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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9) - 정결한 백성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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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9) - 정결한 백성이 되라

민수기 5:1-3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2-23

말씀내용
민수기의 처음 네 장에서 우리는 백성들을 계수하는 일과 그들이 어떻게 진을 치고 행진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레위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합지졸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훈련된 군대로 만들어져 가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서를 세우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은 어렵지만, 엉망으로 만드는 일은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가만히 놓아둘 때 엉망이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5장과 6장에서 볼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특별히 율법 규정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것이 또 하나의 민수기의 구조상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모세오경을 보면 이야기와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령, 창세기는 전체가 이야기이라면 레위기는 몇 장을 제외하면 다 율법 규정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야기와 율법이 자연스레 섞여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회상하는 이야기와 율법의 규정이 구조적으로 적절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에는 이야기가 나오다가 율법규정이 툭하고 튀어나옴으로써 이야기가 끊어지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비평학자들이 이점을 민수기가 여러 문헌들의 짜깁기라는 것을 주장하는 근거라고 제시합니다. 하지만 민수기의 이런 패턴은 도리어 정교하게 구성된 패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해석이 충분합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5~6장의 율법 규정은 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에서 그들 중에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흐름에 아주 적절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5장의 본문을 오늘 먼저 상고하겠습니다.
1. 광야 교회의 유혹
광야교회가 가지는 유혹이 있습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교회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이런 광야교회는 오늘날의 신약교회의 정체성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더 편하고 더 크고 더 강성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광야교회가 만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지 도착이라는 목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목적지 도착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그 목표의 이름 아래 정당화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거래를 할 위험입니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그 목적지를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 광야에서 정착하고 싶거나 이와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것으로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유혹입니다. 후자의 유혹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고, 이제 민수기 강해를 진행해나가면서 다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순례자의 유혹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런 유혹을 받게 되는 까닭은 순례의 길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자의 유혹 즉 빨리 목적지로 가고 싶어하는 유혹입니다. 목적지로 가려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빨리’ 가려는 것과 무엇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냐에 대한 이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더 큰 교회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고 이런 경향이 선교에서도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과정이 정당화된다는 생각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는 성경적 방법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빨리 빨리’는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생활 방식이기도 합니다.
2. 서두르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처럼 ‘빨리 빨리’를 외치며 우리를 재촉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더딘 것처럼 느껴집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시는 메시아의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걸려서야 예수님은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신약성경이 약속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더디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뭔가 변화가 속도감있게 나타나면 좋으련만, 우리의 영적 변화는 더디기만 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딘 하나님도, 반대로 너무나 빠르게 달려가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시간을 통해서 적시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만나게 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질문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공간만 만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시간도 만들어주셨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인 자리에 우리 인간을 두어 살게 하셨습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요소가 만나서 역사라는 것을 이루게 되고,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과 자취를 얼핏 보게 됩니다.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통찰이 하나 더 있는데, 우리가 땅과 집을 매입함으로써 공간을 소유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지만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내 시간도 내 것이 아니거니와 남의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시간은 장래를 위해서 저축할 수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은 시간을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광야교회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빨리 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광야에서 오래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피력하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정을 힘들어하는 편입니다. 빨리 과정을 마치고 결과를 얻고 싶어합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는 목적만큼이나 과정은 중요합니다. 또 과정은 목적과 조금도 상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무질서한 백성이 신속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하고도 한 달을 보냈고 시내 광야에서 보낸 시간만도 11달이 지났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받았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세워졌고 위임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언제 가나안으로 가는건가 하는 초급한 마음이 들었을 법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수기는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출발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계수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의 직무에 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출발하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3.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 본문이 여기서 시작합니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정결한 백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그 진영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3). 광야교회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정결한 백성이 되라는 명령의 이면에는 그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전체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A. 어떤 목표도 거룩함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 (출 33)
거룩함이라는 가치는 이스라엘 백성, 광야교회의 어떤 목표, 어떤 가치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배워야 했습니다. 이미 시내 광야에서 그들은 잊혀질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통해서 그 사실을 배운 바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사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가게는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3:1~3). 이유는 그 백성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거룩하지 않은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간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곳이기에 저주의 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한 발자국도 가지 않겠다고 기도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백성과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광야교회가 그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B. 거룩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고 했습니다. 거룩함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거룩한 백성이 되려는 소원을 우리 안에 주사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기이하고도 놀라운 방법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바, 은혜에 거하려고 죄를 짓는 자는 믿음을 배반하고 부인하는 자입니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심령은 그럴 수 없습니다.
