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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8). 두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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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8). 두 추수

요한계시록 14:14-20, 요엘 3:13, 다니엘 7: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2-06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은, 세상 끝에 있을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상고하기 전에, 요한계시록 전체 가운데 지금 어디쯤 와있는지를 잠깐 확인하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일곱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부분은 1-3장으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현현을 뵙고,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신 메시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4-7장으로 일곱 인 심판의 내용인데,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를 보여줍니다. 셋째 부분은 8-11장으로 일곱 나팔 심판이 그 내용이고, 적대하는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확정적 승리를 말합니다. 넷째 부분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12-14장인데 교회 역사의 배후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이 그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넷째 부분의 결론으로서 영적 전쟁이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이후로는 15-16장의 다섯째 부분이 시작되는데 일곱 대접 심판의 내용입니다. 여섯째 부분은 17-19장으로 큰 음녀 바벨론과 짐승들의 멸망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마지막 일곱째 부분인 20-22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장엄하게 보여줌으로 요한계시록은 마치게 됩니다.


1. 최후 심판을 믿는 신앙 (마 13:39; 시 73:17; 계 6:9-10; 롬 12:19; 고후 5:10; 유 24)
오늘 말씀은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세상 끝에 있을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라고 말씀하셨고(마 13:39) 본문은 그 추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끝에 있을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최후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저는 그리스도인 형제라고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사도신경에서도 우리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최후의 심판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겠습니까? 최후 심판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기서 면제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후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성도의 억울함을 풀어줍니다. 성도는 억울한 심정으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가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세상에서 불경건한 자들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죽을 때도 평안하게 죽는 것을 보고 시험에 들었던 시편 73편을 쓴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시 73:17) 바로 최후의 심판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그 완전한 의의 기준으로 마침내 모든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을 믿는 신앙은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우리는 순교한 영혼들이 하늘 제단 아래서 신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계 6:9-10). 심판을 믿기에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19).” 어떻게 원수 갚는 것을 주께 맡길 수 있습니까? 기도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최후 심판을 믿는 신앙은 성도가 그날 심판주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저와 여러분은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심판은 두려움만을 주지 않습니다. 유다서 24절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유다서 24).”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심판주가 우리의 구속주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의 추수인가, 두 추수인가? (마 13:30; 마 3:12; 욜 3:13; 계 14:4,10)
본문에서 최후 심판은 추수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최후 심판을 추수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복음 13:30).”
주님만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추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이미지로 최후 심판을 말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구약성경에서는 추수 이미지로 심판을 언급한 경우가 한 번 있는데, 요엘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요엘 3:13).” 사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낫, 곡식, 포도주 틀’의 이미지는 모두 요엘서의 이 구절에서 인유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본문은 14-16절과 17-20절,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각각 곡식 추수와 포도 추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두 부분이 같은 것을 말하는지, 다른 추수를 말하는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뉩니다. 두 추수가 같은 것을 말한다, 즉 하나의 추수를 말한다고 보는 분들은 14-16절의 곡식 추수는 심판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17-20절의 포도 추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가차 없음을 특별히 강조해서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둘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을 섬긴 불신자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두 단락이 두 개의 다른 추수를 말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곡식 추수의 이미지는 주님께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는” 추수로서(마 3:12) 택한 백성을 모으시는 추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포도 추수는 하나님의 진노의 파괴적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심판으로서, 악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해석은 문맥적으로도 지지를 받는 것 같습니다. 12-14장의 주제는 영적 전쟁이라고 했지요? 여기에는 짐승의 표와 하나님의 인에 대한 대조가 있고, 바벨론의 영원한 심판과 성도의 복된 죽음에 대한 대조도 있습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있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12-14장은 불신자와 신자들을 구분하는 문맥인 것입니다. 14장에서만 보더라도, 곡식 추수는 14:4에서 성도들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고, 포도 추수는 14:10의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추수에 관한 말씀이 각각 충성된 성도들을 수확하는 것과(14-16) 짐승을 섬긴 악인들을 수확하는 것을(17-20) 가리킨다는 관점, 즉 두 추수의 관점에서 이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3. 곡식 추수 (14-16; 단 7:13; 마 24:30-31; 마 26:64; 막 4:29)
먼저 곡식 추수를 말씀하는 14-16절을 보지요. 요한은 먼저 ‘인자와 같은 이’를 봅니다. 이것은 다니엘 7:13의 인유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다니엘 7:13).”
