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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7) - 위험한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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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7) - 위험한 부르심

민수기 4:1-2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2-09

말씀내용
민수기 3장과 4장은 레위 지파의 인구조사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진영에서 어떤 위치에 진을 쳐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들을 포함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하는 구속적 의미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사실을 상고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은 그들을 대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쳐지심으로써 살아난 자들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 스스로가 바쳐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 살피고자 하는 것은 레위 지파 사람들 특별히 고핫 자손이 부름을 받은 일이 얼마나 위험한 부르심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위험한 부르심, 위험한 사역
오늘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곳곳에 들어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단일민족이고 단일문화만을 고수하고 살아온 한국사회의 풍속도도 참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하는 업종이 대부분 3D라 불리는 업종들입니다. 말그대로 위험하고(Dagerous) 더럽고(Dirty) 힘든(Difficult) 일들입니다. 제가 1995년에 안식년으로 귀국해서 안산에 있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아주 열심인 형제 하나가 예배를 마치고 악수를 하는데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 검지 손가락이 잘린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언제든 손가락이나 손 자체가 잘려나갈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때 뼛속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에게 맡겨진 일이 그와 같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손가락이나 손이 절단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 즉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로 그들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17~20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너희는 고핫 족속의 지파를 레위인 중에서 끊어지게 하지 말지니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할 일과 그가 멜 것을 지휘하게 할지니라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15절에도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라고 말씀했으니, 고핫 자손은 성물을 보거나 만지게 되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핫 자손이 다 죽임을 당하여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특별히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위험한 부르심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2. 지성물을 다루라는 부르심
야곱의 아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순서대로, 게르손, 고핫 그리고 므라리입니다. 이 아들들은 각각 자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3장에서 한 달 이상의 레위 지파를 계수할 때 게르손, 고핫 그리고 므라리의 순서대로 나옵니다(민 3:21~37). 그런데 4장에서는 둘째인 고핫 자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 이유는 아마 고핫 자손이 담당해야 하는 일이 성막의 지성물에 대한 것이었기에 그럴 것입니다. 4절을 보지요. “고핫 자손이 회막 안의 지성물에 대하여 할 일은 이러하니라.” 지성물의 문자적 의미는 ‘거룩한 것 중의 거룩한 것’입니다. 성막에 관한 모든 것이 다 거룩합니다. 그러나 성막의 많은 기구들과 작은 부품들 중에서도 고핫 자손에게 맡겨진 것은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성막 뜰에 있는 기구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이 지성물들이라고 불립니다. 고핫 자손이 지성물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주의가 요구될 뿐 아니라 위험도 따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고핫 자손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진할 때 지성물을 운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옮겨야 하는 지성물을 직접 보거나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먼저 지성소에 들어가서 지성소와 성소를 막는 휘장(‘칸 막는 휘장’)을 걷어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서 볼 수 있을 증거궤(언약궤)를 덮고 또 해달 가죽으로 덮고 마지막으로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채를 꿰면 그때 비로소 고핫 자손이 증거궤를 들어올리게 됩니다(15). 성소와 성막 뜰에 있는 모든 기구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같은 방식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포장이 되었을 때 고핫 자손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물은 직접 만져서는 안 되었고 특히 지성소는 물론 성소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본문을 읽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업무에 대한 지시 내용이 아주 자세하고 세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고핫 자손에게는 얼마나 주의 깊게 읽고 또 읽어서 제대로 익혀야만 하는 말씀이었을까요? 자신들의 삶과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저는 조립을 해야 하는 물건을 구입했을 때 조립하는 방법을 대충 써놓은 물건을 보면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것이 고가의 물건이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괜히 잘못 조립하면 망가질 수도 있고 다시 분해하고 조립하는데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소 길어도 자세하고 친절하게 조립 방법을 설명해준 것이 제게는 최고입니다. 고핫 자손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대충의 지침만 주어져있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서 충분하고도 명확하게 설명해 놓았다는 점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 인간의 구원, 그리고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경륜이 성경 안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든지 혹은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1장 6항).”
3. 지성물로 인해 죽은 사람들
죽을 수 있다는 경고는 하나님께서 과장법을 써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죽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것만 아니라(레 10) 벧세메스 사람들이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언약궤의 속을 들여다 본고로 집단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삼상 6:19). 이때 살아남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삼상 6:20).”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이후에 다윗 시대에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를 싣고 오던 소가 뛰는 바람에 넘어질 뻔한 언약궤를 손으로 붙잡음으로써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이 고귀한 생명들이 죽는 사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섭다! 하나님은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는가?”라고 말합니다. 이런 질문들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일들이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4.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8~9).” 이스라엘 백성이 지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실 성소’였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의 쫓겨남이었습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는 명백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자기 백성에게 다시 찾아와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처소가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와 신화가 말하는 신들의 존재는 거룩해서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초월자이든가 아니면 인간과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초월하거나 내재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속성을 가진 신들입니다. 가령, 이슬람의 알라는 초월자로 묘사되지만 반면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우리 문화가 창출해내는 종교적 신은 인간과 유사한, 혹은 친구처럼 안전하고 길들여질 수 있는 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경만은 거룩하신 초월자인 동시에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셔서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저는 C.S.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에서 비버 부부를 통해서 루시에게 아슬란을 묘사한 것이 하나님을 묘사한 가장 탁월한 설명 중 하나라고 여깁니다.
“그, 그는 사람이죠?”하고 루시가 물었다.
“아슬란이 사람이라! 분명히 아니지. 그가 숲속의 왕이며 저 바다 너머의 위대한 왕의 아들이라고 말했잖니. 누가 동물의 왕인지 모르겠니? 아슬란은 사자란다. 사자, 위대한 사자란 말이다.”라고 비버씨가 엄하게 말했다.
