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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 - 정위치로! 질서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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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 - 정위치로! 질서의 하나님

민수기 1:47~2:3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1-25

말씀내용
인구 조사는 20일이 걸리지 않아서 마쳤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라는 명령은 애굽에서 나온지 둘째 해 둘째달 첫째 날에 모세에게 주어졌고(1:1) 모세는 당일에 조사를 시작하여(1:18) 마친 후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떠올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시작하였다고(10:11)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20세 이상의 남자만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인 집단의 인구 조사가 이렇게 빨리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미 상당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예 집단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산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 아래서 상당한 질서를 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발하기에 앞서 아주 분명한 질서를 갖추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질서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1. 질서의 하나님(고전 14:33,40; 골 2:5; 살후 3: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쓴 첫 번째 편지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썼습니다(고전 14:33). 고린도교회가 무질서한 은사 사용으로 말미암아 무질서한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 14:40). 하나님께서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지만 특별히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창조의 순서와 그 배열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는 일정한 체계가 있고 하나님의 부성애가 어린 배려가 나타납니다. 먼저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첫째 날에 빛과 어두움을, 둘째 날에 물과 하늘을, 셋째 날에 비옥한 땅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공간입니다. 이제 그 공간을 채우십니다. 넷째 날에 낮과 밤을 주관하는 광명체들을, 다섯째 날에 물고기와 새들을, 여섯째 날에 땅의 짐승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한 곳이 질서정연한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질서의 성향과 능력을 가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도 얼마나 질서가 정연합니까? 단지 그 능력과 예지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질서가 종종 파괴와 혼돈으로 망가지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경험합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교회에게도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본다”고 썼습니다(골 2:5).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이런 질서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는 진영에 머물 때 어떤 진을 형성하고 머물러야 하는지, 그리고 행군을 할 때 어떤 진을 만들어 행군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우 분명하게 명령하고 지시하십니다. 사실상 오합지졸이 되기 십상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령으로 말미암아 질서정연한 군대처럼 조직되고 정비됩니다. 이 대열이 이제 40년의 광야여정 동안에 이스라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2. 레위 지파의 구별(1:47~54):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인구 조사를 명하실 때, 레위 지파는 그 계수에 들지 않았습니다(1:47).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신 것이 1:50~53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위한 징집에서 면제되는 대신, 평생을 하나님의 성막의 관리와 운반 책임뿐 아니라 성소에서 봉사해야 하는 직임을 맡았습니다. 성막은 지어진 지 불과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성막이 세워질 때, 백성들은 구름이 회막(성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출 40:34).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의 종류와 규례들을 자세하게 배웠습니다(레 1~7). 그리고 7일에 걸쳐서 아론과 그의 네 아들들이 제사장의 위임을 받았습니다(레 8). 그리고나서 성경은 한 가지, 제사장/레위인의 직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으로 위임 받았던 아론의 장자와 차자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을 하려다가 성소 안에서 즉사하였습니다(레 10). 이 사건은 장차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큰 경고가 되었고 물론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함부로 자기들의 생각에 좋은 대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배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임무와 관련해서 특별히 본문 1:50~51에 언급됩니다.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라는 말씀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불과 지난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레위 지파에게 이런 말씀은 무섭고 엄중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보통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성막과 관련하여 레위 지파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같은 위치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막의 모든 기구를 관장할 뿐 아니라, 성막 주위에 진을 침으로써 성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성막에 다가옴으로써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지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레위인의 위치와 책임은 1:53이 잘 보여줍니다.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이렇게 제사장뿐 아니라 레위 지파를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로 특별하게 구별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3. 성막의 위치: “하나님의 임재가 생명이다!”
성막의 위치는 단순히 레위인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2:2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어떻게 진영 가운데 위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 진영 전체의 중심에 성막이 위치하는 것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그 사방에 레위인들이 진을 치고, 그 다음의 사방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기 세 지파가 한 부대를 이루어서 진을 치게 되는 형태입니다. 이 진영 형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너희의 생명이다”하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힘과 능력과 지혜는 모두 그들 중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성막으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언약의 내용을 성막과 그 위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날마다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모든 민족과 구별될 수 있는 특징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 형태 속에서 그대로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출 33:1~4).” 이 말씀 앞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또 구합니다. 이때 모세가 한 기도는 그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너무나 잘 알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출애굽기 33:16입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로 자기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신 것입니다.
