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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0).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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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0).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쟁

요한계시록 12:7-12, 다니엘 10:20-21, 다니엘 1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9-20

말씀내용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도후서 5:7).”고 썼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믿음으로 보는 것을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쟁을 말씀합니다. 인류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들 대부분은 역사가들의 손에 의해 해석되고 기술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의 손으로 해석될 수도 없고 기술될 수도 없는, 심지어 그들이 포착하지도 못하는 전쟁의 이야기를 성경은 들려줍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판타지 소설의 허구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믿음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1.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고후 5:7)
신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으며, 예수님의 피 흘려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오늘 저는 그 복음의 내용을 하늘의 차원에서 묘사하는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가령, 욥은 자기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끝내 알지 못했지만, 욥기 1-2장을 읽은 독자들은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신앙을 자랑하셨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어전 회의는 인간의 육안으로 확인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난 복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교회와 교회의 전체 역사, 그리고 작게는 신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본문의 해석에서, 이 사건이 그리스도 재림 시기에 임박해서 일어나게 될 특별한 영적 전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때에, 이 십자가 죽으심에 근거하여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함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본문에 나오는 하늘의 전쟁을 ‘그리스도의 승리(십자가)에 대한 천상적 대응체’라고 말했고, 그레고리 비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와 부활과 승천의 이면, 즉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2.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대(對) 용과 그의 사자들(7, 4-5; 단 10:1-14, 20-21; 12:1)
7절은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라고 시작합니다. 땅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땅에서는 용이 여자가 아들을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고 하고 있었지만(12:4) 용은 실패했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하나님과 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갔습니다(12:5). 5절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승천까지를 간단히 묘사한 말씀이기에, 5절에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을 설명하는 것이 7-12절입니다.
이 하늘 전쟁의 한편에는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용과 그의 사자들이 있습니다. 여기 갑자기 등장하는 미가엘이 누구입니까? 사실, 이 하늘의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받은 예언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다니엘 10:1-3입니다. 80세가 넘은 다니엘은 바사 왕 고레스 3년에 큰 전쟁의 환상을 보고 그 의미를 깨달았는데, 이후 3주(세 이레) 동안 그는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그가 이 환상에서 본 분은 밧모섬의 요한이 본 그리스도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단 10:4-9; 계 1:12-17). 그때 가브리엘이 (본문에는 그 이름이 특정되지 않지만, 이 천사는 9:20-27의 가브리엘일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다니엘 10:12–14).”
이 말을 들은 다니엘이 놀라서 말문이 막혀 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오셔서 다니엘을 만져 힘을 주시며 말씀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왔는지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의 군주 미가엘뿐이니라(단 10:20–21).”
인자 같은 이는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인자는 바사 군주, 헬라 군주와 싸우실 것을 말씀하시고, 당신을 도와 같이 싸울 자는 미가엘 뿐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 땅의 바사와 헬라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의 영적 세력인 마귀를 언급하신 것이고, 그러기에 주님께서 미가엘과 함께 싸우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미가엘은 자기 백성을 대표하시는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싸우는 천사장(군주)이고, 인자이신 그리스도의 수하 조력자입니다.
이제 다니엘 12:1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다니엘 12:1).”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로 묘사되는 미가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수호천사장으로서 종말의 큰 환난에서 교회를 보호할 자입니다. 여기서 종말은 주님의 승천에서 재림까지 교회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미가엘(Michael)이라는 이름은 영어권에서 많이 사랑받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이 받은 이 예언의 성취의 절정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그의 사자들을 맞서 싸우는 하늘의 전쟁을 묘사하는 오늘 본문에서 드러납니다.


