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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 - 광야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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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 - 광야에서1

민수기 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1-01

말씀내용
1. 왜 ‘광야에서’인가?
민수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가장 인상적이지 않은 성경 중 하나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던 저에게 레위기를 지나서 만나는 민수기는 산 넘어 산으로 느껴졌습니다. 민수기에서 기억이 나는 말씀이 있는가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성경에서 어느 책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을 때 민수기라도 대답하는 것을 우리는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이 책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을 때(딤후 3:16) 민수기 역시 모든 성경에 포함된 말씀임은 자명합니다. 앞으로 수요예배에서 강해를 하게 될 민수기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사도의 이 말씀을 깊이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바랍니다.
‘민수기(民數記)’라는 제목은 ‘백성들의 인구수의 기록’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본래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주전 3세기의 근동지역의 공용어는 헬라어였습니다. 이때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히브리어를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세대가 생기기 시작했고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학자 72명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경’ 혹은 ‘70인역’이라고 알려진 헬라어 구약성경입니다. 70인경에서 ‘민수기’라는 책 제목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5세기에 번역되어 중세 시대에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여겨졌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역시 제목을 70인경에서 받아 그대로 ‘민수기’라고 붙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책의 제목은 처음에는 그 책의 첫 단어를 따라 ‘그가 말씀하셨다’라고 되어있다가 다섯 번째 단어인 ‘광야에서’가 이 책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낸다고 판단하여 변경한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민수기라는 제목은 사실 70인경과 벌게이트에서 온 것이고 본래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광야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 1장과 26장에 두 번에 걸친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조사가 나옵니다. 이 숫자들의 목록을 읽는 것은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인구조사는 민수기의 메시지를 담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메시지, 하나님께서 민수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민수기 강해의 여정을 떠나면서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을 준비하는 저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지적 이해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가난한 심령들에게 그 말씀을 조명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겸손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이 민수기,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을 따라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광야 교회 39년의 이야기
초대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순교하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광야 교회’라는 말을 썼습니다. 사도행전 7:38을 봅니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40년을 스데반은 ‘광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모세오경 중 네 권의 책이 직접적으로 광야교회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광야 교회의 탄생을 보여주는 광야 교회 첫 해 1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둘째 해 첫 한 달 동안의 이야기, 특별히 광야 교회의 거룩과 정결의 규례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민수기를 건너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40년째 11월에 시작하여 모세가 죽기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의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민수기는 40년의 광야 교회 기간의 대부분인 39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록이니, 시간적으로 보면 민수기가 광야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면, 민수기 1:1은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이라고 그 시점을 밝히고 있고 이것은 신명기가 시작하는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신 1:3) 이전까지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민수기가 다루는 39년의 광야 교회 기간의 대부분은 10:11~20:1 사이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3개월째 들어갈 때 시내산에 도착해서 약 1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성막을 지었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구별하여 세웠습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민수기 10:10까지가 이 1년 기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남은 39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 10:11~20:1에 담겼습니다. 여기서 13~14장에는 그 유명한 가데스 반역사건의 전모가 기록되어 있으니 15~19장 불과 다섯 장 안에 38년의 여정이 압축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3. 광야 교회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민수기는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고대 문서임에도 정말 정교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민수기를 연구한 학자들은 민수기의 구조에서 두 가지 형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지리적 기준이고 또 하나는 세대적 기준입니다. 이것은 둘 다 매우 의미 있고 의도적인 형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A. 지리적 구분
먼저 지리적 기준에 의한 형식을 보면, 민수기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은 1:1에서 10:10까지인데 시내산(광야)에서 출발준비를 하여 가데스까지 가는 여정입니다. 그 무대는 시내광야입니다. 두번째 무대는 바란 광야의 가데스로 여기서 모압 평지로 가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무서운 방황을 다루고 있습니다(10:11~22:1). 마지막은 모압 평지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22:2~36:13). 지리적 구분으로 보자면 민수기는 세 개의 무대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 무대는 모두 광야입니다.
B. 세대적 구분
두 번째로 민수기가 가지는 형식의 기준은 세대입니다. 광야교회 이야기는 두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일세대는 출애굽할 당시 20세 이상의 성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자녀 세대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따라 출애굽한 세대입니다. 일세대의 이야기가 1~25장에 기록되어있고 26장 이후는 이세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세대의 이야기에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일세대는 가데스에서의 반역으로 대표되는 불순종과 불신, 반역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세대입니다. 일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40년의 광야생활에서 죽었습니다. 이세대는 자기 부모들의 세대가 다 죽는 것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봐야 했습니다. 그것은 민수기 13~14장에 기록된 가데스의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26장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두 번째 인구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세대와는 아주 대조적인 광야 이세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전 부모들의 세대를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님께 신뢰와 순종으로 반응하는 세대였습니다.
i. 슬로브핫의 딸들의 믿음(27:1~11; 36:1~12)
그런데 여기 이세대의 이야기는 아주 기막힌 문학적 구성을 보여줍니다. 언뜻 보면 아주 어설프고 이상하게 끝나는 것이 이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이세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슬로브핫의 딸들입니다. 이들은 지파로는 요셉의 아들 므낫세 지파에 속하는데 그녀들의 아버지 슬로브핫은 아들 하나 없이 딸들만 남겨두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땅 분배 원칙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인들(딸들)에게는 분배와 상속권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었습니다. 분명히 자기들의 아버지 슬로브핫도 땅을 분배 받아야 하는데 딸들인 자신들이 분배에서 제외됨으로 대가 끊기고 기업이 끊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모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세대의 역사가 시작되는 27장이 그렇게 시작합니다. 모세는 이 사연을 하나님께 아뢰고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기업을 분배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렇게 일단락된 듯한데 민수기의 마지막 장인 36장에 가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속한 므낫세 지파의 지도자들이 다시 모세에게 찾아옵니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만일 다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그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분배 받은 기업이 조상의 기업에서 떨어져 다른 지파에게로 가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게 되는데,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으나 이 문제를 고려하여 같은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아주 이상한 결말입니다.
