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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6). 지금인가 영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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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6). 지금인가 영원인가

요한계시록 14:6-11, 다니엘 4:30-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1-22

말씀내용
1.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인가? (마 13:28-30)
오늘 본문은 세 천사가 전하는 바, 역사의 끝에 일어날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6절은 천사가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종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땅에 거주하는 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본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거절한 모든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천사는 이들을 향해 말하지만, 오늘 본문과 요한계시록 전체의 메시지는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요지는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으며 경배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 되므로, 믿음과 인내로써 살아 영원한 안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조엘 비키는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교회에나 보이지않는 경계선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사탄과 짐승들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말하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는 짐승과 한편이다.”
두려운 말씀이 아닌가요? 이렇게 교회 안에는 사람이 그어놓지 않은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복음이 두 그룹을 가르는 경계선입니다. 그리고 이 경계선은 마지막 추수 때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복음 13:28–30).”
주님의 이 말씀에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믿음과 인내로써 짐승 숭배의 유혹과 압박을 이기고 마지막 날에 영원한 안식과 상급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드러나있습니다. 천사들이 경고하는 대로, 최후 심판의 날이 오기전, 지금은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오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첫번째 천사—영원한 복음 (6-7; 단 4:34-35)
첫번째 천사는 공중을 날면서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마치 긴 현수막을 꼬리에 붙인 경비행기가 모든 사람이 보도록 비행하면서 광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큰 음성으로’ 말했다는 것도 모든 사람이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7). 이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졌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고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1)하나님을 두려워하라. 2)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3)하나님을 경배하라.
이것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유일하게 복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은 언제나 정관사를 붙여서 사용합니다. ‘그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그 예외는 로마서 1:1과 이곳 뿐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원한 복음의 내용은 거부하면 비참한 결과를 수반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의 사법적 혹은 심판적 성격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이 말한대로, 은혜의 복음이라기 보다는 심판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관사가 없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만을 경배하라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보여주고 또한 다가올 영원한 시대에 심판과 구원을 연결해주기에 이것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천사가 하고 있는 일은,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을 따르고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영원한 복음이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라고 할지라도, 신자들에게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분해 놓은 시대에 따라서 전해야 할 복음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가령, ‘왕국의 복음’과 ‘은혜의 복음’이 있고 또 오늘 본문에 ‘영원한 복음’이 서로 구별되는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왕국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므로 포로된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개념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전파된 복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왕국을 세우러 오신 주님을 거부하고 죽였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영원한 복음’은 위의 두 복음과는 구분되는 ‘저주의 복음’이라고 설명합니다. 때마다 전해야 하는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의 지지를 받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쳤던 천국(왕국) 복음은 곧 은혜의 복음이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복음도 그 이면의 심판을 말씀하는 것일 뿐, 같은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땅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전파됩니다. 이들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짐승을 따르는 불신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입술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어린양을 따르지 아니하고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서 천사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 전 교회 시대 전체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최후 심판이 있기 직전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돌이켜야 할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그 시간이 오면 더 이상 돌이킬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고 경배하라—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은 네 나팔 심판(8:6-12)과 대접 심판(16:2-9)에서 심판의 대상인 자연 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고 경배하라는 이 요구는 구원 얻는 신앙은 아니었을지라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종하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다니엘 4:34-35).”


3. 두번째 천사—바벨론의 멸망 선언 (8; 벧전 5:13; 단 4:30; 계 17:2; 렘 51:7)
이제 둘째 천사가 이어서 선포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을 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볼까요?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 5:13).” 바벨론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가장 큰 대적이었고 로마의 황제들도 느부갓네살처럼 자기 과시적 성격이 대단했습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바벨론은 ‘모든 시대 가운데서 사람들을 창조주를 경배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유혹하던 불경건한 정신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대응체로서, 무신론적이고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의 결정체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 바벨론의 사상적 특징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시 14; 롬 3:10-18).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부정)과거 시제를 쓰는 것은, 히브리어의 예언자적 과거 용법처럼,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그 확실성을 보장하고 강조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계시록 17-19장에서 바벨론의 성격과 그 멸망을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큰 성 바벨론’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것은 느부갓네살의 말에서 인유한 것입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다니엘 4:30).”
뒤에서 우리가 더 살피겠지만, ‘크다’는 형용사는 하나님 없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힘을 추구하고, 크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추구할 가치는 아닙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는 순결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천사는 바벨론을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라고 묘사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은 많은 나라에게 술을 먹여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짐승을 경배하도록 생각과 정신을 마비시켰습니다. 또 세상의 가치를 따라 음행을 부추겼습니다. 음행은 영적, 실제적 의미 모두를 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라는 표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음행과 진노의 두 개념이 결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그(녀)의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입니다. 진노는 멈출 수 없는 격정이란 의미도 가지는데, NLT가 번역한 것처럼, ‘그녀의 음행의 미치게 하는 포도주(the maddening wine of her adulteries)’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17:2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요한계시록 17:2).”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도 정확히 이것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예레미야 51:7).” 그러나 두번째로 진노 개념을 부각한다면, 그것은 바벨론이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함으로써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10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로 표현되었습니다(참조, 계 16:19; 19:15).
음행의 포도주는 영적, 실제적 의미를 다 가집니다. 영적으로는 짐승을 숭배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인데,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묘사합니다(약 4:4).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도, 경제적인 면, 육체적인 면을 포함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기에, 초대 교회 교인들은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유혹과 압박을 느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적당히 속일 줄도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방식이지만 몇 번쯤은 그냥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쉽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양이 아니라 짐승에게 더 큰 헌신을 바칩니다. 이것이 셋째 천사가 9절에서 말한 것이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천사들은 선언합니다.
또 음행은 육체적 음행도 포함합니다. 1세기 말의 로마 사회는 성적 개방성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첩을 두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일이었고 다양한 성적 행태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도착적 사회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동성애 이슈 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탄인 용과 두 짐승은 바벨론이라는 세상의 제국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을 성적 탐닉 속에 빠져 취하게 하고 벗어나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이렇게 바벨론은 그것이 술이든 돈이든 권력이나 섹스이든 그것들에 취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이 아닙니까? 바벨론이 무너질 때, 바벨론의 음행의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바벨론의 정신을 따르고 바벨론의 가치를 숭상하고 바벨론의 방식을 따라간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의 심판 아래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천사를 통해 선포된 메시지입니다.


