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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1) - 축복(녹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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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1) - 축복(녹음 없음)

민수기 6:22-2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1-13

말씀내용
1. 제사장의 축복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구약에 나타난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축복의 내용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라고 명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레위인을 계수하고 나실인 규정을 말씀하신 후에, 백성을 축복하라는 명령은 문맥상 아주 잘 연결됩니다. 수많은 전쟁을 싸워야 할 백성, 그들을 영적으로 섬겨야 할 레위인들 그리고 특별히 자원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들의 규정을 다루었습니다. 나실인은 본질상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존재임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진 백성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2. 축복문의 구조(24~26)
축복의 내용은 24~26절까지 세 절인데, 독특한 구조가 있습니다. 세 절이 각각 하나님의 언약적 성호인 여호와를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사실 세 구절에 각각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여 사용할 필요가 없고 맨 앞에만 한 번 써도 내용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특별히 복을 주시는 주체이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어법입니다. 오늘날 축도의 문구로 가장 많이 알려진 고린도후서 13:13에서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나님의 성호가 각각 사용된 것과 흡사합니다. 비록 이 본문이 성 삼위 하나님을 구분하여 성호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이 축복의 주체는 성 삼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구절은 각각 두 개의 동사의 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4절에는 ‘복을 주심’과 ‘지키심, 25절에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비추심’과 ‘은혜 베푸심’ 마지막으로 26절에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심’과 ‘평강 주심’입니다. 두 개의 짝으로 구성된 단어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복주심의 결과는 지켜주시는 것이고, 얼굴을 비추심의 결과는 은혜를 베푸심이고 얼굴을 향하여 드신 결과는 평강 주심입니다.
또 우리말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짚어내기 어렵지만, 히브리어로 이 축복문은 점강법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수가 24절은 3개, 25절은 5개, 26절은 7개입니다. 또 자음의 수는 24절이 15개, 25절이 20개, 26절은 25개이고 음절 수로도 24절은 12 음절, 25절은 14 음절, 26절은 16 음절입니다. 이제 찬찬히 살펴보겠지만, 문장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그 내용으로도 24절에서 26절로 가면서 축복의 내용은 점점 더 고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한 구절씩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3. [축복과 돌보심]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
가장 먼저 사용되는 동사는 ‘복을 주시고’입니다. 히브리 말에서 ‘축복한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한다고 할 때, 그것은 바램이나 희구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이삭이 아들들을 축복할 때, 야곱에게 좋은 축복을 다 주었으므로 이제 에서에게 줄 축복이 남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창 27:33~38). 여기서 축복은 번복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삭과 두 아들인 야곱과 에서는 모두 그 축복이 단순히 아버지의 바램이나 희구하는 바가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창세기 마지막 부분인 48장과 49장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과 자기의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만납니다(창 49). 여기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축복이 단순히 아버지의 바램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예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복이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즉 축복은 바램이나 희구가 아니라 축복하는 자의 능력에 기반하여 그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 암시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삭이나 야곱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자식들에게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아들들을 축복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점에서 제사장들에게 자기 백성을 축복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축복의 내용을 성취하시겠다고 자기 백성에게 선언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점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축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축복을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계시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동사는 ‘지키시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을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지키신다는 개념은 ‘돌보신다’, ‘모든 해로부터 상치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악한 자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사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가리키고 좀 더 궁극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견인하시는 은혜를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하신 팔로 그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9~10).”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 17:8).” 하나님의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이런 고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자기 백성을 축복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한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시고 또 보여주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4. [얼굴 비추심과 은혜 베푸심]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
이제 25절의 두 번째 축복으로 가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얼굴 빛을 비추어주신 결과로 은혜 베푸심을 받는다는 구조입니다. ‘얼굴을 비추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웃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의역을 한 영역성경인 NLT는 이런 표현을 “May the LORD smile on you”라고 번역했고 우리 말 성경 중에서 공동번역이 이와 비슷하게 “야훼께서 웃으시며”라고 번역했습니다(시 4:6; 31:16; 44:3 참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라보시고 웃으신다는 것은 그들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을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흠과 점과 티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보실 것이고 그것에 합당하게 우리를 대우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베푸시는 과분한 은혜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아도 은혜를 받고 산다는 것은 결심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얼굴을 비추어 주시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바라보며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시 123:2).

