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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6) - 광야를 사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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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6) - 광야를 사는 방식

민수기 9:15-2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3-09

말씀내용
본문은 ‘광야에서’라는 민수기의 제목에 잘 맞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광야에서 여인들과 아이들을 포함하면 200만이나 되었을 거대한 백성들이 어떤 패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이동하고 살았는가를 설명해줍니다. 본문의 두 가지 핵심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그리고 백성의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발하고 머무르는 모든 과정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임재 동행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하게 그 인도하심의 싸인을 보고 순종하여 살아갑니다. 이 두 가지는 각각 ‘구름’과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지켜)’라는 반복되는 단어와 구로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를 사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 문맥?출애굽기 40:34~38
본문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5절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40:34~38은 성막이 완성된 후의 일들을 묘사합니다. 먼저 구름이 회막 위에 덮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감히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막 위에 덮인 구름이 떠오르게 되면 백성들은 텐트를 거두고 그 성막의 움직임을 따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순서와 질서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떠오를 때까지 그들은 텐트를 치고 머물렀습니다. 낮에는 구름이었지만 밤이면 그 구름 가운데로 타는 불이 있는 것을 모든 백성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오늘 민수기의 본문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기술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 ‘구름’: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본문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구름’입니다. 구름이 오늘 본문에만 11번(히브리어 성경에는 10번) 사용되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소위 쉐키나의 구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쉐키나’는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또는 광채를 가리키는 히브리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가시적 현상으로 당신의 임재를 자기 백성과 부름 받은 종들에게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그 한 예가 출애굽기 40:34~38에 나오는 구름입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모세와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충만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구름이 회막에 덮이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종종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임재를 가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을 쉐키나라고 합니다. 즉, 쉐키나는 하나님의 임재, 영광, 광채 등을 가리킵니다. 쉐키나의 절정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도록 구름으로 드러났던 쉐키나의 모든 상징은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쉐키나의 성취이자 실체이며 완성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뿐 아니라 생생한 인도하심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고 섬을 결정하는 것은 지도자 모세나 대제사장 아론이 아니라 구름이었습니다. 사실 이 구름은 성막이 세워지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의 처음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자 그 구름은 이제 성막 위에 위치하게 되고,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 상징인 성막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막 위에 있는 불 모양 같은 구름은 24시간 365일 그들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싸인이었습니다. 16절에서 ‘항상 그러하여’라고 한 것은 광야 여정이 다 마친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막 위에 구름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비록 광야 여정은 끝났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싸인은 없었을 것입니다.
3.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철저한 순종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순종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반복구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지켜)’입니다. 이것은 본문에 8회 반복해서 쓰였습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라는 문장이 3번 반복됩니다(20,23,18). 이스라엘 백성의 가고 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명령하셨습니까? 별도의 말씀도 하셨지만, 이 맥락에서 하나님은 구름을 통해 명령하셨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르면 그들은 출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텐트를 걷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질서를 따라 출발을 시작했습니다. 또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르면 그들은 행진을 멈추고 진을 쳤습니다. 구름을 통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리 공부, 치밀한 계획, 심지어 전쟁 준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은 절대 순종입니다.
4. 광야 여정의 패턴
광야 여정 중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순종만 하면 되므로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기록을 담고 있는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의 기록이 이스라엘 백성의 그 많은 불평과 원망, 불신앙의 문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순간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 중에 임재하시고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쉼 없이 불평을 했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하지만 그들의 삶과 오늘 우리 자신을 비교해본다면,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광야를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를 가지지 않고 여행을 했습니다.
A. 자기 일정표 없는 여정
첫째로 그들은 자기들의 일정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일정표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잘 짜인 일정표가 아니더라도 일정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미리 예측하고 예상하고 준비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능입니다. 수련회를 가도 큼지막하게 일정표를 벽에 써 붙여놓던가 아니면 소책자에 일정표를 자세하게 기록해서 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일정표가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정표를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존재였지만, 가나안?하나님께서 주실 유업의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B. 규칙적 패턴이 없는 여정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는 규칙적인 패턴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엄격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규칙적인 것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규칙적인 삶에서는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불규칙성은 인간을 두렵게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삶은 기대가 되기 보다는 두렵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르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19절에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이라고 한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일찍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20절에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물론 21절에 기록한대로, 구름이 저녁에 성막 위에 머무르다가 아침에 떠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틀 혹은 한 달, 일 년을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불규칙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은 ‘9 to 5’의 패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출발하고 저녁이 되기 전에 멈춰서 진을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이런 규칙적인 방식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패턴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아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C. 지도 없는 여정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는 지도가 없었습니다. 나침반도, 네비게이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앞에 무엇이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다면, 이것도 불안해서 도무지 갈 수 없는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일정표, 규칙적인 패턴, 그리고 지도도 없이 걷는 여정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우리를 교훈하고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5. 확신(conviction)인가, 좋아하는 것(preference)을 좇아가는 삶인가?
