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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2). 짐승과 적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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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2). 짐승과 적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3:1-4, 다니엘 7:1-28, 요한일서 2: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0-04

말씀내용
요한계시록 13장은 큰 용 곧 사탄의 조력자 또는 대리인 역할을 하는 두 짐승의 이야기입니다. 전반부(1-10절)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후반부(11-18절)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각각 설명합니다. 용은 이 두 짐승과 함께 악의 삼위일체를 구성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을 모방하는데, 용은 성부 하나님을, 두 짐승은 각각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가짜이고 거짓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흉내 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언젠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읽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사는 현 시대,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재림까지 이어지는 교회 시대 전체에 일어나는 일들의 배후인 영적 세계와 영적 실재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면서, 지금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읽는 영적 통찰을 얻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그 성격이 모호하고 복잡한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13장도 역시 짐승이라는 용어 뿐 아니라, 많은 상징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상징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럴듯한 상상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여러 본문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1. 용의 두 대리자들 (12:17b; 욥 40-41)
13장의 시작은 12:17 하반절입니다. 분노한 용은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용은 성도들과 싸우기 위해 자기의 두 대리인들—짐승들을 불러내는데, 하나는 바다에서(1), 하나는 땅에서(11) 불러냅니다. 그래서 13장 전체는 12:17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12:7-12은 12:5의 확장이고, 12:13-17은 12:6의 확장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본문은 하나 하나 연장해서 설명을 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두 짐승에 대한 구약의 본문인 욥기 40-41장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두 짐승을 언급하시는데, 하나는 땅에서 올라오는 베헤못이고(욥 40:15-24)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나오는 리워야단입니다(41:1-34). 킴 리들바거는 “이 본문이 미래에 일어날 최후의 전투를 예고하면서 동시에 용이 패배를 맛본 창조의 여명기를 암시한다”고 말합니다.(『적그리스도의 비밀을 파헤치다』(새물결플러스,2020), p.165). 유대의 고대 작품들에서, 이 두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으로서 마지막 날에 멸망할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요한의 두 짐승 환상은 분명히 욥기의 이 본문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2.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형상 (1-2; 단 7:3-7, 17, 23; 계 11:7; 단 7:24a; 계 17:12)
1-2절은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의 형상을 묘사합니다.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라는 점은 바로 앞에서 본 용의 모습과 흡사한데, 왕관을 머리가 아닌 뿔에 썼고 그래서 일곱 왕관이 아니라 열 왕관을 가졌다는 점이 다릅니다(12:3). 그 일곱 개의 머리들에는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2절은 그 형상을 좀 더 설명합니다. 표범과 비슷한 점에서 다니엘이 본 셋째 짐승과 닮았고(단 7:6), 발이 곰의 발 같다는 점에서 다니엘의 둘째 짐승과 유사하고(단 7:5), 입이 사자의 입 같다는 점에서는 다니엘의 첫째 짐승과 닮았습니다(단 7:4). 이뿐 아니라, 그의 열 뿔은 다니엘의 넷째 짐승과 모양이 같습니다(단 7:7).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짐승이 다니엘이 본 환상 가운데 바다에서 나온 큰 네 짐승의 특징을 혼합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네 짐승들에 대한 해석은 다니엘 7:17,23절에 있습니다. “그 네 큰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이라…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라서 온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서뜨릴 것이며(다니엘 7:17,23).”
네 왕은 네 제국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 짐승은 다니엘의 때로부터 순서대로 고대 근동과 유럽 지역을 호령했던 바벨론—페르시아—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제국들이고,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식민지로 다스렸던 제국들입니다. 23절은 넷째 짐승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했던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대 전통에서, 넷째 짐승은 로마를 넘어 초시간적인 나라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모든 시대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짐승을 해석할 때, 이 다니엘의 본문에 의존해야 하는데,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다니엘의 네 짐승의 특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 특성에 대하여 필립 휴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특성들은 이 짐승의 섬뜩한 면모와 타락한 세상에서 이어지는 제국들의 잔혹한 불경건의 총체성을 강조한다.” (Beeke, J. R. (2016). Revelation. (J. R. Beeke & J. D. Payne, Eds.) (p. 360).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이 짐승이 정치적 권세라는 사실은 하반부에 나오는 짐승과 구별되는 특성입니다. 이제 여자의 남은 자손에 대한 공격과 박해는 바다에서 나온 이 짐승이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다는 점은 11:7에서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온다는 사실과 달라 보입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요한계시록 11:7).”
오늘 본문은 두 증인의 본문인 11장과 다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11:7의 짐승은 바로 13:1의 짐승과 다른 짐승이 아닙니다. 사실, 무저갱과 바다는 ‘악의 출처’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랜트 오즈번은 무저갱을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바다 속을 가리키는 말로, 바다와 동의어라고 설명합니다.
