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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7). 거룩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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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7). 거룩한 눈물

시편 119:129-136, 민수기 6:24-26, 마태복음 23:3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1-04

말씀내용
오늘 본문(129-136절)은 시편 119편의 17연입니다. 17연의 각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페(פ)로 시작합니다. 17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납니다. 앞의 일곱 절(129-135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탄이 주를 이루고, 마지막 절(136절)에서 시인을 눈물짓게 하는 일로 마칩니다.


1. 놀라움과 순종 (129,18,27; 사 9:6; 엡 3:18-19; 골 2:3; 렘 23:9)
먼저 129절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를 표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8).”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27).”
이 기도와 고백들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움을 경험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다고 여러분도 느끼십니까? 시인의 고백에 공감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 말씀의 맛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경험하셨다면, 공감할 것입니다. 놀랍다는 말은 특별하게 탁월해서, 쉽게 비교할 수 있는게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하고 가늠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기묘자(Wonderful Counselor)’라고 했습니다(사 9:6). 성경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놀랍고 탁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창조와 구원과 복음에 관한 말씀, 그 말씀의 기원과 가치와 능력과 특성이 실로 놀랍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였기에 시인은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27절).
사도 바울도 그 말씀의 놀라움을 경험했기에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8–19).” 또 골로새 교회에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놀라움을 말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로새서 2:3).”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놀라움의 결과입니다. 시인은 “주의 증거들이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의 놀라움에 대한 인정은 단지 지적 견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놀라움을 경험한 결과는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 말씀의 놀라운 가치를 인정한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예레미야 23: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 뼈가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움을 발견하고 떠는 사람은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130-131, 98-100; 사 57:15; 대하 36:12)
이어지는 130절은 시인이 말씀이 놀랍다고 말하는 이유를 한 가지 밝힙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130).” 말씀이 우둔한 사람으로 깨닫게 하여 지혜롭게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둔한 자를 지헤롭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하셨습니까? 오래도록 교회당에 앉아 있었지만 아직 이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임스 보이스의 말입니다. “당신이 이것이 사실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신이 성경을 실제로 연구하고 있지 않거나, 성경이 당신을 판단하게 하지 않고 당신 자신의 제한된 견해로 성경을 판단하면서 잘나고 헛된 마음가짐으로 성경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이사야 57:15).”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십니까?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드기야의 태도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역대하 36:12).” 시드기야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으며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의 지혜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지만 가르치고 판단하고 자기 말을 들어 주길 바라기 보다 항상 가르침을 받고 판단을 받으며 들으려고 하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계시된다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을 열면’이라는 표현에서 유목민들이 텐트의 가죽 덮개로 되어 있는 문을 제칠 때, 빛이 들어와 어두운 텐트 안을 환히 비추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방이라도 문이 열리고 강렬한 빛이 비추면 눈부시게 밝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방으로 들어오면 빛이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우둔한(simple) 사람은 자신의 절박한 필요를 알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확신에 찬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둔한 사람에게 비추어지면 그는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명철을 얻고 지혜로워 지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시인의 고백을 읽지 않았습니까?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98–100).”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이런 내적 증거의 사역이 없이 성경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목사와 회중에게 동시에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그 빛이 온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131절은 말씀에 대한 시인의 고백에 당연히 따라올 수 있는 반응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모하는 것입니까?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는 말은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나 짐승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헐떡였나이다’라는 말로 그는 거의 숨을 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열심, 즉 하나님의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겠다는 열렬한 열심을 표현합니다…이 태도는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알고 우리의 궁핍과 필요를 느끼면서 교훈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열렬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유념할 것은, 오늘날(16세기) 사람들은 다윗이 이 구절에서 주장하는 이런 유익과 감화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너무도 냉랭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욕구를 가진 자, 단지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가르침 받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가 백 명 중 한 명이나 발견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우리가 보는 것은. 즐기기 위한 하찮은 것들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련할 정도로 허영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 앞에 무언가를 내놓는 즉시 우리는 그 뒤를 좇으며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에서 이탈할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런 냉랭함을 볼 때. 여기서 다윗이 선포한 것처럼, 그런 열렬함을 향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과연 이 열렬함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가르침 받는 자들이 거의 없음으로 인해 놀라지 않나요? 그의 가르침에 대한 참된 욕구가 폐부까지 와 닿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인하여 말입니다.”
칼빈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없다고 할 때, 그 말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말씀의 빛 안에서 발견한 사람이 없다는 말과 같지 않겠습니까? 복음의 능력과 은혜는 이런 사람에게서 시작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3. 말씀에 의지하여 간구함 (132-134; 롬 8:28; 창 4:7; 롬 6:14)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해도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일정한 공식이나 법칙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132절). 여기서 ‘베푸시던 대로’라는 말은 판단, 결정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인데(מִשְׁפָּט), 습관이란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을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습관, 방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방식을 기억하십시오. 로마서에서도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그러나 이 또한 법칙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사랑하며 이 은혜를 늘 구해야 합니다.
이어서 시인이 구하는 것은 그 말씀의 능력으로 자신을 성결하게 지켜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133).” 가인에게 그랬듯이 죄가 문 밖에 웅크리고 삼키려는 자리에서도(창 4:7) 자신을 지켜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악의 지배에서 자신을 지켜주며 주의 길로 행하게 할 것입니다. 시인은 밖의 대적들과 안의 대적들(탐심, 욕망, 교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악도 신자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능력에 있지 않고 복음의 능력에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신자를 죄가 주관할 수 없습니다(롬 6:14).
율법은 죄를 자극하여 죄의 힘을 더 북돋을 뿐, 율법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가 우리를 더 조롱하고 이전보다 더 세력을 부리며 폭군처럼 굴게 됩니다. 오직 갈보리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죄를 새롭게 보고 죄를 혐오하게 만들며 두려움 없이 담대한 확신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숙고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죄를 이겨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수록 우리의 승리는 그만큼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지배력을 제어하는 능력을 계속 공급하시고 날마다 죄가 일어설 수 없도록 제압하실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기도한 시인은, 사람의 박해에서도 건져 주시길 구합니다. ‘사람의 박해’는 히브리어로는 문자적으로 ‘아담의 박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외부의 적대적인 사람들의 박해 뿐 아니라,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내면의 죄악된 본성으로 말미암은 박해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시인은 이 박해에서 건져 주시면 주의 법도들을 지키겠노라고 고백합니다.


