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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2). 두 길, 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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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2). 두 길, 두 운명

요한계시록 22:10-16, 다니엘 12:4,9,10, 이사야 6: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8-08

말씀내용
우리가 살피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22:6-21)는 하나의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두 가지 큰 주제는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의 진정성과 재림의 임박함입니다. 지난 주일에 상고한 6-9절이 예언의 말씀의 신실성에 약간 더 무게를 두었다면, 오늘 우리가 살피는 10-16절은 재림의 임박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10절 하반절에서 ‘때가 가까우니라’고 했고 12절에서는 주님의 삼중 재림 약속(7,12,20) 중 두번째,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인봉하지 말아야 할 말씀 (10-11; 단 12:4,9,10; 사 6:9-10)
먼저 10-11절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요한계시록 22:10–11).”
이 말씀의 화자를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앞에서 말한 천사일 개연성이 큽니다. 천사는 요한이 받은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 12:4, 9절을 반영합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다니엘 12:4,9).” 다니엘이 받은 예언은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봉인하라고 말씀했지만, 요한이 받은 예언의 말씀은 인봉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이고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때가 가깝다는 것은 단순히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않아야 할 필요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11절과 그 뒤의 12-15절을 이해하는 열쇠의 역할을 합니다.
11절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도 다니엘 12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니엘 12:10입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다니엘 12:10).” 이 말씀은 세상의 종말이 오기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비슷한 11절은 예언이 아닌 명령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라.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워라.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일단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허용하신다는 관점에서 ‘내버려두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력을 동원하여 타락한 인류를 범죄하지 않게 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금 다르게, 이 말씀을 수사학적 경고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울 것인데, 그 삶에 합당한 결과를 생각하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12-15절의 문맥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도들을 향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영적, 도덕적 불의와 더러움의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 불의와 더러움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겠지만, 성도들은 의로운 자요 거룩한 자로서 자신들의 의로운 행실과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고 알려져야 한다는 격려입니다. 당장 이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와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해석들이 가능하지만, 11절은 무엇보다도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던 날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이사야 6:9–10).” 그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여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네 사역은 실패하게 될거다”라는 뜻이 아닙니까?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의 완고함, 듣지 않음, 깨닫지 않는 반응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알고 말씀을 전하도록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교회와 성도들은 이 세상의 악의 흐름을 꺾고 대세를 저지하게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영적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나팔수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봉인되지 않은 그 예언의 말씀을 말입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이 절(11)의 핵심은 종말이 이제 가까이 왔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이 살았던 삶의 합당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11절을 그 다음의 내용과 연결해 줍니다.