C. 목적지 도착이라는 목표와 거룩의 목적은 동일하다.
우리가 또 하나 염두에 둘 것은, 거룩이라는 목적과 목적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두 개의 상이하거나 서로 충돌하는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는 말씀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민수기에 만나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40년의 시간을 통해서 거기에 들어가기 합당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전제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상고해야 합니다.
4. 정결한 백성이 되는 방식
본문은 크게 세 가지 부정의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는 1~4절에 의도적이지 않은 의식상의 부정의 문제이고, 둘째는 5~10절에서 공적으로 회개해야 할 범죄의 문제, 셋째는 11~31절에서 언약을 깨는 신실하지 못한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A. 의도적이지 않은 의식상의 부정(1~4)
먼저 의도적이지 않은 의식상의 부정의 문제를 보게 되는데, 여기에 세 경우가 언급됩니다. 나병환자, 유출증 환자, 그리고 시체와 접촉이 된 자입니다. 먼저 나병환자로 번역된 단어는 오늘날의 한센병과 똑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현대적 개념으로 이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제안이 있는 만큼 어느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악성피부질환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특별히 레위기 13~14장이 상세하게 다루는 항목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유출증은 레위기 15장이 다루는 증상인데, 생식기로부터의 정액이나 혈액의 분비와 관련된 증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체와 접촉된 경우까지 해서 이런 사람들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 진영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의식상의 부정의 문제였습니다. 이 내용은 현대의 피상적인 개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의식적인 범죄 행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질병은 세상이 부패한 증거이고 타락의 열매이고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질병과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의 도성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계 21:27).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백성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병이 발발한 사람이 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질병은 우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연약함입니다. 이것은 죄의 고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비록 이런 연약이 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지만 그 자체를 죄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상적이고 온전한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가 피부병이 발하여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해도 그는 심령으로 계속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실질적 차원에서 성소에 참여하는 것이 불허된 것입니다.
또 성경은 우리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신자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질병이 고침 받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고전 6:12~20; 약 5:13~16), 주님께서는 많은 연약한 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런 질병들의 부정을 씻기 위해서나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기 위해서 정결규례나 제사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와 슬픔과 질병과 질고를 다 자기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의롭고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일어나 영광 중에 그분의 임재에 들어갈 것을 보장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연약함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삶을 살면서 모든 치유와 온전함의 회복은 우리가 입을 영광의 예고편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육적, 그리고 의식적, 일상적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져야 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성(sex)이라는 은밀한 부분까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성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거룩한 것이지만 범죄한 후에 이것은 수치와 관련된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적인 영역과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는 관념은 사실상 양심의 영역에서 양립하기 어려운 부분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 속에 성적인 난잡함을 언제나 연결시키고 있던 것을 금하시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본문은 부분적으로는 이런 요소를 고려한 규정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몸의 작용으로서 설정이나 월경은 물로 몸을 씻는 의식적 정결행위로서 그 부정함이 해결되어야 했고, 만성적인(질병적인) 유출의 경우는 제사 의식을 통해서 그 부정함이 정결함을 입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종교 의식 속에 성행위를 집어넣었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성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거룩한 장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과 몸의 기능이 더럽거나 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다산은 하나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성소에서의 성행위 의식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것과 거룩한 것의 경계를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B. 공적으로 회개하고 배상해야 할 범죄(5~10)
두 번째로 언급한 부정은 공적으로 자백하고 회개할 뿐 아니라 배상이 요구되는 범죄 행위입니다. 여기서는 이웃에 대한 범죄가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죄가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6절에 ‘여호와께 거역함으로’라는 말은 신뢰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는 경우의 죄를 주로 다루는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언약과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 범죄 사건 이후 회개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시 51:4). 여기서 다루는 죄는 이미 레위기 6:2 이하에서 다룬 경우인데, 이 범죄를 다루는 원리는 자백과 배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니 됐다”고 말합니다. 영화 <밀양>에서도 아이를 납치해서 죽인 범인이 아이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인데, 이런 모습은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빚게 합니다. 자백도 중요하지만 배상도 무시될 수 없이 중요한 회개의 요소입니다. 배상의 기준도 구체적이어서,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하여 1/5을 더하여 120%를 배상해야 합니다. 억울한 심정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이러합니다. 만일 배상해야 할 대상이 죽었거나 친척도 없다고 해서 배상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그는 제사장에게로 그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8). 그리고 자백과 배상이 끝이 아닙니다. 이 죄는 속죄의 제물로 수양이 드려져야 했습니다(8, 레 6:6~7). 제사가 요구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죄가 자백이나 배상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자백과 배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한 우리의 구원은 그런 것으로 온전히 해결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요일 1:7). 자백과 배상 그리고 희생제사, 이 세 가지 요소를 잘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삭개오를 칭찬하시고 그의 믿음이 구원 얻는 믿음임을 선포하신 것을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배상의 기준을 율법의 기준인 120%를 훨씬 상회하는 네 배 즉 400%로 올렸고 또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의 믿음의 진정성을 주님께서 보셨던 것입니다.
