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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3) - 광야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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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3) - 광야에서3

민수기 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1-11

말씀내용
1. 광야는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곳이다.
오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의 세월을 보냈던 그 광야의 특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곳입니다. 수년 전 튤리안 차비진은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Jesus + nothing = Everything (『Jesus All 예수로 충분합니다』 두란노 간)이란 책입니다. 원 제목 자체가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할 뿐 아니라 광야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광야는 분명히 그들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도 있을 많은 것들을 충분하게 공급해주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어느 때, 그 어느 장소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일생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다다익선’의 가치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배우는 것은 모든 것이 있어도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성경을 통하여 머리로 알던 것을 광야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에 가슴과 삶으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의 삶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4).” 하나님께서는 만나로 먹이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는 기적을 베푸셨고, 만나를 통하여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공급하심으로써 광야를 걷고 또 걷는 동안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광야의 길 안내, 음식과 음료의 공급, 전쟁의 승리, 의식주의 필요,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철저하게 배우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들은 비록 보장된 것은 없었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이 계셨기에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민수기, 광야교회의 백성들의 이야기를 상고하면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 광야는 유혹이 도사리는 장소다.
광야는 또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한 말처럼 들립니다. 오늘날 물질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걸 사라, 저걸 사라’하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실제로는 만족을 얻지를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서야 유혹이 많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원하는 많은 것을 결핍한 채 살아가야 하는 광야가 어떻게 유혹이 도사리는 장소일 수 있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심은 풍족하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결핍되었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에서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을 즐기며 그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고 숭배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민 25). 이것은 편안함과 안락함 그리고 풍요에 대한 그들의 바램을 걸어 넘어뜨린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없다고,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더 쉽게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족한다고 하는 것은 경건에 아주 중요한 조건입니다(딤전 6:6). 우리가 자족해야 한다고 권면을 받는 곳은 다름 아닌 인생이라는 광야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자족하는 마음이 없을 때,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과거를 미화하기 시작하며 또 사람들에게는 아주 인색한 사람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그들의 바램과 관계가 깊습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과 믿음이 들렀던 허영의 시장을 기억합니다. 이곳은 일년 내내 시장이 열리는 곳인데 유쾌함, 감각의 탐닉, 오락과 새로운 경험이 이 도시의 정신입니다. 그곳은 자기 중심적 이기적 사랑과 관능적 육감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 없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곳이 허영의 시장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광야와 연결시킬 때,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마 4:8~9; 눅 4:5~8).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소는 광야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곳에서 주님은 이미 40일 동안 주리셨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 자리를 찾아와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결핍을 경험하는 이때야말로 유혹으로 넘어뜨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동일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그들이 원하는 만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어느 때 누가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확실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의 마음에는 늘 이 싸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고, 하나님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만나게 되는 유혹의 본질입니다. 천로역정에서 허영의 시장은 크리스찬이 떠나온 멸망의 도시와 가장 흡사한 곳입니다. 허영의 시장에서 크리스찬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는 자기가 떠나온 고향을 향할 소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순례 여정에 여전히 서 있지만 그 마음은 자기가 떠난 애굽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를 지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유혹이고 위협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독교와 교회를 떠나 예전의 종교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은 ‘하나님 없는’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위기가 아닐까요? 이점에서 민수기라는 광야의 이야기는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3. 광야는 격렬한 싸움의 장소다.