4. 말씀과 주의 영광 (135; 민 6:24-26; 잠 16:15; 고후 3:18)
135절의 간구를 보십시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135).” 이 기도는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수기 6:24–26).”
하나님께서 빛나는 얼굴로 바라보시는 것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추상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고 자애로운 미소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를 “Smile on me, your servant.”라고 와 닿는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잠언에 “왕의 희색은 생명을 뜻하나니 그의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잠언 16:15).”라고 썼듯이, 주님의 웃는 얼굴을 뵈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깊은 낙담과 절망 속에서라도 일어날 힘을 단번에 얻게 될 것입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주님의 얼굴빛의 한 가닥 광선이 죄 있는 종에게 희미하게 나마 비취지면 그 광선은 일 천 세계의 영광을 능가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순례의 길을 걷는 발걸음에 힘을 얻으려면 이 소망을 항상 견지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빛의 한 가닥 광선을 보려면,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만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광선을, 그 얼굴 빛을, 웃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시인이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뵐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말씀 없이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5. 놀라는 만큼 눈물이 흐른다 (136; 벧후 2:7-8; 신 9:18-19; 삼상 15:11; 스 9:3-4; 행 17:16; 빌 3;18; 마 23:37; 5:4; 겔 9:4)
이렇게 그 말씀의 능력에 놀라움과 감탄을 표한 시인은 136절에서 자기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른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고백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 고백의 의미를 아는가, 공감하는가? 하나님의 얼굴 빛을 보면서 시인은 웁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슬픔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대한 열정적 사랑의 또 다른 면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워하는 만큼 사람들의 불순종에 대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얼굴 빛을 볼수록 이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고 비난하거나 정죄하기는 쉽지만, 그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로 경건한 슬픔, 거룩한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거룩한 눈물을 흘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우리는 소돔에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롯의 의로운 심령이 상한 것을 압니다(벧후 2:7-8).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긴 백성의 죄악을 인해 사십 주야를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신 9:18-19),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사울을 버리신 것을 알고 근심하며 온 밤을 부르짖었습니다(삼상 15:11). 학사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가나안 여인,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것을 알고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탄식했습니다(스 9:3-4). 사도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고(행 17:16),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빌 3:18).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룩한 눈물은 주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울며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이 눈물은 자기연민의 눈물이 아닙니다. 이 슬픔, 이 눈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는 사람만이 가지는 정서이고 눈물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4). 왜 그렇습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심판을 예고하는 중에, 심판을 면할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말합니다. 누가 심판을 면할 자입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에스겔 9:4).”
이 슬픔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정서의 표준입니다. 이 눈물은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백성의 구별된 특징입니다. 여러분이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는 이 거룩한 눈물이 있습니까?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이런 심정이 없으면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상태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안전합니까? 여러분에게는 이 거룩한 슬픔, 거룩한 눈물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