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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0) - 구별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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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0) - 구별된 삶

민수기 6:1-2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2-30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나실인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나실인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일정기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져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서원한 남녀”들입니다(1). 특별히 성경에는 명백한 나실인이 세 사람 정도 나오는데 이들은 일정 기간에 나실인으로 서원하였다기 보다, 평생 나실인으로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사무엘과(삼상 1:11,28) 삼손(삿 13:2~5) 그리고 세례 요한(눅 1:15)을 들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삼손과 세례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들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경우이지만,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할 때, 하나님께 서원함으로 얻은 아들을 서원대로 하나님께 바친 경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특별히 일정 기간(대개 단기간)을 나실인으로 서약하여 전적으로 헌신된 구별된 삶을 하나님 앞에 사는 나실인의 경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1. 나실인의 의미(1~2)
나실인이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야곱이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표현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 여기서 ‘뛰어난 자’가 나실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는 레위기 2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여기서는 ‘가꾸지 아니한’이 나실인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나실인은 뛰어난 사람, 구별된 사람, 혹은 안식년에 가꾸지 않은 포도원처럼, 사람이 직접 돌보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책임지신다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알다시피, 나실인이 서원 기간 동안에는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는 것이 아마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실인은 일정 기간을 자원하여 서원함으로써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진 구별된(또는 그 헌신에 있어 뛰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에는 자신들의 생업을 하고 살지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4~5장에서 레위인들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여기서는 혈통상 레위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섬기기를 자원함으로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실인 서약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2).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혈통으로 제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실인으로 서원함으로써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별된’ 삶이었습니다.
2. 나실인의 3금 조항(3~8)
‘나실인’ 하면 생각나는게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삼손이 생각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납니다.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라 모두 3가지 금지 조항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특히 포도로 된 모든 것을 피해야 했습니다. 3~4절에는 포도즙도 마시지 말고 생포도, 건포도, 심지어 포도의 씨나 껍질도 먹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포도주는 기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전 10:19). 잔치에 포도주가 동이 나는 것은 끔찍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첫 번째 표적으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동난 포도주를 만들어주시는 일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이 포도주가 동난 잔칫집 같은 인생에 참된 기쁨을 주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이런 일반적인 인생의 즐거움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이점에서 사람들이 나실인을 금욕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기독교를 금욕주의로 오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분명히 나실인에게 금욕적 차원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그가 서원한 기간 동안에만 특별히 구별된 목적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었고 서원의 기간이 끝나면 그는 다시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20). 또 이런 금욕적 요소가 그들은 은둔자로 만든 것도 아닙니다. 평생의 나실인이었던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회 속에 깊이 연관된 삶을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나실인을 생각할 때, 깊은 산 속 기도원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이다 하는 오해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구별된 목적을 위하여 서원 기간 동안 포도로 만든 모든 것과 발효된 술을 금한다는 것이 나실인이 첫 번째로 지킬 규정이었습니다. 사실 이 규정은 일반적인 제사장들보다 더 엄격한 면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 즉 회막의 일을 감당해야 할 때에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한다고 했지만, 나실인은 서원한 기간 동안 내내 포도주와 독주 심지어 포도의 모든 소산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 금지 조항은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5). 아마 이것이야말로 외모로 나실인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실인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긴 머리였습니다.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이 길수록 그 머리는 길었을 것입니다. 만일 워낙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나실인으로 헌신했을 경우에는 아마도 그 긴 머리를 특별히 단장하거나 돌보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나실인 됨을 표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마치 가꾸지 않은 포도원처럼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금지 조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체를 멀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었고 이런 점에서 제사장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의식상의 부정으로 더럽혀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 21:1). 그러나 직계 가족만은 예외였습니다(레 21:2~3). 그 기준이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좀 더 엄격합니다.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레 21:10~11).” 대제사장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수도 없었고 부모의 주검도 만져서도 가까이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실인의 규정도 부모 형제 등 직계의 죽음뿐 아니라 누가 갑자기 죽는 일이 그 옆에서 가령 한 집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의식상 부정한 자로 서원을 깨뜨리는 일이 되었습니다(9). 즉, 손으로 주검을 만지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했더라도 의식상 부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1세대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1세대의 죽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이었으니 이 세 번째 규정으로만 보더라도 예상할 수 있는 실수가 아닌 우발적인 이유로 깨질 수 있었기 때문에 나실인의 서원을 기간 동안 무사히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3. 나실인의 서원을 깰 때(9~12)
이런 식으로 나실인의 서원 기간 안에 금지조항을 위반하게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먼저 ‘그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날’ 즉 7일째 되는 날에 머리를 밀어 버림으로써 그의 서원이 취소되었음을 선언해야 했습니다. 사실 본문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제3일과 제7일 이틀에 걸쳐 암송아지의 재를 탄 잿물을 뿌려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했을 것입니다(민 28:11~13). 여덟째 날에는 두 말의 비둘기를 각각 속죄제물과 번제물로 드려 다시 서원을 하는데 여기에는 속건제물로 일 년 된 숫양이 또한 드려져야 했습니다(9~12). 지나간 기간은 무효가 되었고 당사자는 서원의 기간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종종 우발적 이유로 나실인의 그간의 헌신이 무효가 되고 다시 시작해서 기간을 채워야 하는 일들이 일어났을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4. 나실인의 서원을 채웠을 때(13~20)
