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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8) - 천로역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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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8) - 천로역정1

민수기 10:11-3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3-30

말씀내용
민수기는 10장 11절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약간은 지루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출발 전의 준비 과정을 지금까지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민수기는 처음부터 인구 조사의 명령으로 시작해서 곧 출발할 것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영의 배치와 행군 순서를 말씀하셨고(2장), 레위 지파의 인구조사와 함께 그들의 임무를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3~4장). 또 이스라엘 진영을 언제나 거룩하게 유지해야 할 것과 관련해서 율법의 말씀을 주셨고(5~6장)?여기서 우리는 나실인의 서원에 대한 것을 배웠습니다?이어서 성막 봉헌식과 함께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예물을 드린 장면도 기록했습니다(7장). 그리고 또 다시 레위인의 성별과 함께 두 번째 유월절을 지낸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8장에서 9:14까지).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의 행군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름을 따라 인도받게 되는지 알려주셨고 끝으로 은 나팔 둘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9:15~10:10).
1. 새로운 국면
드디어 출발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1년이 좀 더 지났고 시내산에 머무른 것만도 1년이 거의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자 제사장들은 은 나팔 둘을 크게 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정도 흥분했을 것이고 오래도록 쳐놓았던 텐트를 거두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진영의 깃발을 올리고 군대를 형성하여 행군을 시작할 채비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이 맡고 있는 성막을 거두기 시작했고 거두어진 성막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레위 지파의 각 자손 별로 맡겨져서 옮겨질 채비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앞서 본대로 하나님께서는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원칙을 가지고 행군해야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그들이 시내산에서 보낸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 반복적으로 그 말씀을 배웠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복선 같은 것입니다. 앞으로 이들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지 않아서 이거나 그들이 배우지 못하고 몰랐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은 이날 어느 정도의 흥분한 상태를 가지고 대장정을 출발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행군이 39년을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앞으로 우리가 민수기에서 보게 되는 이야기는 반복되는 출애굽 1세대의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반역은 결국 그들의 행군을 39년으로 연장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주되심과 인도하심을 거절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거절했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도 거절했습니다. 이들 1세대의 슬픈 반역의 이야기는 민수기의 대부분인 11장부터 25장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큰 그림 안에서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본문에는 3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행군 순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11~28절), 둘째는 호밥의 도움을 구하는 모세(29~32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행군을 인도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33~36절).
2. 천로역정의 특징
이들의 행군은 천로역정?하늘 가는 순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 번연이 쓴 불후의 명저 천로역정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기가 막히게 그린 작품이라면, 민수기가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이야말로 실로 그 천로역정의 오리지널 트루 스토리(Original true story)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천로역정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A.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여정
이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여정입니다.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0:29). 그들이 행진하도록 구름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10:11). 그들이 낮에 행군할 때에 구름으로 그들을 덮어 뜨거운 중동지역의 태양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10:34). 그들의 행군을 지연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범죄한 미리암을 나병으로 징계하신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회복될 때까지 진 밖에 두고 그 7일 동안 행군을 막으셨습니다(12:14~15).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반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40년 간 광야에서 그들이 방황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14:33~3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우회하여 가게도 하십니다(14:25; 출 13:17~18). 또 구체적으로 그들이 행할 바를 친히 가르쳐주십니다. 가령, 가나안 땅에 사람들을 보내어 정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3:1~2). 행군 중의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에는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1:31~34). 그리고 그들이 싸워야 하는 많은 싸움 중에 승리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10:35~36; 21:1~3). 본문 33절에서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들의 행군을 인도하여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는 말씀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의 천로역정을 시작하고 이끄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한 가지, 그것은 순종이었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입니다. 이 순종의 길이 즐거움이 되는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따라 가는 것은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사랑과 순종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순종은 가능해지고 그 길은 즐겁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일어나는 반역을 보아야 하고 우리 자신을 또한 비추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B. 전쟁의 여정: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의 연속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천로역정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여정이었습니다. 본문 28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할 때에 이와 같이 그들의 군대를 따라 나아갔더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처럼 그들의 진영을 배치하셨고 군대처럼 나팔로 그들 군대를 이끌어가십니다. 그들의 행진은 행군이었습니다. 그 행군은 언제나 전쟁을 전제로 했습니다. 그래서 34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떠날 때에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옵소서.” “일어나소서”라고 하는 것은 전쟁을 전제로 한 간청입니다. 전쟁의 위급한 상황에서 은 나팔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기억하고 이 전쟁에 개입하여 도와주시기를 구한 것뿐 아니라(9) 모세는 모든 행군에서 언약궤가 고핫 자손에 의해서 들려질 때마다 그렇게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행군하는 모든 날마다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그 백성은 전쟁이 그들의 삶의 여정에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기자도 바로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던 것을 우리는 시편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시 68:1).”