C. 언약을 배신하는 죄와 의심의 문제(11~31)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많은 비중으로 언급되는 부정의 문제는 결혼이라는 언약을 배신하는 죄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언약 백성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셨습니다. 이점에서 결혼은 중요하고 결혼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간음은 결혼 언약을 깨는 행위이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깨는 고질적 행위였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부부의 관계가 무너진다면 그 사회에서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기본이 되는 질서인 부부관계가 의심과 질투로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의심의 문제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부정에 대한 물증은 없지만 의심을 품게 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 남편의 부정은 없고 아내의 부정이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여인들을 보호하는 배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가 오늘날의 이슬람 사회처럼, 남편이 자기 부정으로 인해 쫓겨남을 당하거나 해를 입을 수는 없지만, 오히려 남편들의 근거 없는 의심으로 여성들이 해를 입는 일들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남편의 부정을 긍정하거나 허용하는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합니다. 본문을 보면, 먼저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야 하는데, 아내를 위해 약간 양(에바 십분의 일은 약 2리터)의 보리 가루로 소제물을 준비해서 가야 합니다. 이 소제물은 기름이나 유향이 없이 드려질 것인데 다른 소제물과 같이 감사와 기쁨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15). 이것은 의심(질투)의 소제 혹은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소제라 불립니다. 제사장은 여인을 성막 앞에 세우고 토기에 물두멍의 물을 담고 성막 뜰의 티끌을 담습니다(16~17). 그리고 죄와 수치를 상징하기 위해서 여인의 머리를 풀게 하고 소제물을 그녀의 두 손에 두고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이 담긴 토기를 자신이 들고(18) 그녀로 하여금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합니다(19). 저주의 내용은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녀의 생식능력을 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19~22). 넓적다리가 마르고 배가 붓는다는 표현은 생식능력을 끊는다는 것을 완곡히 표현한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제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저주의 쓴 물에 빨아서 넣습니다. 이것은 글자가 의미하는 저주가 그 물에 녹아 들어 효험을 줄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 행위입니다. 이제 제사장은 여인에게서 의심의 소제물을 취하여 소제물을 하나님께 흔들어서 바치고(25) 한 움큼을 취해 기억나게 하는 소제물로 제단 위에 불사르고 그 물을 마시게 합니다(26). 이제 남은 것은 그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의 법입니다. 이것은 고대나 중세의 시죄법과 비숫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속의 시죄법처럼 물이나 불로써 고통을 주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고, 실제로 사람의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공동체 특히 부부의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간음과 의심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주신 방식입니다. 부부관계와 가정을 신뢰 속에서 견고하게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언약 백성으로 정결하게 살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여기 있습니다.
5. 정결한 백성이 되라.
본문이 가르치는 결론적 교훈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형태의 부정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3).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본질과 존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 부정하여 진 밖에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늘 범죄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의를 저버리고 이웃과 형제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배신과 불신실 그리고 의심으로 부부관계라는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 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죄악 뿐 아니라 모든 연약함까지도 짊어지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마 8:17).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진 밖에 쫓겨나야 할 존재인 내가 오늘 진 안에서 들어와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깁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빨리 성장하고 싶어하고 이 땅에 더 큰 집을 짓고 싶어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진영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도 사람 사는 곳인데” 라고 말하면서 많은 것을 정당화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6b~7)”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점에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권징을 참된 교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았다는 점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날의 교회가 사랑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용납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판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교회는 그 거룩함과 정결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진영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