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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5). 말씀을 깨닫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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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5). 말씀을 깨닫는 마음

시편 119:33-40, 호세아 6:6, 예레미야 6: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5-04

말씀내용
우리가 읽은 119편의 다섯 번째 연의 여덟 구절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 ‘ה’로 시작합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영적 성장을 바라는 시인의 심정과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점 때문에 제임스 보이스는 본문의 제목을 “하나님의 학교에서(In God’s School)”라고 붙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나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좋은 지침들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기독교와 배움은 언제나 함께 해 왔습니다.” 이 말은 제임스 보이스가 본문 강해를 시작한 첫 문장입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학교나 학원과 동일시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나 가르침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가르침과 배움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가르침은 적어지고 즐거움을 주는 프로그램들은 많아지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거 유입되면서, 영적 식욕이 없는 사람들을 교회에 붙잡아 둘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성경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슬프고도 암담한 교회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겠습니다.


1. 신앙은 지식을 전제한다(33-34; 호 4:6; 6;6; 롬 10:1-3; 12:2)
신앙은 지식을 전제합니다. 지식이 없는 신앙은 설 수 없습니다. 신앙이 견고하려면 하나님을아는 지식이 견고해야 합니다. 물론 지식이 곧 신앙은 아니지만, 신앙은 지식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잘 모르는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잘 모르는 하나님 때문에 인생을 걸 수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신앙은 더 견고해지고, 그 하나님을 비로소 즐거워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33절에서 시인은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하고, 34절에서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앞에서도 몇 차례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12,26,27). 여기서 시인이 간구하는 것은 단순한 배움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목사의 교리강의를 들을 수 있고, 그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인의 마음과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진리의 능력은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조명하여 깨닫게 하시고 감동시켜 주실 때 나타납니다. 시인이 ‘가르치소서’라고 한 뒤에 다시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객관적 계시 이상의 실천적 감화를 원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구약 호세아 선지자의 지적과 똑같이(호 4:6),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지식이 없이 열심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잘못을 지적했습니다(롬 10:1-3).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기독교 교리를 삶에 적용하는 문단을 시작할 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분별하라는 요구는 마음 곧 지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성경을 배우셔야 합니다. 목사는 그 일을 위해 교회의 주인이신 주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입니다. 주일 공예배에서 설교를 듣는 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요기도회는 물론, 특히 금요학당에서 하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강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욕망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2. 영적 지식은 순종을 위한 지식이다(33-35; 딤후 3:15-16; 요일 2:5; 렘 6:16; 마 7:13-14).
신앙의 전제가 되는 지식은 단지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거나 삶과 무관한 이론이 아닙니다. 시인은 33절에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라고 말하고, 34절에서는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말씀을 배우려는 동기는 호기심이나 사람들의 인정, 또는 학자가 되려는 욕심이 아니라, 단순히 순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는대로 실천적 감화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복종시키는 순종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만드는 것입니다(딤후 3:15-16).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주는 유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놀라운 유익은 순종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한1서 2:5).”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믿음의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그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신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순종의 동기와 의지는 성경을 배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만일 순종의 의지가 없다면 성령님께서는 눈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는 그 길로 가지 않는 사람에게 누가 길을 가르쳐주는 수고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신앙은 자라납니다. 시인이 ‘끝까지’ 지키겠다, ‘전심으로’ 지키겠다고 하는 표현들은 순종을 향한 시인의 의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런 말입니다. “주님, 제가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제 안에서 역사하셔야 하며 주의 영으로 저를 가르치셔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마음입니까?
35절에서도 시인은 순종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 ‘주의 계명의 길’은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그 길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예레미야 6:16).” 선지자가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라고 표현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 좋은(선한) 것이고 옛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 길은 육신의 눈으로는 매력도 없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길에 있는 즐거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판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길은 주님의 말씀대로 좁은 길일지라도(마 7:13-14) 즐거운 길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데, 날마다 계속해서 부어지는 은혜가 없다면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날마다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향하려면, 날마다 새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죄의 본성이 고개를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가 날마다 주어질 때, 그 길을 걷는 것은 시인의 고백처럼 즐거운 길이 됩니다. 찬송가 430장의 1절 가사도 동일한 고백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3. 마음과 눈의 우상들 (36-38; 왕상 21:1-13; 수 7:21; 요 12:6; 마 26:14-16; 왕하 5:20-26; 마 19:21-22; 행 5:1-11; 딤후 4:10; 막 4:19; 마 9:9; 눅 19:1-10; 민 15:38-39; 욥 31:1; 마 5:28; 삼하 11:2; 골 3:2; 히 2:9; 12:2)
하지만 이 길은 험한 길입니다. 유혹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36절에서 시인은 마음이 탐욕이 아닌 주의 말씀을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37절에서는 눈이 허탄한 것들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시인이 기도했듯이, 마음과 눈의 우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음이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라는 간구에서, 탐욕은 불의하고 부당한 이득을 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말씀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요. 그 마음은 단순히 지식이 모자라거나 히브리어, 헬라어와 같은 성경 원어를 모르는 마음이 아닙니다. 또 피곤하여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우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우상 중 대표적인 것은 물질, 곧 돈의 우상입니다.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기를 원한다면, 물질의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돈과 물질의 우상을 경계하는 경고들로 가득하고 그 우상에 넘어진 사람들도 적잖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나봇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왕상 21:1-13), 아간도 도둑질을 해서 저주의 죽음을 죽었습니다(수 7:21). 가룟 유다는 돈궤에서 도둑질을 했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요 12:6; 마 26:14-16).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나(왕하 5:20-26) 부자 청년(마 19:21-22),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데마는 모두 탐욕으로 넘어진 사람들입니다(딤후 4:10).
많이 배우지만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돈의 우상 떄문입니다. 주님께서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마가복음 4:19).” 주님의 구원 사건이 돈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세리들, 마태와 삭개오를 그 돈의 우상으로부터 어떻게 건져주었는지를 우리는 압니다(마 9:9; 눅 19:1-10). 구원의 은혜는 이렇게 주인을 바꾸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두번째로 눈의 우상을 시인은 언급합니다. 37절에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라고 구합니다. 눈—시선을 지키는 것은 곧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모세의 율법에서 ‘눈으로 볼 것들’을 이렇게 제공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민수기 15:38–39).” 시선을 영적인 것들에 두라는 교훈입니다.
눈은 중요합니다. 욥이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기 31:1).”고 말한 것은, 눈이 어떻게 신앙을 무너지게 하는지를 그가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고 하심으로써 눈의 우상을 경계하셨습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눈을 관리하지 못해서 무너졌습니다. 만일, 이 시편을 다윗이 썼다면, 그는 이 구절을 쓸 때 아마 자신이 눈으로 범죄했던 그 일을 회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사무엘하 11:2).” 그의 무서운 연속 범죄는 눈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허탄한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허탄한 것을 그저 바라봄으로써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허탄한 것’입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가치 없는 것’을 가리키는데, 결국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들입니다. 눈의 우상은 겉으로는 화려한 무언가를 약속하지만 내세까지 지속될 가치는 전혀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공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허영의 시장’을 지나는 순레자들이 바로 이 구절로 기도했다고 묘사합니다. “시장의 상인들이 이 두 순례자를 불쾌하게 여긴 까닭은 이들이 시장에 쌓인 온갖 허영의 물건들을 경시하여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이 좀 물건을 팔아 달라고 그들을 부르기라도 하면 순례자들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내 눈을 돌이켜 허망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시 119:37)라고 부르짖으며 그들의 모든 거래와 매매는 모두 하늘 나라에 있다는 표시를 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마음과 눈을 우상들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언제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2).”
우리 마음과 눈을 우상으로부터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월적 아름다우심의 영광에 우리의 마음과 눈을 빼앗기는 것보다 마음과 눈을 지키는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9에서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12:2에서는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여기서 ‘바라보자’라는 단어는 깊이 생각하면서 응시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38절에서 ‘주를 경외함’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창조합니다. 38절,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라는 기도를 찰스 브리지스는 이렇게 자신의 기도로 바꾸어 표현했습니다. “주의 모든 말씀 하나 하나를 죄를 이기는 저의 힘이 되게 세워주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진보를 위하여 세우시어 그 사랑을 체험하고 형상을 본 받게 하옵시고 결국 주님을 믿는 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 하게 하옵소서 그 권리가 제게 주어진 것을 당당하게 내세우게 하옵소서.”