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신자들에게 권면하는 말씀들을 정직하게 읽어본다면 우리는 바로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루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은 어느 것 하나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부를 때에 그들은 이 사실을 상기하고 배워야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를 에워싸고 두렵게 하는 대적의 존재와 그 힘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1~3).” 사도 바울도 이렇게 믿음으로 선언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고 하는 조건을 얼마나 많이 놓치고 사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잘 되고, 승승장구하고 뭔가 원하는대로 풀린다 하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자기 힘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아셨기에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우리 인생에 우리 힘으로 이기는 전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 없이, 하나님을 의존함이 없이 이기는 것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두 번째 이야기, 즉 모세가 자기의 처남인 호밥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기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여기 호밥이라는 인물이 누구냐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출애굽기 2장(21절)에서 처음으로 르우엘이라고 소개되었고 18장(1절)에서는 이드로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9절에는 르우엘의 아들 호밥이이 등장합니다. 여러 설명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드로와 르우엘은 모세의 장인의 두 다른 이름이고 호밥은 모세의 처남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습니다. 모세는 호밥이 광야에 익숙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함께 가면서 광야에서 어떻게 진칠 것인지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이 제안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한 불신앙적 요청이라고 보지만, 본문은 그런 부정적인 뉘앙스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제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충분히 활용해야 하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모세의 말도 그것을 지지합니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32).” 사실상 모세의 요청은 도움을 청함과 동시에 그를 하나님의 축복의 반열에 들어오라고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채, 모세는 호밥에게 이 언약의 축복 안에 들어오라고 권한 것입니다. 호밥은 당장은 제안을 거절하지만(30), 아마도 나중에 합류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호밥이 속한 겐 족속(29절에 ‘미디안 사람’이라고 한 것은 미디안이 많은 부족들의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말이고 호밥이 속한 겐 족속은 여기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이 후일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 거하게 되었음을 사사기 1장 16절과 4장 11절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모든 전쟁에 승리를 주실 것을 믿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 해이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C. 목적이 있는 여정: 목적은 안식(쉴 곳, 33)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천로역정은 목적이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천로역정이라는 말은 하늘로 가는 여정, 하늘을 목적지로 삼은 여정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이 있었습니다. 이 목적지를 그들의 생각의 시야에서 놓치게 되면 그때부터 그들이 경험할 고통의 강도는 더 심해질 것이 당연합니다. 도착할 곳이 없는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편해도 평생 여행만 하고 살라고 하면 그것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누우면서 말합니다. “역시 집이 최고야!” 그런데 단순히 집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비하신 처소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지금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본향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누리도록 예비해주신 모든 것을 지금 다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그것들은 멀리서 보고 맛을 볼 뿐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여정에 무엇을 말씀해주십니까? 먼저, 우리 인생 여정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발을 정하시고, 지연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직행하고 싶은데 돌아가게도 하십니다. 인도하실 뿐 아니라 보호하시기도 하십니다. 범죄하면 징계하심으로 우리를 교정시켜주십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봅니까?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계시기에 안심하십니까? 두 번째로 우리 인생 여정은 영적 전투의 연속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돈이나 사업, 직장, 학업, 자녀들 문제나 관계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영적 싸움에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마귀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댑니다. 우리는 혼자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루도 싸움 없이 살아가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영적 싸움을 시작하고 밤에 누울 때까지 이 싸움을 계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우리에게 맡겨주신 돈을 어떻게 쓸지,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능력을 누구를 섬기면서 사용할지를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를 위한 삶인지, 주님을 위한 삶인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지 우리는 매 순간 결정을 해야 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싸움을 싸움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 인생 여정에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고단하고 버거운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니, 우리 인생 여정의 거의 많은 순간들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여정은 곧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쉴 곳’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33).” ‘쉴 곳’이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도 하나님은 종종 ‘쉴 곳’을 주십니다. 그러나 아직 영원한 안식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비록 이 땅에서도 우리는 ‘쉴 곳’을 경험하며 기뻐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누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래서 중국 개척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그의 고단한 선교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시를 지어 고백했습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나에게 / 땅 위에 그 무슨 안식 있으리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 이 땅에서 그 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 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그분 / 그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직 아니리 /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우리에게는 마지막 영원한 안식이 남아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안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은 ‘일할 수 있는 은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감당하며 맡겨진 인생의 여정, 천로역정을 걸어야 합니다. 감사하지요. 그 길을 혼자 가지 않고 이렇게 길동무를 주셔서 함께 가게 하시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