잠깐 여기서 이 짐승의 정체를 정리하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사도 요한과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짐승은 로마 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모든 세대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이 짐승은 로마 제국을 넘어 초시간적으로 등장하는 정치적 박해 세력을 의미합니다.
먼저 로마 제국이라는 차원에서 본문을 살펴보지요. 1세기의 소아시아 사람들에게 로마 군대는 바다(지중해)에서 오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나온다는 말은 1세기 말의 소아시아 사람들(일곱 교회가 소재한)에게 로마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짐승이 가진 열 뿔은 다니엘 7:24의 해석에 의존하여 로마제국의 열 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다니엘 7:24a; 계 17:12 참조).”
이 짐승이 가진 일곱 머리와 열 뿔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17장으로 미루고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사이먼 키스트메이커는 “숫자 열과 일곱은 ‘완전함(completeness)과 충만함(fullness)’의 상징이다. 짐승이 행사하는 권위, 능력이 완전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고(Simon J. Kistemaker, Revel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2001), 377.), 그레고리 비일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압제 권력의 충만함과 세계적인 효력을 강조한다”고 말합니다. 용이 일곱 머리에 왕관을 쓴 반면(12:3), 짐승이 열 뿔에 왕관을 썼다는 점의 차이는 설명하기 쉽지 않으나, 그랜트 오즈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뿔이 상징하는) 권세에 대한 짐승의 주장이 야만적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은 악한 제국의 왕인 반면, 짐승은 그 왕의 군사적 수단이다.”
또, 짐승의 일곱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1세기 말로 가면서 로마의 황제 숭배는 점점 더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시행되게 되었고, 살아있는 황제들에게까지 신의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주후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신과 같은 이’를 의미하는 디부스(Divus)로 선포되었고, 네로는 주화에 ‘세상의 구주’라고 각인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쓰이던 당시, 도미티아누스는 생존할 때 이미 ‘우리 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도미누스 엣 데우스 노스테르 (Dominus et Deus noster)’라고 불렸습니다. 요한은 이것들을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절 하반절은,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짐승은 용으로부터 전권을 받아서 여자의 남은 자손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의 짐승을 다니엘의 네 짐승 본문(단 7)에 근거하여 해석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네 개의 역사적 제국을 대표하는 짐승들을 조합함으로써(단 7:17,23)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여인의 후손을 사납게 대적하는 전형적인 뱀의 후손, 하나님에 대해 신성모독하는 말을 하고 신실한 자들을 핍박하는 거대하고 무서운 괴물로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윌리엄 바클레이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에게 로마 제국은 매우 악마적이고 지독한 나라였기에, 로마 안에 이미 앞서간 악한 제국들에게 있던 모든 공포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로마는 모든 악의 총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차적 의미일 뿐입니다. 본문의 짐승과 다니엘 7장의 짐승들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네 짐승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제국을, 그리고 네째 짐승은 로마제국을 가리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존재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모든 짐승의 합성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 온 인간 역사 전체 속의 정치적 세력들, 혹은 제국들을 가리킵니다.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은 1세기에 국한되지 않고 초시간적인 세력에 적용되는 존재입니다.


3. 적그리스도 (3-4; 요일 2:18, 22; 4:3; 요이 7; 계 13:12, 14; 5:6; 19:12; 5:12-13; 3:21; 12:10; 5:13; 출 15:11; 마 4:8-9;
여기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존재를 잠깐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성경의 용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잠깐 살펴보려는 것은, 이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서신에서만 5회 사용되었습니다(요일 2:18(2회), 22; 4:3; 요이 7). 그중 요일 2:18을 보면,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는 요한이 살고 있던 시대를 포함하여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입니다. 요한은 ‘많은 적그리스도(들)’을 언급합니다. 하나가 아니라 다수임을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쓰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거짓말로 미혹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요일 2:22; 4:3; 요이 7). 이런 적그리스도의 특징에 대한 언급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요한이 서신서에서 사용한 의미에서의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기 어렵게 합니다. 이 논의는 17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려고(12) 권력이 아니라 이적을 행함으로써 미혹하는 일을 하는(14)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요한이 서신서에서 말한 의미의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의 조력자인 두 짐승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두 짐승은 성경이 말하는 적그리스도와 결코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13장의 두 짐승을 적그리스도라고 이해할 때, 적그리스도는 두 가지 유형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고 압제하는 세력/권력이고 둘째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의 존재입니다. 이 각각이 본문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대변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와 관련한 또 하나의 문제는 적그리스도가 개인의 인격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악한 영이나 기관 또는 나라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1세기 이후로 거짓 가르침과 박해를 선동하는 집단적 영으로 거짓 교사들을 통해서 그 정체를 드러냈지만, 마지막 때가 임하기 전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을 반대하는 지도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을 암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이 언급한 바, 이미 일어난 ‘많은 적그리스도들’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선구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용을 경배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모방과 거짓 가르침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보여주는 바, 적그리스도인 짐승이 보여주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모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짐승은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용의 형상을 닮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짐승의 열 뿔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일곱 뿔에 대한 모방입니다(5:6). 셋째로, 짐승이 열 뿔에 쓴 열 왕관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많은 왕관들을 쓰신 그리스도의 주권적 권세에 대한 모방입니다(19:12). 넷째로, 짐승은 용에게서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받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능력(5:12-13)과 보좌(3:21)와 권세(12:10)를 받으신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다섯째, 3절에서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다가 그 상처가 나아져 살아났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여섯째, 4절에서 용과 짐승이 경배를 받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온 세계의 경배를 받으시는 것의 모방입니다(5:13). 심지어 4절 하반절에,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라는 경배의 말은, 출애굽기 15:11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물론 여기서 용과 짐승이 경배를 받는 동기는 도덕적 탁월함이 아니라 용과 짐승이 소유한 강력한 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탄이 심지어 성육신하신 예수님에게도 경배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8–9).”