다니엘서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만국에 대한 우주적이고 영원한 통치권을 받으러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자와 같은 이’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는 ‘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흰 구름 위에 앉아’ 계십니다. 다니엘 7장에서는 구름이 운송수단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일종의 보좌 역할을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또 요한은 구름 위에 앉으신 주님을 뵈었을 때, 주님의 이 말씀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태복음 24:30–31).”
주님께서는 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태복음 26:64).” 물론 요한은 그 법정에 들어가 그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지금 요한은 그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환상 가운데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흰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와 같은 이는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왕적 권세와 신적 영광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이 금 면류관은 경주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승리의 화관을 뜻하기도 하고, 통치자의 주권에 대한 표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에게서 본 또 한 가지는 그 손에 가지신 ‘예리한 낫’이었습니다. 이 예리한 낫은 곡식 심판과 포도 심판에 모두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에만 모두 7번 나옵니다. 낫은 심판의 은유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요엘 3:13의 말씀대로, 심판의 추수 이미지는 낫과 함께 등장합니다. 주님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마가복음 4:29).”고 말씀하셨습니다. 낫이 예리하다는 것은(14,17,18) 심판이 최종적이고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요한은 또 다른 천사를 봅니다. 그는 성전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하늘 보좌가 있는 곳에서 나왔다는 말인데, 이는 성부 하나님의 심판의 명을 전하기 위해서 왔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이 천사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해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명령형 문장인데 우리말 성경은 대부분 경어체로 번역을 했습니다. 아주 잘 된 번역이라고 봅니다. 헬라어든 영어든, 경어체가 없기 때문에 단순한 명령문으로만 표현이 되는데, 예수님께 천사가 명령을 하는 것은 이상해 보입니다. 그래서 ‘인자와 같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라고 해석을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말 번역은 원의미를 잘 살린 번역입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습니다. 왜 천사가 주님께 추수의 때가 찼다고 말하고, 추수를 하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조엘 비키의 말대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이시며, 아무 것도 당신 스스로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나온 천사는 단지 아버지의 명령을 전달해주는 메신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추수를 명하시는 그 때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심판의 시간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구름 위에 앉으신 이,’ 주님께서는 이제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십니다. 알곡, 주의 택한 백성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4. 포도 추수 (17-20; 6:11; 14:10; 욜 3:12-14)
이제 우리는 17-20절에서 두번째 추수를 보게 되는데, 포도 추수입니다. 17절에서 요한은 ‘또 다른 천사’를 봅니다. 이 천사도 하늘의 성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 보좌로부터 나와 심판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가진 예리한 낫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적 권세를 가지고 심판을 행하셨지만, 이 천사는 파생적 권세를 가지고 심판을 행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다른 천사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제단으로부터’ 나온 천사입니다(18).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제단은 번제단과 금향단이 합쳐진 개념입니다. 보통 이 제단이 나올 때, 기도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순교한 영혼들이 하늘 제단 아래서 기도한다는 내용(계 6:9), 그리고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한 천사가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 금 제단에 향이 가득한 금향로를 드리는데, 그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면서 일곱 나팔 심판이 시작된다는 내용(8:3), 제단이 언급되는 두 경우 모두 기도와 관련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18절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에서 나왔다는 것은, 신원해달라고 기도하는 순교한 영혼들에게 잠시 쉬고 기다리라고 했던 신원의 때가 찼다는 뜻이고(계 6:11), 심판의 향로가 쏟아져 심판의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불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가 ‘불과 유황’으로 대변되는 심판의 천사임을 보여줍니다(계 14:10). 이 천사가 낫을 든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18b).”
