서 자기 백성을 영원한 삶을 위해 창조된 존재 답게 연단하시고 길러 가시며 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편 77:20).”라는 말씀으로 마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부분(16-20절)에서 구체적인 찬송의 문구들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것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는 가운데, 아삽은 하나님의 부재 의식으로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하나님의 구원과 그 은혜를 인정하고 찬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8. 교훈과 적용(합 3:17-19)
오늘 시편 77편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교훈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신자들은 낙담에 낙담을 더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신자가 그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며 특별히 일시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때 우리는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초점을 옮기게 되고,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구원의 역사를 주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단순히 피상적 읽기가 아니라, 깊이 그리고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는 우리의 수고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이 답답한 현실을 살아갈 때,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시되 특별히 시편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왜냐하면 시편의 기도들은 바로 그런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고 견고한 확신 위에 다시 서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시편 기자인 아삽과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주어진 더 위대한 구원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삽이 기억했던 출애굽이라는 과거의 은혜를 넘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과거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거의 은혜를 묵상할 때 우리는 답답한 현실을 넘어 장래의 은혜를 소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깊은 고뇌 속에서 고백했던 이 찬송을 우리 자신의 찬송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하박국 3:17–19).”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삽이 “주의 발자취는 알 수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19) 우리는 이해를 넘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