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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2) - 광야에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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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2) - 광야에서2

민수기 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1-04

말씀내용
1. 광야는 우리의 천로역정
민수기는 광야의 이야기이고 3천 4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모든 세대의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영감하여 모세를 통하여 기록하여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의 천로역정은 사실상 광야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구원과 주님의 재림의 날에 완성될 구원의 사이에서 성도들이 살아가는 무대 또한 광야입니다. 광야는 종종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시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광야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곳, 낮에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느끼지만 밤만 되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열기와 함께 찾아오는 추위, 독사와 전갈 같은 위험뿐 아니라 모래바람과 싸워야 하고 목마름을 견뎌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이런 광야에서는 순간 순간이 도전일 뿐입니다. 광야에서는 보장된 것이 없습니다. 물이 있을 때 마셔야 하고 음식이 있을 때 먹어야 하며, 언제 다시 이런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지, 언제 이런 음식을 대하게 될지 보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런 광야의 삶에서 우리가 만나는 가장 큰 믿음의 도전과 유혹은 고단함에 지쳐 생각 속에서 목적지를 놓쳐버리는 것이라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지요. 광야를 걸어가는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순례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수기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교훈적인 책입니다.
2. 광야에서의 최대 유혹: 애굽으로의 회귀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는 애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사실을 아십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에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강에 산채로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비참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고된 노예 노동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2장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단면들입니다. 애굽에서의 삶은 곤고와 비참, 고통과 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출애굽을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광야 여정에서 백성들은 과거 애굽에서의 삶을 매우 환상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1:5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여기에는 기만이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편한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미화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애굽에서 ‘값없이’ 음식들을 먹었습니까? 그들은 채찍에 맞으며 고된 노예 노동을 통해서 간신히 연명해 왔을 뿐입니다. 그들은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와 마늘들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의 밥상에는 이 모든 것이 언제나 올라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만과 과장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현재의 고통과 불편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광야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만나를 먹는 것에 질렸다고 불평하면서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구를 표출하면서 과거 애굽에서의 삶을 미화하고 과장한 것입니다.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잠재되어 있던 이런 태도는 결국 지도자 한 사람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단체 행동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민수기 14:2~4을 보지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 표현이 가데아에서의 반역 사건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했으며 과거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삶, 비참한 노예의 삶을 하나님 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보다 더 좋아하고 갈망했습니다.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건데..” 혹은 “내가 예수님만 안 믿었어도 이건...”하는 아쉬움을 표현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이 말처럼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를 멸시하는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광야는 비록 고난과 위험이 있는 곳이지만, 결코 주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애굽의 삶과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말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 조차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과거를 미화하고 과대포장하는 기만적이고 과장적 요소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입니다(잠 26:11).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애굽으로의 복귀 욕구는 이 큰 구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이 자기가 살던 도시인 멸망의 도시를 떠나는 것으로 순례자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구원의 이야기는 떠남에서 시작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회심입니다. 그런데 다시 과거의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광야를 걸어가는 신자가 절대로 생각해서도 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광야에서의 불편함과 고통은 신자들로 하여금 애굽(과거)으로의 회귀 욕구가 아니라 장래 그들이 얻게 될 약속의 땅 곧 유업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인도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로역정>에서도 애굽으로 회귀해버리고 마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한 사람이 ‘온순’씨입니다. 그는 유약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일시적 믿음의 소유자로 어려움이 오면 중간에 신앙을 포기하는 자입니다(마 13:20~21). 하지만 때때로 그의 태도는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 그는 영적 실재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도중에도 계속해서 크리스찬에게 그 일에 대해서 계속 물음으로써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이 길을 가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크리스찬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썩지 아니하고 더럽혀지거나 쇠하지도 아니하는 기업(벧전 1:4,6; 히 11:6,16)’과 ‘영원히 멸하지 아니할 아름다운 왕국, 영원한 생명(사 45:17; 요 10:27~29)’이 약속되었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온순씨는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점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온순씨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무엇을 얻을까에 관심을 가지고 크리스천에게 묻습니다. 결국 그는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경험을 하자 돌아보지 않고 크리스찬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자기가 떠났던 곳 멸망의 도시로 되돌아갑니다. 번영의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일시적인 믿음에 그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번영의 복음은 온순과 같은 일시적 신자를 양산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대가, 져야 하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마 16:24).
광야는 애굽이 아닙니다. 아무리 광야가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자리라고 할지라도 그곳은 애굽과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와 안위를 경험하는 곳이며, 천국으로 가는 순례의 복된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애굽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삶이 고단하다고 해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유혹을 믿음으로 떨쳐버리는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3. 광야는 장래에 얻어 누릴 약속을 소망하는 장소다.
광야는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안주하기를 바라는 곳이 아니라 장래에 얻어 누릴 약속을 소망하는 여로(旅路)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교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고난과 과거의 안주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비교는 장래의 영원한 유업과 과거의 보잘것없고 썩어질 세상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지금 얻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얻을 소망을 가지고 걸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소망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감사가 과거에 속한 것이라면, 믿음은 본질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말씀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망-믿음’이 광야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랬거니와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또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중국 개척 선교사였고 OMF를 세운 허드슨 테일러는 생전에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이런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나에게 / 땅위에 그 무슨 안식 있으리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 이 땅에서 그 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 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그분 / 그 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직 아니리 /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이것이야말로 장래의 약속을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광야의 여정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성도의 마땅한 마음 자세입니다. 광야는 과거로의 회귀의 유혹을 믿음으로 이기고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4. 온순 씨가 주는 교훈
오늘 우리는 광야 여정에서 신자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영역은 바로 과거로의 회귀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20세 이상의 성인으로서 애굽에서 나온 모든 자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시고 정탐꾼들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런 태도가 얼마나 불신앙적이며 선하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한 온순씨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음으로써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천국의 복락에 대해서 들을 때 기뻐했지만, 문제는 죄를 인식하는 성령의 사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크리스찬이 지고 가는 짐에 대해서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상과 느낌에 의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 기적을 보고 흥분한 광야의 백성들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영적 감정과 태도를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사랑하지 않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사람(목사)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뵙지 못하니 온순 씨는 크리스찬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대답을 들었지만, 여전히 크리스찬이 믿는 ‘그 책’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출애굽시키신 구원의 하나님을 직접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인 모세만을 보고 광야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여기서는 넘어질 수 밖에 없고 결국 어려움 앞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섬긴 일이나(출 32)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 등은 다 이것과 관련이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앙 좋은 사람이나 지도자와 맺는 관계, 그와 시간을 가지는 것이 내 신앙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면 그 신앙은 진위를 의심해보아야 하며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 아무리 많은 신앙적이고 영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또 바르고 성경적인 대답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삶이 없다면 그 신앙은 실체가 없는 신앙일 수 있고 어려움 앞에서 넘어지기가 대단히 쉬운 것입니다.
셋째로, 대개 온순 씨와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되기 쉽고, 인간적 열심으로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온순 씨가 크리스찬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태도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참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전략에 관심을 쏟을 때 온순 씨와 같은 이들이 득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광야 여정에서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