5. [얼굴 드심과 평강]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
세 번째 축복은 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네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향하여 드시는 결과로 평강을 누리는 복을 얻습니다. 얼굴을 향하여 드신다는 것은 눈을 들어 그를 본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주목하여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을 바라보시되 웃으시면서 보실 뿐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한시도 놓치지 않고 자기 어린 자녀를 쳐다보면서 그 옆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을 아는 자녀는 그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우리의 마음의 생각까지도 아시고 주목하고 계시고 지키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신자가 누리는 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복의 궁극은 평강입니다. 히브리어로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평화라는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톨스토이의 장편 『전쟁과 평화』라는 개념만 봐도,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 전쟁의 반대되는 상태로 부정적인 것과 대조되는 점에서 이해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개념은 이런 부정적 개념과 상대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한 행복, 완전한 조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부족함이나 그 어떤 결핍함이 전혀 없는 상태,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결핍이라는 요소와 상대되는 개념이 아닌 그 자체로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윗이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때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완전한 발현, 충만, 행복입니다. 샬롬, 이것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하실 때 의도하셨던 복의 궁극입니다. 그 평강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깐 정리할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라고 하시는 복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물론, 성경에서 복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물질적 부, 장수, 자녀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로 표현이 됩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복이 이런 개념들로 표현되는 것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칼빈이 말한 대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유아들에게 말씀하심과 같이 표현하셨다는 점입니다(기독교강요 2.11.2). 칼빈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자기의 백성이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하늘 유산을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의 이 소망을 더욱 잘 배양하시기 위해서 그 유산을 땅에 붙은 혜택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보이시며 이를 테면 그들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내세의 은총을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계시했으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직접 내세를 명상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시던 낮은 훈련 방법을 버리신다(강요 2.11.1).” 비록 구약성경이 복을 종종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으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런 표현들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말하는 그 복의 핵심은 오늘 우리가 상고한 세 구절 안에 있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지키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웃으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심이며, 우리를 주목하사 모든 환경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하심입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평안은 세상에서 제자들이 당하게 될 환난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요 16:33). 왜냐하면 이 평안은 오직 ‘주 안에서’ 누릴 평안이고, ‘주 안에’ 있는 신자의 신분은 어떤 것으로도 변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왜 지상의 물질적 복에 집착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래리 크랩은 이 문제를 인간의 욕구/갈망과 관련하여 세 개의 동심원으로 잘 설명했습니다. 가장 밖으로 그려진 동심원은 일상적 욕구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물질, 소유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 욕구가 해결되더라도 인간은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욕구가 자기를 채워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중간의 동심원인데 기본적 욕구라 불립니다. 이것은 화목한 가정, 원만한 인간 관계로 채워질 수 있는 욕구입니다. 이것이 채워진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이 때 인간 중심에 있는 욕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욕구라고 불리는 것으로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욕구입니다. 영적 욕구인 것입니다. 물질과 지상적 관계로 채워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만 채워질 수 있는 욕구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웃으시는 것,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시는 것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웃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 참된 만족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욕구를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썼듯이,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은 속고 삽니다. 일상적 욕구와 기본적 욕구가 채워져도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은, 더 많은 물질과 소유 그리고 더 많은 관계가 주어지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기만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성공추구, 새로운 관계들을 찾아나섬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갑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종종 일상적 욕구와 기본적 욕구가 깨어짐을 통해서 그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자기 내면의 중심에 숨겨져 있던 근본적 욕구를 주목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어리석은 죄인의 고통스러운 죄악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님만이 그들의 만족(생수)의 근원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웅덩이, 만족을 줄 수 없는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를 지적합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b).”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깊이 생각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7. ‘내가’ 복을 주리라(27)
이제 27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가’라는 말로 당신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에 강조를 하십니다.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들이지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의 축복을 받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 약속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이 의미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그 복을 주시는 분의 능력에 근거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것을 예배 가운데 축도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랑과 은혜와 교통하심의 축복을 교회와 모든 권속 가운데 행하시겠다고 하시는 선언으로 받고 그 말씀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이 축복의 말씀으로 축복했을 때, 사도가 의도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사도가 아니라 성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8. 축복의 통로(사 53:5; 눅 2:14)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명령을 제사장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에서 지속되는 매일의 삶 속에서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모든 환경 속에서도 ‘평강’ 샬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만족이 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누리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들의 일상적 욕구와 기본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경험 속에서도 말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고백했던 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의미입니다. 어떻게 이런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우리는 그 축복을 얻어낼만한 자격도, 공로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 축복은 전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2~3).” 이 모든 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야곱의 인생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오시기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모든 고난과 징계를 받으셨기에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이 주어집니다. 제사장에게 명하신 이 축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복을 실행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실행하신 것을 우리 자신으로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리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복이 여기 있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와 존귀와 찬송을 돌립시다. 그리고 믿음과 감사함으로 이 은혜로운 축복을 누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