결국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거짓 삼위일체인 용과 짐승들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모방함으로써 말입니다. 여기서 ‘땅에 사는 자들”이 어떻게 용과 짐승을 경배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먼저 3절에서 죽게 된 것 같던 짐승이 나아서 살아나자 온 땅이 놀랍게 여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놀랐던 것과 같습니다. 3절 하반절에서는 놀란 이들은 짐승을 따릅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성도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께 경배를 돌린 것처럼, 용과 짐승에게 경배를 돌립니다(4).


4. 교훈과 적용 (롬 13:1,4; 단 7:9-14)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1세기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교훈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본문은 왜 로마제국이 하나님의 사역자에서 성도들과 전쟁을 벌이는 사악한 짐승으로 돌변했는지를 설명해주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로마서 13:1).”고 말씀했습니다. 세속 정부의 권위를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불렀습니다(롬 13:4).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쓰던 때는 네로 황제의 재임 초기였습니다. 그때에는 네로 황제의 기행과 반기독교적 박해의 행태들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유대교의 우산 아래서 보호를 받을 수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불법 종교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국가의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1세기 말로 가면서는 황제 숭배가 점차 노골적으로 되어갔던 것입니다. 본문은, 왜 로마 제국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나타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짐승을 일으켜 이용하는 용의 소행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국가가 용의 권세를 힘입게 될 때 국가 자체와 통치자들을 신격화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케어드는 이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모든 정치 권력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직접 종교의식을 통해서든지 혹은 간접적으로 오직 한분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는 온전한 충성과 순종을 요구 하는 것을 통해서든지 사람들이 국가를 신격화 하면 국가는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고 짐승과 같이 된다.” (G.B.Caird, Revelation of St.John, p.162; 『적그리스도의 비밀을 파헤치다』 (새물결플러스,2020), pp.156-157에서 재인용).
역사는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전시관입니다. “카이사르는 주(主)다”라고 고백하게 한 것은 1세기 말의 로마 제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이런 일은 일어났습니다. 나찌 시대의 독일은 어린 학생들에게 “아돌프 히틀러는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영웅이다(Adolf Hitler is our savior, our hero.)”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짐승이 경배를 받음으로써 용이 경배를 받는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독일 교회가 이것을 용인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랍게도 하고 두렵게도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신사참배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된 국가 숭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정권에서도 지난 70년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중국 시진핑 정권이 점점 교회를 강력하게 흔드는 모습도 국가 권력이 짐승으로 변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이런 짐승의 세력은 역사 속에서 치명상을 입어 사라진 듯 싶어도, 상처가 나아서 다시 등장하곤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권세를 입어 정부나 국가가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주장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이미 우리나라 안에서도, 이런 짐승의 참칭, 세속 권력의 신격화가 교묘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권력의 신격화는 결정적으로 거짓된 신화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게 되는데,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라, 신격화된 세상 나라—짐승으로 표현되는—의 영속성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은 모두 인자이신 그리스도께 멸망을 당하고 만다고 가르치지만(단 7:9-14), 권력의 신격화는 용과 짐승의 승리라는 다른 신화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신화 위에서 세속 정치가 우상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 거짓 목사들이 정치와 정치 이념을 우상화하는 길로 무지한 자들을 호도하는 일까지 일어나는 작금의 현상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큰 경고의 말씀인지를 알고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경배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 권력도, 재물의 능력도, 정치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도, 어떤 정치 지도자도 우리가 경배하거나 추구할 대상도, 이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모방하는 사탄의 역사와 짐승의 행사는 우리를 넘어뜨릴 만큼 간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에 서십시오. 그 말씀 아래 거하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십시오. 그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주의 말씀을 힘써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십시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말씀의 길로 선히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