“우와! 나는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위험하지 않은가요? 난 사자를 만나면 좀 무서워요.”라고 수잔이 말했다.
“얘야, 아마 넌 분명히 그럴거다. 그리고 아슬란 앞에 무릎을 덜덜 떨지 않고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가장 용감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단지 바보일거다”하고 비버 부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는 위험한가요?”라고 루시가 물었다.
“위험? 넌 비버 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니? 누가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든? 물론 그는 위험하단다. 그렇지만 그는 선하단다. 그는 왕이란 말이야”라고 비버씨가 말했다.
위험하지만 선하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C,S.루이스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길들여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고대의 우상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성막이나 언약궤를 하나님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다루어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서 어떤 형상으로도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비록 지성물과 성물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만, 그 자체는 하나님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성물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해야 했고 그래서 고핫 자손의 임무는 유난히 위험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막의 존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정도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그들도 거룩해질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여겨야만 했습니다. 특별히 고핫 자손의 부르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부르심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큰 은혜로 경험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던 그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피조물을 심판하실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가볍게 여길 수도 없을 것이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쉽고 편한 대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명령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5. 신약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
지성물을 다루어야 하는 고핫 자손의 부르심은 실로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죽을 수 있는 위험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성물을 보거나 만지기만 해도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이어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라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셨고 비추어주셨습니다. 신약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영광을 누립니다.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보고 죽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준 구세주의 이름은 예수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실 것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어떻게 성막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다루던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죄인 가운데 오셔서 그들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보고도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비밀이 성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구절에서 ‘거하시매’라는 단어는 특별히 중요합니다. 이 단어가 ‘장막(성막)을 치고 거하신다’는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는 특별한 어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임시적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믿는 자들은 그의 육신에 가려진 영광을 봅니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요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육신이라는 신비 아래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려고 당신의 영광을 육신 안에 감추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어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고백했습니다(요 1:18). 하나님의 은혜, 오직 은혜이고 은혜일 뿐입니다.
6.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
그렇다면 이 은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어떤 일이 그들에게 일어납니까? 그 은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는 은혜는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시킵니다. 은혜 위에 은혜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 만이 죄인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지만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그는 알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가 누리는 영광이요, 은혜입니다.
7. 여전히 위험한 부르심은 존재한다.
우리는 실로 얼마나 복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인지를 아시고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마다 그런 감사함과 감격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말씀을 맺기 전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핫 자손은 사라졌고 그들의 임무는 지금은 필요하지 않지만, 여전히 특별한 의미에서 위험한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년 전 폴 트립이 쓴 『목회, 위험한 소명』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목사님들과 그 가정들이 목회 사역 가운데 경험한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목회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며칠 전, 미국의 필립 와그너(Philip Wagner) 목사가 쓴 ‘목회자의 비밀스러운 고통(Secret Life of a Pastor)’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는 바나그룹의 조사를 인용하여, 미국 내 85% 이상의 교회가 200명 미만의 교회이며, 미국 교회들의 평균 교인수는 89명으로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며 이런 환경 속에서 90% 이상의 목회자가 사역자가 되기 전 본인이 생각했던 목회와 현실은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70% 이상의 목회자는 너무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미국에서 매년 4000개의 교회가 개척되지만 반면 7000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현실과 작년 평균 매달 1700명의 목회자가 사역을 그만두었으며 70%의 목회자는 친한 친구가 없다고 고백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경험하는 주요 스트레스 요인은 다수의 교인으로부터 받는 비판들, 교인들이 교회가 작다고 떠나려 하거나 각종 이유로 교회를 안 나올 때 받는 거절감, 믿었던 교인이나 장로로부터 받는 배신감, 목회자로서 겪는 외로움, 목회자로서 갖는 소명에 대한 불확신과 지침, 그리고 낮은 사례비로 인해 겪는 경제적 어려움 등을 꼽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을 위해서 낯선 이국 땅에 나가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정신과 의사로서 선교사를 했던 매조리 포일은 『영광스러운 상처』라는 책을 썼습니다. 요지는 선교사들이 겪게 되는 이런 저런 상처들, 특히 우울증이나 기타 정신적인 질환들은 그들이 선교사로 영적 전장에 나갔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다친 영광스러운 상처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을 인하여 얻게 된 상처들입니다. 이점에서 선교사로의 부르심 또한 위험한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섬겼던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광주에 와서 만나게 된 신실한 개척교회 목사님들과 매주일 모여서 공부와 교제를 나눕니다. 모두가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목회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위험을 감당하게 할 뿐 아니라 기쁘게 감당하게 하는 길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20대 초반에 영국 런던의 중심가에서 장래가 보장된 영국 왕립협회의 의사로서 이미 출세했던 로이드존스가 그 직업의 영광을 버리고 영국의 외딴 웨일즈의 시골 전도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삶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과 미디어들은 그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떠들어 댔지만, 정작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누구든 복음의 사자로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위험한 부르심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남아 있지만, 그 위험은 고핫 자손에게 그랬듯이 영광스러운 위험이고, 영광스러움이 보장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많은 주의 종들을 알아야 하고 또 그 목양을 받는 주의 백성들 또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워나가는 주의 백성들뿐 아니라 위험한 부르심인 줄 알고도 그 영광스러움을 알기에 감사와 기쁨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를 섬기는 주의 종들이 이 땅에 점점 더 많아지기를 바라고, 우리 벧샬롬교회에서 여러분과 제가 또한 그 영광의 길을 걸어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