다시 우리는 요엘 3:13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요엘 3:13).” 요한은 짧은 상반절인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라는 구절을 곡식 추수 즉 성도를 불러모으는 추수에 적용했고, 긴 하반절,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라는 부분은 두번째 포도 추수 즉 악인들에 대한 심판에 적용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포도 추수에 비유했을까요? 포도를 수확해서 포도주 틀에 넣고 발로 밟을 때, 그 포도의 붉은 빛이 튀어 온 몸에 묻게 되고 포도주 틀이 붉은 포도즙으로 채워지는 모습은, 피가 솟구쳐 흐르는 최후 심판의 무서운 이미지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는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게 되고, 그 포도를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 넣습니다(19). 여기서 우리는 바로 앞에서 읽은 10절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요한계시록 14:10).”
이 말씀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묘사합니다. 포도주 틀에 던져진 포도송이들은 이제 그 안에서 짓밟혀서 터지게 됩니다. ‘밟힌다’는 단어도 심판의 이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하면, ‘성 밖에서’ 일어납니다. 포도주 틀이 성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성 밖에서 일어납니다. 그럼 이 성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짐승을 섬기고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은 거룩한 성 밖으로 쫓겨나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요엘서에서는 만국의 심판이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일어난다고 말씀하는데, 여호사밧 골짜기는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에 위치한 기드론 골짜기와 연결되는 곳으로 예루살렘 바깥을 가리킵니다(욜 3:12-14).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는 말씀은(20) 그 심판이 얼마나 가혹한지 포도주 틀에서 밟혀서 튀는 피가 피바다(blood bath)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말 굴레라면, 말의 머리가 있는 거의 1.5m 이상 되는 높이입니다. 길이는 1600 스다디온이라고 했는데, 스다디온이라는 단위는 고대 그리스의 달리기의 직선 구간 길이를 의미합니다. 1스다디온은 190m 입니다. 그럼 1600 스다디온은 약 300 km 가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국토, 북에서 남까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길이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제외한 전국토가 피로 덮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1600이라는 숫자는 땅의 숫자인 4(7:1에서 ‘땅 네 모퉁이’와 ‘땅의 사방의 바람’, 20:8에서 ‘땅의 사방’)의 제곱에 완전수인 10의 제곱을 곱한 것입니다. 이 의미는 심판이 온 땅에서 행해지는 세계적이며 철저한 심판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15절과 16절에 ‘땅의 곡식,’ 그리고 18절에 ‘땅의 포도송이,’ 19절에 ‘낫을 땅에 휘둘러’라는 말에서 보듯이, ‘땅’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강조합니다. 이 심판은 온 땅에서 행해질 것이고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5. 교훈과 적용 (마 24:42-51; 요일 3:2-3)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저 지나가는 공허한 말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정신이 번쩍 드십니까? 다 아는 말씀이라서 새로울 것이 없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곡식 추수이거나 포도 추수이거나 하나의 추수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거기서 둘로 나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날이 언제일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어느 날에 주님이 임하실지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마 24:42-51).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준비가 되셨습니까? 주님께서 곡식 추수에서 알곡으로 여러분을 거두실 것을 여러분은 확신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참된 믿음, 그날에 주님이 인정해주실 믿음입니까?
사도신경의 한 구절을 따라 읽거나 암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최후 심판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이나 의식이 아니라, 진짜 믿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믿으십니까? 그날을 종종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심판의 날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경건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1서 3:2–3).”
여러분의 신앙이 참되다면 여러분은 그날을 소망할 것이고, 그날을 바라보는 그 소망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을 뵈어야 하니까요.
우리는 또 그 날이 올 것을 알고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금 주님을 믿지 않고 있다면, 그날 그 무서운 포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가족 뿐이 아니지요. 여러분이 이 최후 심판을 정녕 믿는다면,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무서운 심판을 피하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보다 더 긴급한 필요는 없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들은 크리스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대목을 들려드리지요.
“그러자 그 사람은 전도자가 가리켜 준 방향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그가 채 멀리 가기도 전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그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그는 계속 뛰어가면서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 하고 소리질렀다.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평원 한가운데를 향하여 그냥 달려갔다.
이웃 주민들도 그가 뛰어가는 것을 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비웃고, 어떤 사람들은 협박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서 돌아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여러분은 지금 크리스천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믿음의 길로 달려가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불신 가족들과 이웃들이 이렇게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을 외치며 뛰어가도록 복음을 전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