3. 용의 패배와 하늘에서의 내쫓김(8-10; 욥 1:6; 2:1; 슥 3:1; 욥 1:9-11)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8절은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합니다. 용과 사자들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자기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이전에는 용이 하늘에서 있을 곳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욥기와 스가랴서에서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 참석하는 사탄을 볼 수 있습니다(욥 1:6; 2:1; 슥 3:1).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 용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는 표현은 9-10절에서는 ‘내쫓김’으로 설명됩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9–10).”
내쫓긴다는 표현이 4번 나옵니다. 용과 그의 사자들이 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먼저 9절은 용의 정체부터 밝힙니다. 큰 용은 옛 뱀이고 마귀 혹은 사탄이라 불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온 천하를 유혹하는 자이고 10절에서는 우리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입니다.
옛 뱀이라는 말은 창세기 3장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뱀의 정체가 사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서, 히브리어 사탄(שָׂטָן, Σατανᾶς)은 헬라어 마귀(διάβολος)로 번역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어 사탄은 대적하는 자, 원수라는 일반 명사인데, 고유명사로 사탄-마귀가 된 것이고, 헬라어로 번역된 마귀는 고소자, 중상자, 비방자의 뜻이 강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마귀의 별칭은 더 있습니다. 벨리알(고후 6:15), 아바돈과 아볼루온, 무저갱의 사자(계 9:11), 바알세불(마 12:24; 눅 11:15), 귀신의 왕(마 12:24), 세상의 임금(요 14:30), 어둠의 세상 주관자(엡 6:12),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히 2:14). 세상의 신(고후 4:4),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요 8: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원수(마 13:39), 대적(벧전 5:8) 등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 ‘귀신(δαιμόνιον)’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사탄-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 악령, 악신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로 악마, 귀신을 의미하는 demon이 나왔습니다. 결국 이 사탄-마귀는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탄-마귀의 일은 두 가지입니다. 속임(기만과 유혹)과 참소(고소)입니다. 이 두 가지 행위로써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온 천하를 꾀는 자’라는 말은 그가 유혹과 속임의 명수임을 보여줍니다. ‘온 천하’ 그의 꾀임을 받아 그를 추종하는 자들, 다른 곳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묘사된 불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그의 속임에 미혹되어 그를 섬기고 추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하는 또 하나의 본질적 행위는 참소하는 것입니다. ‘참소하다’라는 단어가 10절에서 2회 사용되었듯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밤낮 ‘우리 형제들’ 곧 신자들을 참소합니다. 욥기 1장은 그의 이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욥의 믿음은 다 이유와 조건이 맞아서 믿는 믿음이라고 사탄은 말합니다(욥 1:9-11). 스가랴 3장도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서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참소하는 사탄을 보여줍니다(슥 3:1). 사탄은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검사의 역할을 하는 존재인데, 이 검사는 매우 질 나쁜 검사인 것입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관심이 없이 삐딱한 심성으로 믿는 자를 지옥으로 보낼 판결만을 청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용이 하늘에서 쫓겨난 시점(10a; 20:14-15; 골 2:14-15; 요 12:23,31-33; 마 28:18; 창 3:15)
이제 속이고 참소하는 용과 그의 사자들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마귀에게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용과 그의 사자들이 하늘에서 쫓겨난 시점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사탄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대적하다가 내쫓긴 최초의 천사의 타락 사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성경 보다 존 밀톤의 [실낙원]에 더 많이 근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이 재림하시고 새창조가 일어날 마지막 때에 그가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계 20:14-15). 그러나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이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제가 십자가 사건이라고 할 때, 이것은 주님의 성육신과 부활과 승천을 모두 포함하여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그 절정이 십자가인 셈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의 죽으심은 주님의 낮아지심(비하) 중에서도 가장 천한 낮아지심, 낮아짐의 극치였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모욕과 조롱, 채찍질과 심판을 받고 벌거벗김을 당하는 수치 속에서 죽임을 당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올라감과 영광이라고 명시하셨습니다. 한 번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자 청했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이것을 알리자,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2:23). 그리고 바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한복음 12:31).”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마귀가 쫓겨난다고 말씀하시고 이어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서 이끌겠노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사탄이 쫓겨난다고 하신 것입니다(요 12:33). 그런데 그 죽으심을 ‘들림’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실 것과 그 죽음이 낮아짐이 아니라 하늘로의 올려짐(승천)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낮아짐이 아니라, 들림 그리고 영광 얻으심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사탄이 쫓겨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의 영적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낮아짐의 극치인 십자가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통치자들과 권세들’ 곧 마귀의 세력을 무력화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하늘에서의 승리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이고 그 결과, 마귀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 설명이 10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요한계시록 12:10a).”
요한이 들은 ‘하늘에 큰 음성’은 24 장로의 음성이거나 천상의 존재의 음성일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이 언제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고 선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을 때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마 28:18).
이렇게 여자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님은 뱀의 머리를 짓밟으심으로써 하늘 전쟁의 승부가 결정된 것입니다(창 3:15). 제임스 해밀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미가엘에게 그것을 시행하라고 명하시고 그를 보내셨다.”