ii. 장래의 은혜에 대한 기대?기막힌 문학적 구성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가 광야 교회 이세대의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그녀들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정말 이상한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민수기를 기록하신 성령님의 놀라운 지혜를 드러내는 문학적 구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이세대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제 이세대의 인구조사가 막 끝났을 뿐입니다(26장). 이때 슬로브핫의 딸들이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비 뽑아 지파와 가족 별로 얻게 될 기업(땅)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아직 밟아보지도 않은 땅입니다. 왜 그녀들은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누구에게나 있는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까요? 그저 권리 주장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성경에 이런 방식으로 두 번이나 그녀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이유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요구를 긍정으로 응답하셔야 할 이유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어떤 이유이고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녀들은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모세에게 자기들도 딸들이지만 몫을 받게 해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그녀들은 믿음의 놀라운 특성인 장래의 은혜에 대한 소망, 기대를 표명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이 말하는 믿음의 정의가 그녀들에게 너무나 잘 맞지 않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또 자신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하게 될 경우, 자기들이 지파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분배 받은 기업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모세에게 물었습니다. 이 또한 그녀들이 자기들의 세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 자손 대대로 이어질 것을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단지 슬로브핫의 딸들이 말 많은 시끄러운 여자들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또는 땅분배가 아들 없이 딸만 있는 경우에 어떤 원칙으로 시행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의 행동이 이세대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대표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과 그녀들의 이야기가 이세대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세대는 이 여인들처럼 믿음의 세대였습니다. 자기들의 부모세대는 가나안 땅을 탐지한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불신앙과 패역함으로 반응하여 광야에서 죽거나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말하고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가겠다고 하나님께 반역을 행했던 세대였습니다. 이 반역으로 말미암아 일세대는 다 자신들이 말했던 대로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세대는 부모세대의 모습을 보면서 광야에서 자랐고 부모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봤고 불신과 불순종, 그리고 반역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이런 이세대의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기에 아주 적합한 믿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4. 광야는 우리의 천로역정
민수기는 광야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3천 4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기록하여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의 천로역정은 사실상 광야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구원은 성취되었지만 신자들은 여전히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이에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가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 교회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약속의 땅 사이를 걷는 순례자들이었다면 신자들 역시 순례자들입니다. 광야는 수많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우리의 믿음을 도전하는 시험과 유혹들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자신이 예측하고 계획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또 광야는 걷다 보면 고단함에 지쳐서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놓쳐버릴 수도 있는 곳입니다. 민수기는 이런 인생 여정을 가는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순례의 여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민수기는 그 어떤 성경보다 우리에게 실제적이고 교훈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민수기를 상고하면서 우리들이 걷는 천로역정에서 적용할 세 가지 교훈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유념하십시오.
A. 목적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광야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 안식일을 제외한 매일 어김없이 하늘에서 주어지는 만나의 공급, 반석을 깨뜨려 물을 얻는 것과 같은 많은 은혜로운 체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광야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여행은 즐겁지만 만일 40년 동안 집이 없이 여행만 해야 한다면 그 여행은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땅이 희미해지고 그 땅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일세대는 다 광야에서 죽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목적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고생 좀 덜 하고 사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한치의 땅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얻을 것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모세에게 나아갔던 슬로브핫의 딸들이야말로 목적지를 놓치지 않고 순례의 여정을 가는 복된 신자들을 대표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러분이 가야 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적지를 놓치지 마십시오.
B. 공동체에 결속하십시오.
광야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가 없고 따라서 지도도, 네비게이션도 없습니다. 민수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떨어지면 죽습니다. 공동체에 결속해야 삽니다. 혼자서 광야를 지나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만용일 뿐입니다. 믿음을 가진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천로역정이 정상적이고 안전한 여정이 되어 마침내 천국에 들어가게 되려면 여러분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저는 단순히 오늘날 사람들이 오해하는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일에 한 번 잠깐 모이고 흩어지는 개개인들이 아니라, 서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며 돌보아주고 책임을 나눌 줄 아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이고, 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 양떼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여전히 결속되지 않은 채 홀로 가는 자리에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아주 위험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교제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C.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광야는 우리가 예측하고 계산하고 계획한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예측불허의 삶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곳은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풍부한 자원이 있지 않고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과수원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저는 우리가 세월과 함께 나이가 더해갈수록 이것을 더 깊이 배워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무대가 광야라는 사실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않고서 광야의 여정을 더 걸어가는 것은 영적 자살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광야로 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교회로부터 1400여년이 지나서 그 약속의 땅에 예수님께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신 목적을 기도라고 말하기 보다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광야교회에서 실패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 예수님께서 다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을 상징하는 40일을 주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이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넘어뜨렸던 유혹자 마귀가 이제는 감히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도 실패했던 자리, 그리고 광야교회가 넘어졌던 그 자리, 그 광야에 오셔서 동일한 조건 속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고 물리치셨습니다. 무엇을 위함이고 누구를 위함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광야로 나가셨고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민수기에 나오는 실패의 이야기들,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인생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데 수많은 실패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광야에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능히 이기시되 우리를 위하여 이기시고 우리의 의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도 수많이 넘어지고 길을 잃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기에 우리는 날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남아있는 여정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신 일 위에서 보장된 천로역정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 광야 여정을 함께 걸어가라고 우리를 벧샬롬 공동체에 불러 모아주셨으니, 이 은혜를 귀히 여기고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광야 여정을 걸어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