2.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12-13; 마 25:19,21,30; 약 2:17,18,20,26; 갈 5:6; 엡 2:10)
12절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주실 상급을 언급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요한계시록 22:12).”
여기서 상급은 주님의 재림의 임박성을 전제로 언급됩니다. 주님은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달란트 비유를 통해 모든 인간의 삶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결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5:19,21,30).”
본문에서 주님이 주실 ‘상’은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상을 가리키지만, 이것을 조금 확장하면, 의인과 악인을 포함하여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 즉 보상 뿐 아니라 형벌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μισθός 는 ‘행한 일에 대한 보수’라는 의미에서 보상과 처벌 모두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주님의 재림은 신자들에게는 기쁨의 날이 되겠지만, 불신자들에게 공포와 후회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행한 대로’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원과 행위 그리고 상급의 관계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무도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분명히 행위를 언급합니다. 우리는 상 개념과 관련해서 우리의 구원과 행위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의 행위는 구원의 조건으로는 필요하지 않지만, 구원의 결과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했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며(약 2:17,26) 헛것입니다(약 2:20). 믿음은 행함으로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약 2:18). 바울 사도는 믿음은 특별히 사랑으로 표현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6).” 심지어 에베소서에서는 성도가 선한 일을 행하도록 지음 받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번 포이트레스는 이 문제를 잘 정리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상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 행위의 불완전함과 잔존하는 죄의 성향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덮여진다. 선행은 마치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영생의 근거가 아니고, 우리 신앙의 진정성과 하나님의 심판의 정의를 입증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정의를 입증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질 때,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봉사와 눈물을 아무 것도 아닌 양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를 섬겨 사는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눈물과 섬김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13절은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주님의 정체성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12절 말씀의 진정성을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요한계시록 22:13).” 여기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동안 요한계시록에서 특별히 사용해왔던 세 칭호를 모두 묶어 사용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이런 호칭은 처음에 1:8에서 성부 하나님께 사용되었고(알파와 오메가), 1:17과 2:8에서는 그리스도께 사용되었습니다(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21:6에서는 이런 호칭이 다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이중적 강조로 성부 하나님께 붙여졌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역사에 대하여 가지시는 주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시작과 끝을 통제하고 그 사이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조종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렇게 부른 것은 요한계시록의 주제와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모든 역사가 로마 황제의 손이나 사탄의 손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끝으로 그리스도께 이 명칭이 삼중적으로 모두 사용됩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세 명칭이 모두 쓰인 경우는 13절이 유일합니다. 인간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포괄적인 주권과 능력을 최대한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도 계시지 않으신 적이 없으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선언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신다고 하는 12절과 신자와 비신자에게 주는 경고인 14-15절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3. 신자와 비신자에게 주는 경고 (14-15; 창 3:24; 계 21:8,27; 신 23:17-18; 막 7:27-28; 빌 3:2; 벧후 2:22)
14절은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15절은 비신자들이 영원토록 당할 비참한 운명을 보여줍니다. 14절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칠복 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합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이 세상의 때가 묻은 더러운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삶을 믿음의 인내로써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이렇게 지속적으로 인내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역사 전체에 걸친 그리스도의 편재성과 전능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편재와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선언한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성도 스스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신 의인의 지위를 계속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의 말입니다. “성도들을 하늘의 성에 적합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합당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을 당할 자격을 갖추신 그리스도의 합당하심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룩함을 추구하되 자신의 거룩함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덕을 추구하고 갈망하되 자신의 실패와 결점을 볼 때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두루마기를 ‘빤다’고 할 때, 이 동사가 현재시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지속적인 행동을 묘사합니다. 즉, 한 번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 두루마기를 빨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의로움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날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한 번의 회개가 아닙니다. 성도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입니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영원 속에 들어간 성도들은 생명나무에 자유롭게 다가가 열두 가지 열매를 맛보고(22:2) 열두 문을 통하여 성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권세를 누립니다. 특별히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표현은 범죄 후 낙원에서 쫓겨났던 상황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4).” 성의 열두 문들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성도들을 향하여 언제나 열려 있는 문들이 될 것입니다.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15절에서 비신자들이 영원히 당할 비참한 운명을 언급하는데서 더 분명해집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15).” 구속 받은 성도가 누리는 복과는 반대로, 15절은 악인들을 기다리는 형벌을 묘사합니다. 21:27에서 말씀했던 것을 재진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이 당할 운명은 한 마디로 ‘성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원한 거처는 ‘성 밖’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언어로는 언약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의 언어로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성 밖에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이고 저주인지 안다면,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성 밖에 처해집니까? 여섯 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이중에서 ‘개들’을 제외한 다섯 가지는 21:8에서 순서는 다르지만 모두 나열되었기에 설명을 생략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다 둘째 사망 즉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특별히, ‘개들’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이력이 있는 조소적 표현입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남자 성전 창기를 가리켜 ‘개’라고 표현했고(신 23:17-18),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막 7:27-28). 바울은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을(빌 3:2), 베드로는 배교자들을(벧후 2:22) 가리켜 개라고 묘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마귀의 사상과 거짓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총칭하여 ‘개들’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 성 밖, 곧 불과 유황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4. 다윗의 뿌리, 광명한 새벽별 (16)
이제 16절은 다시 한 번 이 모든 심판을 행하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선언합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6).”
여기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는 표현에서 ‘너희’는 요한과 같이 신약시대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모든 세대의 교회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천사)를 보내어 이것들을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을) 교회에게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당신의 신원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밝히십니다. 뿌리는 기원이 아니라 파생, 유래를 가리키는 말로, 조상이 아니라 자손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다윗 계열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속과 영광의 새날을 여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적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직 두 길만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두 운명만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이 말씀했듯이,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토록 복을 누리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한 저주를 당할 것입니다. 하나는 열두 성문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성에 들어가겠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토록 성 밖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두 길, 두 운명의 분기점이 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희게 된 두루마기를 매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들입니다. 주의 말씀에 비추어,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행위로써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행위 없는 믿음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이 죽은 것이요 헛것임을 증명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불의를 행하는 자로 그대로 불의를 행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더러운 자로 그대로 더러운 가운데 머물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를 받습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거룩함을 의지하십니까,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십니까? 신자는 매일 복음의 진리 위에서 이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고, 그래서 자포자기할 만큼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심으로써 정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의 심판은 정의로워서 주님을 섬긴 우리의 눈물과 땀, 수고와 섬김을 결코 모른 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기쁨으로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주의 날은 멀지 않습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1부의 마지막 장에서 순례길을 마친 크리스찬과 소망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제 내가 꿈에 보니, 그 두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리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의 몸은 변화되었고 의복은 황금같이 빛났다. 또 사람들이 수금과 면류관을 가져와 그들에게 주었다. 수금은 찬양하는 데 쓰는 것이었고, 면류관은 영예의 상징이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두려움으로 성 밖에 내쳐지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주 앞에 나아가 그 영광과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