광야의 특징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전쟁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적을 만나게 될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먼 곳에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다가오는 미지의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서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일들에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전쟁을 익숙하게 치를 수 있는 군인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사실상 광야는 두려움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충분하게 배려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17을 보지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북쪽 해변길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행군하게 되면 길은 가깝지만 흉악한 블레셋 군인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길임을 아셨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녹일 것을 아셨기에 비록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나은 길로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보다 나은 길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정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신 절대 판단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구절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맞닥뜨린 상황은 앞으로는 홍해요, 뒤로는 그들을 추격해온 바로의 군대 사이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나서서 바로의 군대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온전히 싸우신다는 사실을 홍해를 건너면서 그리고 다시 흐르게 된 홍해 속에서 죽어가는 바로의 군대를 보면서 그들은 배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전쟁을 만나게 되는 상황은 출애굽기 17장에 등장하는 아말렉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승리를 주신다는 것은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서 직접 칼을 휘둘러 아말렉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난 첫 전쟁이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군대로 길러가셨습니다. 그 현장은 광야였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렇습니다. 광야는 훈련의 장소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전쟁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서신서들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을 마주 대하고 살아갑니다(엡 6:10이하; 벧전 5:8). 광야 같은 우리 인생에서 우리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대적이 몰려올지 알지 못하기에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을 것을 권면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마귀를 완전히 멸하시기까지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이것이 광야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성경의 경고입니다. 민수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보게 됩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도 이 전쟁의 요소를 결코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크리스찬이 아볼루온과 싸우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거대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함으로 싸우며 나아갈 것인가를 시험하는 싸움입니다. 이때 우리가 취하기 가장 쉬운 것은 싸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했습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거인 족속들을 대하여 가졌던 태도가 이것이었고 본질상 이것은 불신앙이며 이 불신앙은 그들을 하나님을 향한 대반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광야라는 인생에서 우리가 만나는 싸움은 피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이 광야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 싸움을 감당하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오늘날 만연한 번영신학은 이 광야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만나는 전쟁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력을 아시고 배려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걷는 우리의 인생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13:17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배려해주셨다는 것이 우리 인생길에서 고통이나 고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고통은 감당할 만한 것이다 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쓰는 가운데,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것을 알고 가셔야 합니다.
4. 광야는 시험의 장소다.
광야는 이렇게 고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에서 우리 인생을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늘 대면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형제 사랑,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의 갈등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내가 먹고 쓰고 남을 만큼의 자원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닙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기적의 음식인 만나를 먹었는데 만나 공급의 원리와 관련해서 성경은 아주 중요한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7~20).” 이렇게 만나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첫째 “내가 너희를 먹인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틀림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너희에게 만나를 하늘로부터 공급할 것이다.” 둘째, “탐욕을 부릴 필요 없다. 정한 양(일인당 한 오멜=2리터)만을 거두어라.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비같이(풍성하게) 내려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시험하려 하신 것입니다(출 16:4). 그 율법은 무엇입니까? 탐심의 문제(십계명의 열번째 계명)가 그 핵심에 있습니다. 탐심은 자기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율법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명합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 능력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신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이 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욕심을 부려봐야 그것은 썩어질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욕심을 부려 사두었다가 다 사용하지도 못한 채 상하거나 버리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광야를 사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간구입니다. “주님, 제가 일평생 걱정 없이 살만큼 재산을 충분히 허락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네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살지 말고, 오늘의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를 사는 백성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는 매일 40년 동안 한결같이 비같이 내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필요를 아시고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신 것, 하나님의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일 있을 나의 필요 때문에 오늘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광야는 제한되었다고 느끼는(실제는 아닙니다) 자원으로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자기를 사랑할 것인가 하는 시험을 받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세상의 방식에 순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색함! 이것이 광야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넘어서야 하는 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인색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은 그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관대함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자신의 성품과 행위와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할 소명을 안고 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관대함, 그리고 용납함의 여유를 배우십시오. 광야야말로 그것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5. 광야는 기대해야 하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정말 다이내믹한 곳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걸어야 합니다. 자신만만할 새가 없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낮추는 곳입니다(신 8:2).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한대로 광야에서 우리는 유혹에도 직면하고, 전쟁을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는 기대입니다. 저는 믿음의 기대라는 요소를 여기서 특별히 강조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두려움을 기대감으로 바꿉니다. 혹 지금 겪고 있는 일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소망으로 이 고통을 뚫고 지나갈 힘을 제공합니다. 유혹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싸움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그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을 소유한 것이 비교할 수 없는 행복임을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배우십시오. 전쟁을 맞닥뜨리면 두려워서 뒤로 물러가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전쟁을 싸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무엇을 지금 테스트하고 계시는지를 아십시오. 그것은 자기 사랑이냐, 이웃 사랑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매일 여러분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이 시험을 잘 통과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민수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길을 지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나는 곳은 비록 광야지만,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므로 주눅 들지 마시고,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고 당당하게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