4. 내가 사모하는 말씀 (39-40; 민 11:6; 21:5; 요 6:32,33,35)
이제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을 봅니다. 39절에서 시인은 “내가 두려워하는 비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 비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영광스러운 비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와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일관성 없는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되는 비방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탐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허탄한 것들에 시선을 빼앗길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밧세바와 동침하고 부하 장수 우리야를 살해한 사건을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주의 규례들은 선하시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40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40).”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이 영적 식욕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이 영적 식욕, 말씀을 사모함은 성도의 영혼을 살게 하시고 강건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로운 마음입니다. 영적 식욕은 신자의 영적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맥체인 캘린더에 따라 읽은 민수기 11:6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수기 11:6).” 이스라엘 백성은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민 21:5). 후에 주님은 당신이 바로 하늘에 내려오신 참 떡, 곧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2,33,35). 만나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게 여긴 태도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하찮게 여기는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시인은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신자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주의 말씀 곧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로 생명을 얻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맺는 영적 열매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교훈을 정리해봅시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의 말씀을 깨닫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마음과 눈의 우상들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칼빈은 설교를 듣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는 사람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고 견고하게 하는데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가르침(조명과 감화)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깨달은 말씀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마음은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자신 안에 있는 많은 결점을 느꼈기에 이 간구를 드린 것입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깨우침을 받고 다소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 할지라도 마치 그들이 이미 완전한 것처럼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시인처럼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본문의 설교에서 “결점 투성이로 천국 길을 가는 성도”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결점 투성이로 천국 길을 가는 성도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시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영적 식욕을 더욱 일으켜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먹여 달라고,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십시다.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까?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눈을 탐욕과 허탄한 것들로부터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말씀을 깨닫는 마음을 달라고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