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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5) - 두 번째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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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5) - 두 번째 유월절

민수기 9:1-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3-02

말씀내용
1. 문맥?시간의 순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다시피, 민수기는 출애굽을 기점에서 해서 제2년 2월 1일에 인구를 계수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1부터는 성막을 세운 날인 제2년 1월 1일로 거슬러올라가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12일 동안 예물을 드린 일을 기록했고, 8장에서는 레위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성막이 세워진 후, 제2년 1월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제 회상의 성격으로 기록되는 내용은 오늘 본문인 9:14로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9:15부터는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는 채비와 그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민수기의 이런 큰 문맥을 알면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좀 더 자세히 정리하면, 제2년 1월 1일에 성막이 완성되면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예물을 드리는 일이 12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유월절에 이어서 7일 동안 무교절을 지키게 되면 1월 21일에 무교절이 마치게 됩니다. 무교절 후, 열흘이 되면 제2년 2월 1일이 되어 민수기의 첫 장에서 명하신 인구조사 명령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구조사 명령이 주어지기 보름 전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2. 9장의 주제?하나님의 인도하심(guidance)
9장에는 14절까지 유월절을 지키는 기록이 나오고 15절 이하에는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의 패턴을 소개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두 주제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체에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어떻게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지 문제가 제기되자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 지침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지고 나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선히 그리고 선명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5절 이하의 내용은 성막에 세운 날에 성막을 덮었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을 내내 인도했다는 사실을 서론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거의 1년이나 머물렀던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여 미지의 광야로 더 들어서야 합니다. 또 다시 그들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네비게이션이나 잘 만들어진 지도 나침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의 인생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였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인생길 앞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주전 14세기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주후 21세기를 사는 우리나 인생을 살아가는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동일합니다. 이점에서 성경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적용 가능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실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3. 규정들을 주신 하나님
오늘 읽은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2~3절을 보면 강조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나 너희가 원하고 또 한가할 때 지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유월절을 지키되 ‘그 정한 기일에’ 지킬 것을 두 번 강조하여 기록합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1월 14일 저녁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 모든 율례와 그 모든 규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백성들이 임의로 자기들이 정한 방식대로 정성스럽게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첫 유월절에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방식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2:1~28에 나와있습니다. (1) 그달(아빕월) 10일에 가족들의 수에 맞춰 흠 없고 일년 된 수컷 어린 양을 준비하고 (2) 14일 해 질 때 그 양을 잡아 (3) 우슬초를 사용하여 그 피를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4) 그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먹되, (5) 무교병?누룩이 있는 유교병은 변화와 부패를 상징하여 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떡을 위하여 발효시킬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이 떠나야 했던 상황도 보여준다?과 쓴 나물?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상징하는?을 함께 먹고 (6) 고기는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고 남은 것은 불사르며 (7)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출발을 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 주실 자유와 해방을 긴박하게 기다리면서 서둘러 먹어야 했습니다. 그 정한 기일에 이런 율례와 규례를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임의대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율례와 규례를 주심으로써 그것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즉사한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죽음이 바로 며칠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규정을 따른다는 것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4.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된 사람들
A. 문제 제기(7)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율법의 규정상, 시체를 가까이한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희생제물을 먹을 수 없었기에(레 7:20~21)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7절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한 기일에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찌함이니이까?” 가족의 죽음은 인간의 능력 밖에 일입니다. 불가피한 가족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체를 가까이함으로써 의식상 부정하게 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들이 문제를 제기한 동기는 ‘유월절을 지키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심지어 두려웠을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유월절을 고의로 지키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끊어진다’는 말은 (1) 사형 선고와 집행, (2)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죽음의 경고, 또는 (3) 추방을 의미할 것이지만 정확하게 그 뜻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와 축복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B. 유월절과 이스라엘의 정체성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을 이토록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을까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언약 백성의 정체성과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로부터의 구원뿐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형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루어 진 일이었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말미암은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 준수는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준수를 거부하거나 무시한 사람들에게 추방이라는 혹독한 징벌이 내려지게 되는데, 이것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 정체성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에 대한 적절한 운명적 조처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던 어리석은 에서의 경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7절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아, 잘 됐다. 이번에 장례식과 겹쳐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을 핑계도 생겼고 이번에는 건너뛰지, 뭐!”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때로는 “십일조를 꼭 해야 하나요?” 혹은 “주일을 성수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을 꼭 원칙대로, 규례와 유례대로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7절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구제의 기회를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불가피한 이유로 인하여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것인데 자기들이 백성 중에서 끊어져야 하는가 물은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인도하심(8~14)
모세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응용할 수 있는 선례도 없어 하나님께 물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를 들어야 했습니다(8). 하나님께서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나 먼 여행 중에 있어서 도무지 유월절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둘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게 하라고 답을 주셨습니다. 먼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의 경우는, 장래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있게 될 경우까지 상정하여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후일에 선례가 되어 히스기야 왕이 남유다와 멸망한 북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하여 유월절을 지키려고 했을 때 적용되기도 하였습니다(대하 30). 비록 하나님께서는 한 달 사이의 간격을 두고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심으로써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들과 먼 여행 중의 사람들을 구제하여 주셨으나, 정한 시기의 차이만 다를 뿐, 모든 율례와 규례를 따라서 지킨다는 것은 동일했습니다. 다만, 두 번째 달에 지킨 유월절에서는 7일간 이어지는 무교절은 지키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무교절을 지켰다면 20일을 넘어가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을 하게 되는 날짜가 2월 20일이기 때문입니다(10:11).