본문의 남은 부분은 나실인의 서원을 채웠을 때 서원을 마치는 의식을 설명합니다. 이것도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헌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헌물의 내용은 번제물로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 그리고 각종 소제물과 전제물들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14~15). 제사장이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순서와 소제와 전제를 드린 후에, 나실인은 머리를 밀고 머리털을 화목제물을 드린 놋제단의 아래 불 속에 던져 태우게 됩니다(16~18). 머리털을 제단에 태운다는 것은 우리의 성정과는 좀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머리털은 자신의 헌신의 증거이기에 보관하고 싶은 유혹을 가질 법도 하고, 자식에게 남겨 기념하게 할 법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십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헌신은 그것이 공로가 되거나 종교 경력이 될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여기에는 우리가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나실인이 서원의 기간 동안 구별된 삶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사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상을 주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나실인의 서원을 잘 마친 후에 헌물을 드리는 쪽은 나실인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 헌물은 비둘기 두 마리 정도 되는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정결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는데 왜 속죄제사가 필요할까요? 이것은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결코 우리의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헌신과 봉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순종과 섬김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제물이 피를 흘리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나실인은 아무리 어렵게 자신이 서원한 기간의 헌신을 잘 마쳤을지라도 그 자체로 춤을 추면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속죄제물의 피가 없이 드려지는 우리의 헌신과 순종은 온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죄의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흘리신 보혈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5. 이스라엘을 비추어주는 거울, 나실인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에 대한 율법 규정이 여기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나실인으로 많이 헌신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여기 나실인의 규정을 성령님께서 쓰게 하신 것일까요? 이 규정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을 읽고 사람들이 나도 나실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일정 기간을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규정을 여기 두신 것은, 이제 광야 39년의 여정을 출발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A.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실패를 비추는 거울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영구히 구별된 존재였습니다(출 19:6).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무능을 드러냈고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에 미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점에서 나실인은 이스라엘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 중에 있는 나실인의 존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아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평생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했던 삼손은 사무엘과는 반대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순종을 보여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B. 이스라엘의 본성(죄성)을 비추는 거울
나실인은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얼마나 그 정체성에 합당하게 사는가를 부정적으로 비추어주는 거울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깊은 죄성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나실인은 서원한 기간 동안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했습니다. 머리를 가꾸지 않고 자르지 않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하는 표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 통제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서원한 기간 동안에 포도에서 나는 모든 것을 멀리함으로써 인생에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모든 통제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삶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삶의 모든 통제권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과연 그럴 의향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의 기쁨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시면 금방이라도 불평과 죽는다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오라고 하신 말씀을 알고는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 자신의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할망정, 자신이 원하는 삶, 그리고 그 즐거움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교회에서 들은 말입니다. 어느 안수집사님의 아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말을 듣자, 사람들이 그분에게 “자식 농사 헛 지었군요”라고 했다는 일화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고 사는 목적, 목표, 그리고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믿음의 힘으로 더 누리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이 존재합니까? 자기 부인이 어디에 있으며 십자가 짐을 어디에 있습니까? 나실인의 존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이기적 죄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나실인은 그들만의 특별한 헌신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마땅히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 삶을 보여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6. 참되고 완전한 나실인, 예수 그리스도
이점에서 성육신하신 주님은 이 땅에서 참되고 온전한 나실인이셨습니다. 그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서원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자르지 않으셨는가? 그런 기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와 포도에서 난 것을 일체 금하셨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얻으셨을 뿐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시체를 만지지 않고 보지도 않으셨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시체를 만지셨고 그렇게 해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말하자면, 나실인에게 주어진 금지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키심으로써가 아니라 그 완전한 의미를 아셨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통제권을 드리신 삶을 사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자’의 말씀을 하셨고, ‘나를 보내신 자’가 하라는 것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 되셨습니다(요 4:34).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죽으시기까지 순종으로 자신의 삶을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히 12:2). 그렇게 완전한 순종에 당신을 제물로 드려 피를 흘리심으로 다른 제물을 필요로 하는 나실인이 아니라, 완전한 나실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구별된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7. 어두움 후에 햇빛 오고(21): 현대의 나실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누구도, 그리스도와 믿음을 위하여 순교를 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너무나 많이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와 순종과 섬김과 봉사와 헌신은 잠시 잠깐, 일정한 기간 동안에 드려지는 것이지만, 그 후에는 우리는 포도주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 하반절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드리는 수고는 그 앞에 그리고 영원히 주어질 영원한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는 영광 중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이고 그 영원한 영광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누릴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수고가 무슨 공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나실인의 규례가 단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의무조항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로운 헌신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점점 더 많이 알게 하시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의 나실인이 되어 교회가 누구인지,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무섭게 우리를 죽이는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는 구별된 삶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 주여! 그런 은혜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