4.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다.
성막이 그들 중심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논리적 귀결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 전부는 그들 중심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신약 백성들의 삶과 동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라고 하는 특별한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아침과 저녁에 드려지는 상번제, 안식일의 예배, 월삭과 절기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제사는 어떤 특별한 순간에 드려지는 어떤 특별한 행사로 여겨질 수 없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제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이스라엘의 삶은 제사 중심의 삶이었고 거기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정말 아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가? 구약의 백성들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물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자 하시는 그 선하신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에게는 가장 큰 기쁨과 감격이기 때문입니다.
5. 각 지파들의 진영 위치와 행군 순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2장 전체는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열 두 지파의 진영에서의 위치와 행군할 때의 순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에서 우리는 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세 지파가 한 부대를 형성하여 서게 되는데, 동쪽이 가장 우선적으로 행군하는 소위 앞선 서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순서는 동?남?서?북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야곱)의 장자와 차자가 동쪽에 와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쪽의 세 지파에서 장자인 르우벤과 차자인 시므온을 만나지 못합니다. 셋째인 레위 지파를 건너뛰면 넷째 아들인 유다의 지파가 장자 지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 모두 레아가 야곱에게 나은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르우벤과 시므온은 두번째 부대인 남쪽에 갓 지파와 함께 위치하게 됩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을지라도 아버지의 첩인 빌하를 통간함으로써 나중에 야곱의 축복에서 장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됩니다(창 49:3~4). 그리고 둘째 시므온은 셋째인 레위와 함께 세겜에서의 살륙에 적극 가담한 일로 역시 장자권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창 49:5~7). 결국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장자의 명분이 주어집니다(창 49:8~12). 이런 연유로 동쪽에 위치하는 첫 번째 부대는 유다 지파가 통솔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유다 자신도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요셉에게 두 번째로 가야 할 때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면서 자기가 베냐민을 담보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베냐민이 애굽에서 요셉의 은잔을 훔친 자로 지목을 당했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죄값을 받겠노라고 말한 것은 은혜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유다 지파는 열 두 지파 가운데 성막 동쪽의 위치를 점했을 뿐 아니라, 행군할 때에는 전체 대열에서 선두를 점하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어떻습니떤끼? 그는 시므온과 함께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는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까(창 49:7)?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저주대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다 지파의 영토 안에 영토을 얻어서 살다가 흩어짐으로써 사라져버린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자기의 기업을 받지 못함으로써 온 이스라엘에 흩어져 살았으나(이것도 예언의 성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축복이 되는 존재로 성취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정론적인 저주와 운명론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이치입니다.
6. 질서를 깨는 죄
인구조사를 마친 후, 각 지파별로 진에 머물 때와 행군할 때 그들이 자리해야 하는 위치를 각각 정확하게 지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셨고 이스라엘은 질서 있는 백성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사건은 본질적으로 이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것, 레위 지파를 성막을 담당하도록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은 바로 이 질서를 깨뜨리는 반역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엄히 다루셨고 다시 아론의 제사장직을 신비한 방식으로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질서를 회복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세우신 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패역한 반역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16장과 17장을 다룰 때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1:54; 2:34)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1:54과 2:34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1:5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2:3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질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질서가 생깁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 내면 세계와 우리의 삶 전체가 질서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난장판과 같았던 우리 내면의 세계가 비로소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교회가 될 때 교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 질서를 만들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여정에 있었다면, 우리는 하늘 가는 천로역정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이 사실상 광야 교회로 대변되는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광야라는 이 과도기를 벗어나게 되면 그 때에는 질서 있게 제도를 세우고 잘 해나갈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자리가 광야이건 가나안이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순종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만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바로 이것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갖 지혜가 이런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의 시장바닥과 같이 소란하고 복잡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이런 질문들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에 거하시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가? 우리는 그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우리 삶의 전부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되도록 교회 생활과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우리가 예라고 답하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다고 인정해주시는 그런 복된 은혜가 우리 벧샬롬 공동체 가운데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