두 번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지시와 조치는 유월절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지닌 가치를 더 강조해줍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재와 정체성에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두 번째 달 14일에 준수할 것이 요구된 것이고, 이 예외적 조치는 유월절 준수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기는커녕 도리어 이 절기를 준수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6.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은 규례와 율례를 주시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하게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셔서 죄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로우심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에도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심판이 율법을 따라 시행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과 함께 살 길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던 죄인도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받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와 상관없이 그리고 자기의 통제 밖에서 일어나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하여 의식상 부정하게 되는 일은, 인간이 지닌 딜레마입니다. 인간이 본질상 죄인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부정하게 된 사람들뿐 아니라 먼 여행 중에 있는 상황으로 인해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은혜로 제공해주십니다. 이렇게 유월절을 지킬 기회를 얻게 된 사람들은 “아, 유월절 제대로 안 지켜도 되는군”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웠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A.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율법인가, 은혜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런 생각 속에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십일조가 율법인가, 은혜인가? 주일 성수가 율법인가, 은혜인가? 하는 질문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율법인가, 은혜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한 기일에 그 모든 율례와 그 모든 규례대로 지키라”는 그 명령 자체로 볼 때, 분명히 이것은 율법입니다. 정한 기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그 다음 달 14일에 정확하게 모든 율례와 규례대로 유월절을 지키라는 지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게 하신 의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거기서 그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하고 살라는 말이고,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참된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거추장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회복함으로써 감사와 감격으로 새로워질 수 있는 은혜의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라는 이 엄한 명령은 자기 백성의 영혼을 회복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은혜의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B. 성화의 삶을 촉진시키는 유월절 지킴
유월절이 바로 7일간 이어지는 무교절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유대인들은 이 두 용어를 서로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됨으로써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은 누룩이 없는 삶, 즉 모든 부패와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유월절에서 무교절이 바로 이어지는 바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7~8).”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구원의 은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 속에서 살아있는 진리로 역사하면 역사할수록 우리의 성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C. 모두에게 열려있는 은혜(14)
이 은혜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서 사는 타국인들도 그들이 원한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지요. “만일 타국인이 너희 중에 거류하여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유월절 율례대로 그 규례를 따라서 행할지니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율례는 동일할 것이니라.” 그들 역시 하나님을 섬긴다면,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혈통적 이스라엘을 넘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기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 은혜의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거기에는 거류민이나 본토인(태생적 이스라엘 사람)이나 차별이 없었습니다.
7. 적용: “우리를 그 은혜에서 제외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순종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경우도 경험합니다. 가령, 우리는 현대 사회 속에서 직업의 특성상 주일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가까운 예로, 경찰과 소방대원, 그리고 간호사와 같은 직업이 그렇습니다. 이것뿐 아니라, 사실상 직장에서의 당직이나 기타 업무들로 인하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과 주일에 교제를 나누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7절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처럼 접근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 직업이 그런데 할 수 있나? 이해해주시겠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도 참여하고 싶고 우리도 유월절을 지키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태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사람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규정을 엄밀히 요구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려고 은혜의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어질 것입니다.
“십일조가 율법이냐, 은혜냐? 주일 성수가 율법이냐, 은혜냐?” 하는 유치한 자리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십일조든, 주일성수이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구원의 감격과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은혜를 확인하시는 자리에 가십시오. 주님을 잘 섬기고 싶어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나아가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율법과 의무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평생 최소한의 의무만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남아 있는 은혜마저 빼앗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난처한 상황은 자칫 범죄의 자리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을 ‘정당하게(?)’ 피하는 자리로 인도하기 쉽습니다. 범죄의 자리냐, 은혜의 자리냐 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종종 우리는 범죄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그 은혜에서 제외시키지 말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