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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8) - 사소한 부르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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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8) - 사소한 부르심은 없다

민수기 4:1-4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2-16

말씀내용
1. 인간 안에 있는 질투심(민 16)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주제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가운데 고핫 자손에게 맡기신 일이 특별히 지성물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부르심은 한 순간의 실수로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부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주제는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 사소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때 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질투심입니다. 고핫은 레위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게르손 자손은 “왜 지성물과 같이 가장 중요한 일을 장자의 자손인 우리가 맡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막내인 므라리 자손은 “아무리 우리가 막내지만 성막의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맡기다니” 하며 분을 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유사한 문제는 광야교회에서 아주 크게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반기를 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불과 3살 더 많은 형이었지만 미리암은 갈대 상자 안의 아기 모세가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지켜보다가 어머니를 아이의 유모로 공주에게 소개할 정도였으니 적어도 10살 이상은 차이가 난다고 볼 때 아론이나 미리암의 태도는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의 권위에 도전을 했는데, 핵심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민 12:2). 모세와 자신들을 비교하는 질투심의 문제가 개입된 사건이었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고핫의 손자 고라를 중심으로 250여명의 지도자들의 집단 반역 사건을 보게 됩니다(민 16).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 16:3)” 모세와 아론도 고핫 자손이었고 고라는 이들과 사촌지간의 사람이었으니 여기서도 고핫의 질투가 작용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질투심은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문제를 많이 다루는 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이 문제로 인해서 넘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적용할 점을 이렇게 제시하고 본문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2. 질투심을 유발할 수 있는 이슈들
A. 레위 지파는 전쟁(군복무) 면제를 받아서 좋겠다?
3장에서 한 달 이상 된 레위 지파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4장에서 30세에서 50세까지의 남자 레위인을 계수하라고 하십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민수기 8:24~25을 보면 회막에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25세에서 50세라고 되어있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25세에서 30세가 되기까지는 견습기간을 가지고 30세부터 정식으로 회막의 일을 감당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대 랍비들의 설명입니다. 둘째는 민수기 4장이 성막을 옮기는 임무에 관련한 언급이라면, 8장에서는 성막에서 제사의 업무를 보는 것과 관련한 내용이라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다윗은 레위 지파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를 20세로 낮추게 됩니다(대상 23:24). 이것은 성전이 세워지게 되자 성막의 기구들을 메는 업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대상 23:26)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늘어난 업무를 예상하고 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계수하라고 할 때, 나이 외에도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것은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였습니다(1:3). 그런데 여기 레위지파를 계수하는 조건도 있습니다. 그것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만한 모든 자’입니다(4:3). 이 표현은 23절과 30절에도 각각 반복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계수할 때 사용했던 ‘싸움(전쟁)’이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레위 지파에게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역사’입니다(23,30절에서는 ‘복무’). 즉, 레위 지파는 전쟁의 의무에서 제외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성막에서 혹은 성막과 관련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이스라엘 지파들이 레위 지파가 전쟁에서 제외된다는 점 때문에 질투심이 발하여 “너희는 군복무를 하지 않고 전쟁도 싸우지 않았으니 너희는 이등 시민이다”하는 식으로 멸시할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일은 전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그들의 일은 다른 지파들이 하는 일에 비해서 결코 가볍지도 않았습니다. 성막의 일은 전쟁과 동일한 역할 수행이었습니다.
B.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하나 더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의 세 자손들의 임무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고핫 자손에 관한 것은 모세와 아론을 불러 말씀하셨으나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의 임무에 대해서는 단지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집계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17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하면서 게르손과 므라리 지파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특별히 고핫 자손의 일이 제사장들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과 사를 가늠하는 일이었기에 아론이 직접 들어야 하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라고 여길 수 있고 또는 그 일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도 사람들의 마음에 질투심을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됩니다. “왜 우리의 할 일을 말씀하실 때에는 아론을 부르지 않으시느냐?”하는 것이지요.