4. 세번째 천사—혹독한 심판은 영원하고 쉼이 없다 (9-11; 욥 21:20; 시 75:8; 렘 25:15; 계 19:20; 20:10; 21:8; 창 19:24; 사 34:9-10; 막 9:43)
이제 세번째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 천사도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4:9–11).”
9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를, 10-11절은 심판의 구체적 내용을 보여줍니다. 먼저 심판의 이유를 보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을 받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11절에서도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라는 표현으로 반복됩니다.
이들이 당할 끔찍한 심판의 내용이 10-11절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텐데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고 말합니다. 유대 전통 사상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죄인이 받아 마시면 죽는 포도주로 묘사하는 개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노의 포도주는 일종의 사약같은 것이지요. 구약성경에도 이런 은유는 적잖이 발견됩니다.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욥기 21:20).”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시편 75:8).”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예레미야 25:15).”
그런데 본문은 조금 특이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라는 말입니다. 1세기 당시에는 물과 포도주를 1:1로 섞어서 마시거나 혹은 그 비율을 3:2 심지어 3:1 정도로 물을 많이 섞어서 마셨는데, 아예 취할 작정으로 마실 때에만 물을 섞지 않고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순화 되지 않은 채 강력하게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는 의미입니다.
‘불과 유황’도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이 두 가지는 ‘유황불 붙는 못’(계 19:20), ‘불과 유황 못’(계 20:10) 그리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 등 다양한 조합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무섭고 혹독함을 묘사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19:24).
이 심판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공연한 조롱과 반대를 당해 왔듯이, 주님 외에도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이 받는 심판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절은 심판의 고통이 영원하고 쉼 없이 주어지는 고통 임을 보여줍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는 말은 심판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에돔의 심판을 경고한 말씀의 인유입니다.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이사야 34:9–10).”
심판의 고통은 영원할 뿐 아니라,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 심판의 영원성과 쉼 없는 성격을 20:10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표현합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0).”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에 대한 대가는 이렇게 혹독하고 무섭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고 쉼 없는 괴로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영혼 멸절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복음 9:43).” 이것은 과장법이 아닙니다!
왜 천사들은 이렇게 무서운 심판의 내용을 선포합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이 받을 영원한 운명과 결말을 깨닫고 놀라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참 성도들의 전혀 다른 운명 (12-13; 11:15)
12-13절은 참 성도들은 짐승을 섬긴 자들과 전연 다른 운명을 맞을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4:12–13).”
이 말씀은 우리가 다음 주일에 자세히 상고할텐데, 이 두 절을 그랜트 오즈번은 6-11절의 윤리적 결론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믿음 안에서 인내하라는 결론을 말하려고 이제까지 무섭고 영원한 심판의 고통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세상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많은 박해를 받아야 했지만, 인내로써 믿음을 지킨 참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지상에서의 선택은 영원 속에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 결과를 거둔다는 것이 오늘 본문과 성경이 말씀하는 가르침입니다. 만일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죄인 자신이 고스란히 그리고 영원히 감당해야만 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날에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착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천사는 용과 짐승의 제국인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언합니다. 그 일은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11:15). 여러분은 그 날을 준비하고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바벨론의 멸망이 확정된 것처럼 살아가고 계신가 말입니다. 곧 멸망할 나라에 충성과 헌신을 다하여 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설교를 마치면서 박영선목사님이 사용하신 예화를 다시 사용하려고 합니다. <벤허>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59년에 만든 명작으로, 1960년에 오스카상을 11개나 휩쓸었고 이 기록은 1997년의 <타이타닉>과 2003년의 <반지의 제왕 3>이 타이 기록을 세웠을 뿐, 아직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laudius Nero)가 2컷 정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반면 주인공 벤허는 유대 왕자의 신분이지만 한 번의 실수로 로마군의 전함의 노예가 되고 물에 빠져 죽을 고생을 하는 등 영화 내내 고생을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황제역을 한 그 배우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벤허 역을 맡은 찰톤 헤스턴은 기억합니다. 그는 이 영화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세계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로마 황제를 하시겠습니까, 벤허를 하시겠습니까? 어느 배역을 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좀 더 누리고 고생 덜 하는 것이 중요해서 적당히 짐승을 섬기고 타협하고 살다가 영원하고 밤낮 쉼 없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살다가 영원한 안식과 상급을 누리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도전입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까, 영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