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민수기 강해 (14) - 산 제물

민수기 강해 (14) - 산 제물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민수기 강해 (14) - 산 제물

민수기 8:5-2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2-10

말씀내용
1. 살아있는 희생제물: 산제물(롬 12:1)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거룩한 산 제물’의 실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는 레위인의 존재가 산 제물 즉 ‘살아있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모든 (희생)제물은 놋제단 위에서 죽습니다. 제물의 성격상 살아있는 제물이란 말은 모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한 예외, 살아있는 희생제물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2. 레위인의 위임식
앞서 우리는 3장과 4장에서 레위인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성막 봉사를 위하여 구별되어 특별히 제사장들에게 바쳐진 존재였고 또한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위한 대속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레위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는 위임식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을 기록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가운데 매우 특별한 존재였던 레위인의 위임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이스라엘 가운데 레위인의 존재(14~19)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레위인의 존재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이미 민수기 3~4장에서 설명했지만, 오늘 본문에 따라 간단하게 정리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4~19절은 네 가지로 레위인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첫째로 레위인은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쳐진 존재이며(14,16b), 둘째로 성막 봉사를 위해서 구별된 사람들이었고(15), 셋째로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들이었으며(16~18), 넷째로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를 침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재앙이 그들 중에 내리지 않게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19).
좀 더 설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은 특별히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 숭배의 배교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긴 후에,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했고 이때 레위 자손이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데 그것은 칼을 차고 범죄한 자들을 치되, 형제, 친구, 이웃을 막론하고 치라는 것입니다. 레위 자손은 그대로 행했고 이때 모세는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출 32:29). 이것이 레위 자손이 성막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도록 구별된 사건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뿐 아니라, 레위인의 존재는 유월절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출애굽할 때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던 밤에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속하는 사람들이 레위인이라는 사실을 민수기 3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일 개월 이상된 남자 아이들을 계수하여 그들을 레위인이 대속하게 하고 모자라는 273명에 대해서는 1인당 5세겔의 속전을 내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레위인의 존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자손 모든 장자의 대속물이었습니다. 본문 16~18절이 그 사실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것은 19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고 한 부분입니다. 민수기 4장은 레위인이 성소의 일을 감당했기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함으로써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부르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사장인, 아론의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의 사건도 그 위험성을 확증합니다. 이렇게 레위인의 존재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교훈이어야 했습니다.
4.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나님께 바침(5~13)
본문 5절부터 13절은 레위인을 하나님께 정결하게 바치는 위임식에 대한 묘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절차를 보면, 첫째로 레위인들에게 속죄의 물을 뿌리라고 했습니다(7a). 우리는 이 물이 단순히 물두멍에서 취해진 물인지, 아니면 부정을 씻는 물로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잿물인지(민 19)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레위인들의 온 몸의 털을 삭도로 밀라고 했습니다(7b). 이것은 문둥병으로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병이 나은 후에 정결하게 되기 위하여 온 몸의 털을 다 미는 행위와 같습니다(레 14:9). 본질상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정결하게 바쳐지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문둥병자가 그 정결함을 인정받는 것과 같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질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께 바침이 되는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셋째 절차는 레위인들의 의복을 물로 빠는 것입니다(7c). 제사장들은 위임식 때 새 옷을 받았으나(레 8:12~13) 레위 사람들은 옷을 빨아 입었습니다. 이렇게 레위인의 몸을 정결하게 한 뒤에, 넷째로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소제물로, 그리고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게 합니다(8).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정결하고 거룩하게 바쳐진다는 것은 대속의 제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 다섯째로, 레위인들을 성막 앞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을 다 나아오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레위인들에게 안수하게 했습니다(9~10). 이것은 레위인의 존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안수 행위는 일차적으로 안수하는 자와 안수를 받는 자를 동일시하는 행위입니다. 보통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온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그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이렇게 안수함으로써 사람의 죄가 희생제물로 드려질 짐승에게로 전가되고 그 제물은 안수한 사람의 죄를 쓰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이나 대표들이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했을텐데, 이 안수를 통해서 레위인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는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레위인은 이스라엘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는 대속물,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안수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여섯째로 대제사장 아론이 레위인을 하나님께 요제로 흔들어 바쳤습니다(11). 요제는 두 차례 행해졌는데, 잠시 후에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곱째로, 가져온 제물들로 속죄제와 번제가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데 이때도 안수가 당연히 행해집니다(12). 이번에는 레위인이 제물에게 안수하는 것입니다. 이 안수는 이스라엘 자손의 안수를 받아 이스라엘의 대속물이 된 레위인이 하나님께 놋제단 위의 제물로 드려져야 마땅하지만, 레위인들이 죽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레위인의 안수를 받은 수송아지들이 레위인의 대속물로 바쳐져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위임식에서 두 번의 대속 행위가 일어나는 셈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들이 다시 한 번 레위인을 요제로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모든 레위인의 위임식 절차가 마치게 됩니다(13).
여기서 두 번에 걸쳐 안수가 행해졌듯이, 요제도 두 번에 걸쳐 행해진 것을 보게 되는데 첫 번째는 대제사장 아론이 레위인을 흔들어 바친 것이고(11), 두 번째는 제사장들이 바친 것입니다(13). 요제는 화목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흔들어서 바치는 제사 행위인데(레 7:28~34) 그렇게 바쳐진 부분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점에서 레위인이 흔들어서 바쳐졌다는 것은, 레위인이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19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19a).” 이스라엘 자손의 속죄제물이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제사장들에게도 바쳐진 존재였습니다. 두 번에 걸쳐 요제로 드려졌다는 것은, 첫째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에서 대제사장 아론이 드렸고, 둘째는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제사장들이 요제로 드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이스라엘 가운데 레위인의 존재?적용