5. 성도들의 이김(11; 요일 1:7b; 엡 2:13; 계 1:5b; 5:9-10; 출 12:22-23; 고후 10:4; 계 2:13; 6:9-11; 히 2:15)
사탄은 미가엘에게도 패하지만, 성도들에게도 패합니다. 11절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 12:11).”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미가엘의 승리는 전적으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와 하늘에서 미가엘의 승리에 근거하여 이 땅에서 성도들 역시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11절은 성도의 이김이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 승리를 입증합니다. 주님의 피 흘려 죽으심은 효력 있는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7b).”라고 썼고, 바울 사도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에베소서 2:13).”고 썼습니다.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요일 1:7) 죄에서 자유하게 하며(계 1:5b) 원수된 자들을 예수 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되게 하고(엡 2:13), 성도들을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신 효력있는(계 5:9-10) 피입니다. 첫번째 유월절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져 그들을 죽음에서 건진 효력 있는 피인 것입니다(출 12:22-23).
성도들의 ‘증언하는 말씀’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찰스 스펄전의 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린 양의 피에 관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마귀를 이기려고 한다면, 속죄하는 피를 전해야 합니다. 속죄의 교리가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희미해질 때는 언제든지 그만큼 교회의 능력이 쇠퇴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훈이 분명하게 선포될 때는 언제든지 교회가 그 영광을 드러내고 용의 머리를 상하게 만드는 것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약하고 복음의 능력과 영적 권세를 잃어버렸는지 잘 설명해주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왜 이 영적 싸움에서 제대로 싸우고 있지 못하는지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돈과 세상 권력으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고린도후서 10:4).”입니다.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 곧 복음으로 우리는 마귀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본문은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우리가 싸워 이기는 방식은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의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증거의 말씀인 보혈의 복음을 기꺼이 선포하려는 성도들의 태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마저 이기게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듯이(계 2:13),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여 하늘 제단 아래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계 6:9-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6:11).
이것이 성도들이 이기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이깁니다. 마귀는 죽음으로 성도들을 삼킬 수 없고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죽음의 두려움에서 놓아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히 2:15).


6. 교훈과 적용(12a; 롬 8:1, 33-34; 고전 6:19-20)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적용적 교훈을 생각해봅시다. 12절 상반절을 보면, 하늘에 그 큰 음성은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고 선언합니다.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땅에 살지만, ‘땅에 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에게 승리하셨고 미가엘이 하늘의 전쟁에서 마귀를 이겼으며, 우리 성도들 또한 그 승리에 근거하여 마귀를 이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이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마귀의 참소는 결정적으로 힘을 잃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우리를 고소하고 정죄하는 마귀의 참소는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대신 다 받으셨고,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셨으며,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고, 심지어 죄를 지은 적도 없는 거룩한 존재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듯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런 신자들을 향한 마귀의 정죄와 고소가 먹힐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엘 비키는 말합니다. “복음은 사탄의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The gospel was God’s answer to Satan’s challenge.).”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너무나 충분하고도 너무나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고전 6:19-20) 성도는 언제나 그 구속의 은혜 아래,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존재요, 밤낮으로 성도들을 참소하는 마귀의 참소가 먹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스펄전이 말한대로, 성도는 살든지 죽든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명예를 얻었든지 부끄러움 가운데 있든지,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것이므로 자신을 주저 없이 주께 드리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증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영광을 잃어버리고 살지 마십시오. 이 영광을 누리십시오. 여러분을 두렵게 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