C. “우리는 왜 노가다냐?”
이번에는 므라리자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므라리 자손이 맡아야 하는 것들은 성소의 가장 주변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가장 무거운 품목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소위 노가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이 므라리 자손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공평하다! 우리는 왜 노가다냐?”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일입니다. 불편하고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고가 더 커 보이기 때문에 이런 불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 같이 광야교회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사실상 질투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3. 거룩함에는 정도가 있고 일에도 경중이 있다.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해야 하는 것은 본문이 가르치는 원리입니다. 그것은 거룩함에는 정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핫 자손이 맡은 것은 지성물이었습니다(4). 그리고 지성물 중에서도 지성소 안에 있던 증거궤와 성소의 진설병 상은 삼겹으로 포장을 했고, 성소에 있는 등잔대와 금제단은 각각 두 겹으로, 그리고 성막 뜰에 있던 놋제단은 한 겹으로 포장을 했습니다(5~14). 거룩할수록 더 많이 포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고핫 자손은 레위의 둘째 아들에 속하지만 지성물을 맡았기에 제일 먼저 언급되었고 그 다음으로 게르손 자손이 맡은 것이 성막의 모든 휘장들과 덮개들과 줄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므라리 자손이 맡게 되는 성막의 모든 널판이나 기둥 그리고 받침, 말뚝과 줄들보다는 더 거룩한 것에 속하는 것들이기에 그 다음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니 거룩함의 정도에 따라서 일의 경중도 결정된다는 것을 고핫, 게르손, 므라리의 순서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고핫 자손의 일은 제사장 중 첫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감독하에 있을 뿐 아니라, 엘르아살은 등유, 향품과 소제물 그리고 관유와 성막 전체의 기구를 총괄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17). 아론의 막내 아들인 이다말은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의 일을 감독함으로써 형인 엘르아살보다는 무게가 떨어지는 일을 맡았습니다(28,33). 우리는 거룩함에 있어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경중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사소한 부르심은 없다.
그렇다면 거룩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경중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질투심이나 시기심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단순히 이런 사실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잠재우지는 못합니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런 질투심에 유발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성경의 원리에 무지하거나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도리어 더 잘 알고, 더 많이 배운 사람들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매년 섬길 사람들을 임명하는 과정에서나, 직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명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사소한 부르심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사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해당되는 말입니다. 천하의 주권자를 섬기는 일에는 작고 사소한 것이 없습니다. 거룩함의 정도의 차이도 있고 일의 경중의 차이도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하찮은 것이나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A. 섬기는 대상이 섬김의 가치를 결정한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사소한 것이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술관원 즉 웨이터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의 웨이터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국의 왕인 아닥사스다의 웨이터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느헤미아를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왕의 웨이터였기 때문입니다. 가령, 므라리 자손이 감당해야 하는 일은 그냥 ‘노가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를 섬기는 노가다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루는 물건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노가다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성막을 섬기는 노가다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섬기는 대상이 그 섬김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질투심이나 시기심으로 쓸데 없는 불평을 하지 않고 자족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로 섬기는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섬김이 작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이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우리와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질투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비슷한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B. 은사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소한 부르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이다말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건축할 때 이다말에게 주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8:21입니다.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물목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모세의 명령대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이다말이 그런 은사를 가진 인물이었음과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따라서 그에게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의 우리의 섬김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은사를 따라서 되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은사에는 하찮거나 사소한 것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2:20~27에 보지요.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원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는 하찮거나 사소한 지체는 없습니다. 므라리 자손이 하는 일이 가장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들이 맡은 성막의 부분들이 없다면 성막은 결코 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소한 부르심은 없습니다.
C. 달란트의 차등(마 25)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달란트 비유를 기억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다섯, 둘, 하나씩의 달란트를 나눠주었습니다. 차등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이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일을 맡겨주십니다. 이것이 사실 공평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맡겼던 것만큼을 요구하십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 달란트의 차등은 오히려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평하신 조치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부르심은 없습니다.
5. 모든 레위 지파가 다 함께 수고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고핫 자손이냐, 게르손 자손이냐, 아니면 므라리 자손이냐에 관계없이 레위 지파로서 30세부터 50세까지 성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 만한 모든 사람이 계수되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고핫 자손이 2,750명, 게르손 자손이 2,630명, 므라리 자손이 3,200명으로 도합 8,580명이었고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함께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교회를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로 훈련시키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일, 거기에 작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또 우리 인생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일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시험에 들기 쉽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질투심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신자들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에 맡겨주신 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교회에서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괜한 질투심이나 시기심의 발동으로 자신의 인생과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 평생에 주를 섬길 때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그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은 믿음 위에 여러분의 인생을 잘 건축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강건하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