우리는 레위인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로 하나님께 드려지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적용적 관점에서 레위인의 존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레위인의 존재는 한 마디로 대속물이었습니다. 단지 이스라엘의 장자들만을 위한 대속물이 아니라(16~18) 그들을 안수하여(10) 하나님께 바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대속물입니다(19).
레위인이 백성의 안수를 받았고 두 차례에 걸쳐 요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이 대속물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 이 세 존재가 하나로 동일시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제사장은 제사장대로 특별히 구별된 존재로 하나님께 바쳐졌고, 레위인도 구별되어 하나님과 제사장에게 바쳐졌지만, 본질상 레위인은 온 백성을 대표하는 개념에서 구별된 것이지, 본래 이스라엘 백성과 차별화되는 특권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종교적 특권층이 아니었습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대속물,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어서 번제단 위에서 태워지지 않았고 살아서 온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살아있는 희생제물로 말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올 모든 종류의 부정함에 대하여 마치 살아있는 속죄제물처럼 행동했고,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드려지는 살아있는 번제물처럼 존재해야 했습니다. 너를 대신해서 내가 죽는다는 것이 레위인의 삶을 설명해주는 명제입니다. 만일 레위인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성막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막을 모든 부정에서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속물의 개념을 밀그롬(Jacob Milgrom)이라는 학자는 피뢰침을 예로 들어 아주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피뢰침이 모든 번개를 다 자기에게로 흡수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소를 침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 가운데 임하게 될 때에 레위인이 그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에게로 흡수하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 접근하여 성소를 더럽히는 일을 중단시키지 못했다면, 레위인이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는다는 의미로까지 확대하는 것이 진정한 대속물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레위인은 평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저주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위한 살아있는 희생제물, 곧 대속물로서의 레위인의 부르심이었습니다.
6. 참 레위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이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레위인으로 오셔서 우리 모두의 대속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짐승을 제단에서 죽임을 당하는 대속물로, 레위인을 살아있는 대속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대속물로 소개하십니다. 이전 것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한 몸으로 끌어 모아 받으시는 피뢰침처럼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거룩하신 분으로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과 동일시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으로서, 율법 아래 오셔서 모든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여 지키심으로써 아담이 실패했던 바, 율법의 의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세례로 묘사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여기서 주님이 당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세례라고 하신 것은, 노아의 시대에 세상을 쓸어갔던 물처럼 그 심판의 물이 예수님을 쓸어갔고 예수님을 심판하여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살아있는 희생제물이며 대속물이었던 레위인의 직무를 온전하게 당신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하신 것입니다.
7. 교훈과 적용?우리는 누구인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제사장의 직분은 이제 특별한 아론과 그 자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제사를 단번에 십자가에서 이루셨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바로 우리의 대속물로 행하신 일인 것을 성령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할 살아있는 희생제물인 레위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주신 권면의 말씀을 마주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는 레위인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완전한 모범을 통하여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고 배웁니다. 제물은 그 자체로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제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던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레위인이 그랬고,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그를 보내신 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셨듯이 말입니다. 그 삶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입니다(롬 14:7~8). 제물에게 자기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산 제물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산 제물이 되라고 한 후에, 그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로마서의 남은 부분에서 설명합니다. 특별히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전임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이 산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날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3절부터 27절에는 레위인의 직무 연한이 나옵니다. 레위인의 일은 정신적인 판단력에 있어서나 육체의 힘에 있어서나 삶의 황금기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25~50세의 레위인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물론, 4장에서 삼십세 이상으로 오십세까지 계수하라고 한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4:3). 25세부터 30세까지의 5년은 견습 기간이었을 것이라고 유대인 랍비들은 설명합니다. 나중에 다윗 시대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온 후에는 더 이상 성막을 옮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다윗은 레위인의 복무연한을 20세로 낮추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들에게 성막과 그 기구들을 운반하는 일만큼 세심한 주의력이 요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어지게 될 성전의 규모가 커짐으로써 상대적으로 레위인의 봉사의 필요가 커질 것이기에 행해진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25절에 의하면, 50세가 넘어가면 은퇴를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책임은 맡지 않고 다른 레위인들을 돕는 직무를 계속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즉, 레위인들은 연령에 따라,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는 일을 책임을 지고 맡든지, 책임을 진 사람을 돕든지 하는 형식으로 평생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고 노쇠해지면 젊고 힘이 있을 때처럼, 집사로, 장로로, 혹은 권사로, 목사로 섬기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든지, 기도로, 혹은 존재 자체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존재로 우리는 부르심을 입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참 레위인이 되심으로써, 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참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에게 모델이 되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진 산 제물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살아있는 희생제물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더욱 주를 섬겨 봉사하지 않는다면, 어찌 힘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주를 섬겨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제물로 평생을 사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