본문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게 합니다. 확신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좇아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우리가 정교하게 짜놓은 일정표를 가지고 가는 삶이 아닙니다. 익숙해질 만큼 규칙적이지도 않습니다. 지도도 없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신을 따라 가는 삶입니다. 또 하나는 끊임 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이끌고 가는 삶도 아닌데, 삶의 자리에서 틈나는 대로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면서 살아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표도 목적도 없습니다. 인도하심을 받는 삶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라틴어의 경구대로 Carpe Diem, 내일이라는 시간은 불확실하니 너무 믿거나 기대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자는 인생관입니다. 여기에 장래의 은혜와 장래의 은혜에 대한 기대는 없습니다. 아무 진척도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삶이 오래되면 우리는 지칩니다. 사람이 자기 시간표에 따라서 살고 싶은데, 이것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쓴 마음이 생기고 이런 식의 인생관을 가지기 쉽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도 이런 면모들을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당장의 배부름, 당장의 입맛, 당장의 목마름, 당장의 편안함에 마치 목숨을 건 듯이 행동하고 말합니다. 만나가 맛이 없고 질렸다고 불평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합니다. 물이 없어 죽겠다고 모세를 죽이려고 듭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내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깁니다. 이것들은 다 자기들 좋아하는 것, 감각을 따라 사는 삶의 특징입니다. 여기에는 원칙도 없고 그때 그때 좋은 것이 좋은 것일 뿐입니다. 이런 삶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확신입니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모세의 삶을 보십시오. 모세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지도자였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일정표를 세우고, 지도를 보고 루트를 결정하고, 일정한 패턴을 정하여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을 대신해서 온전한 순종을 보여주어야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인생 40년을 지배했던 것은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좋아하는 것에 의해서 끌려가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라는 하루를 즐기고 마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확신에 이끌려 사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명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광야 같은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순종하여 따라왔는데, 우리가 고난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삶이 고작 이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내게 이러실 수가 있지?”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이때 일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 확실하고 내가 고난이라는 상황 가운데 있다면, 이 고난에는 필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감추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기대한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이 자기들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에 대하여 취했던 태도였습니다. 이것이 확신에 이끌려 사는 삶입니다. 이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알고 맛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내 패턴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패턴에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한없이 피곤하고 곤고함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주권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 삶은 염려로부터 해방된 삶입니다. 염려는 다 주께 맡기라고 한 말씀 그대로, 자기가 해야 할 것이 아닌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확신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삶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6. 교훈과 적용
A. 성막 ?성육신하신 주님 ? 신자의 몸 ? 성령의 전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이 땅에 성막을 치고 거하러 오신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단어가 ‘성막을 치고 거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성막의 완성이고, 실체로 오신 것임을 보여주는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신자의 몸을 장막에 비유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 벧후 1:13~14 참조).” 이런 신자의 몸은 빈 장막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마치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구름이 항상 성막 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 이상으로, 성령님께서는 성도들 안에 상징으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임재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신자의 삶은 더 이상 상징으로써 불 같은 모양의 구름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선명하게 명령하심으로써 인생 여정을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계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 가셔서 사탄의 유혹을 온전히 물리치고 이기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눅 4:1이하).
B. 임재와 인도의 약속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마 28:20b). 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3:5b). 또 이런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C. 확신 그리고 평안과 즐거움
신자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성막)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말씀으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인도하신다고 거듭 약속하십니다. 내 시간표에 하나님을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일 뿐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내가 결정하는 것도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적응하는 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장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이 세상, 현재의 즐거움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은 확신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만사 형통하는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비록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광야 같은 인생일지라도,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흘러나온 은혜로운 복락들입니다. 여러분 개인, 자녀들이, 가정이 그리고 우리 벧샬롬교회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순종하여 사는 확신의 삶, 평안과 즐거움의 여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