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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2). 죽임 당하신 어린 양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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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2). 죽임 당하신 어린 양 A

요한계시록 5:8-10, 요한계시록 6:10-11, 다니엘 7:22, 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4-26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 어린 양께서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내용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두루마리의 인을 떼고 책을 펼쳐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작정을 보고 실행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제 우주와 역사의 spotlight이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실 수 있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주적 영광의 예배의 서막이 오르는 신호탄입니다. 우리는 8절부터 우주적 영광의 예배를 보게 될텐데, 오늘은 8-10절 상반절까지 본문을 상고하겠습니다.


1.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경배 (8a; 히 12:28; 대하 7:3)
어린 양께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장면에 이어 요한이 본 것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의 경배였습니다.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8a)”라고 기록합니다. 그 거룩한 천사들은 어느 정도의 뜸을 들이면서,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고 의논한 끝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신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이렇게 어린 양 앞에 꿇어 경배했다는 것은 예배가 우주적 스케일을 가진 것임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이어지는 8-14절의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다른 것은, 우리는 그 어린 양을 너무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브리서 12:28).”라고 권면합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말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던 날에도 지상에서 유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역대하 7:3).”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무수한 번제물과 제물들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해지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은 성전에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즉시 그들은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 천상의 예배, 그리고 솔로몬 시대의 예배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오, 주님! 저희도 엎드려 경배할 수 있도록 주의 영광을, 어린 양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기도와 심판 (8b; 시 141:2; 계 6:10-11; 8:4-5)
8절 하반절은 이십사 장로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진 자들은 오직 이십사 장로들입니다. ‘가졌으니’라는 동사가 남성복수 분사형인데, 이 단어의 주어(선행사)는 중성명사인 생물들이 아니라, 남성명사인 장로들이 되는 것이 맞다면, 거문고와 금 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로 찬양을 드리는 자들은 이십사 장로들인 것입니다.
거문고는 시편에서 수금이라고 번역된 악기인데, 여기서는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십사 장로들이 가진 ‘향이 가득한 금 대접’입니다. 요한은,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자기가 본 것을 설명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구약 제사장과 레위인의 24반차들(그룹)을 반영하고 있고(대상 25:6-31) 제사장들이 백성을 대신하는 제사 직무를 행하고 레위인들이 여호와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거문고와 향을 담은 금 대접을 가진 자들이 이십사 장로들이었다는 설명을 지지합니다.
구약 성소의 금향단에서 올려지는 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만들어서 올려지는 향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듯이,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기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편 141:2).”
그런데 이 기도가 이십사 장로의 금 대접에 담겨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흥미롭지 않습니까?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이십사 장로들의 금 대접에 담겨 하나님께 올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무시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듣기만 하셨을까요? 6:10-11을 보지요.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6:10–11).”
8:4-5도 봅시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4–5).”
이 두 본문들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교회는 비록 지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지만, 하늘에서는 그들의 기도를 통하여 천사들의 강력한 사역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사역이란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는 바,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특별히 본문 8절이 일곱 인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라면, 8:4-5은 일곱 나팔 심판이 펼쳐지기 전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6:10-11에 말씀한 대로, 그 때가 차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는 앞으로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자주 다루게 될 중요한 주제이니, 이 주제를 잘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3. 이십사 장로들의 새 노래(9-10a)
요한은 이어서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을 보고 듣습니다. 9-10절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9–10).”
먼저, 장로들의 새 노래로 부르는 찬송이 8절에서 성도들의 기도와 연결된다는 점을 보면 좋겠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는데, 여기서 장로들의 새 노래도 심판과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새 노래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심판을 기리는 노래요 찬송입니다. 시편에서도 ‘새 노래’는 보통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것에 대한 찬송을 의미합니다(시 33:3; 40:3; 96:1; 98:1). 그러니까 성도의 기도는 맥락상, 장로들의 새 노래의 찬송과 함께 심판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신 어린 양의 영광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장로들의 찬송을 ‘새 노래’ 라고 표현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의 설명입니다. “그들이 새 노래로 노래하는 것은, 전에는 결코 이렇게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구속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전에는 결코 어린 양이 이토록 위대한 존귀를 받으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William Hendriksen, More than Conquerors: An Interpretation of the Book of Revelation (1940; repr., Grand Rapids: Baker, 1967), 91.).

A. ‘합당하시도다’
당연히 새 노래가 찬송하는 대상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장로들은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어린 양을 찬송합니다. 우주와 역사의 모든 주권을 이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다는 것과, 그럴 자격을 합당히 가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께서는 ‘합당한’ 분이 되셨습니까? 9절 하반절과 10절 상반절이 그 대답입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요한계시록 5:9b-10a).”
예수님께서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이유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먼저, 그가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가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세번째로, 그가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존재 가운데 완전하시지만, 죽임을 당하시고 자기 백성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서 드리심으로써 사역을 완수하셨으므로, 이제 자기 백성의 구주가 되기에 합당한 자격을(히 5:8-9), 그리고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합당하시도다’라는 표현은 앞에서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께 쓰여진 호칭이었고(4:11),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어린 양께 드리는 장로들의 찬송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B. ‘죽임을 당하사’ (요 10:15b, 18)
여기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합당한 분이 되신 근거—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죽임을 당하사’라는 표현을 봅시다. 주님의 죽으심은 어떤 강한 존재의 힘에 굴복한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b).”고 하셨고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0:18).”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죽음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죽음이었습니다.

C. ‘피로 사서’ (엡 1:7)
그 다음에, ‘피로 사서’라는 표현입니다. ‘사서’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구매하다’는 의미인데, 특별히 묶여있는 상태로부터 건져낸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령, 죄수나 노예를 몸값(ransom)을 주고 사서 묶여 있던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고 할 때 사용합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redeem, 우리말로는 ‘구속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제공하신 값(속전)은 사탄에게 제공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옳은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떤 부채도 갖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죄에 묶인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대하여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창 2:17; 롬 6:23).
벤자민 워필드(B.B.Warfield)는 ‘피로 사서’라는 말에 근거하여 ‘구속자’(Redeemer)라는 칭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한 이름은 Redeemer (구속자)이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이 구원을 확보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신 것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들어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Redeemer’ and ‘Redemption,’” in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0), 325.). 워필드는 이것은 딱딱한 신학책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오래된 찬송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의 찬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Redeemer)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찬송가 23장). 또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의 찬송도 보십시오.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Redeemer) 우리 대신 죽임을 당했네”(찬송가 31장).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찬송이 ‘구속주(Redeemer)’이신 어린 양을 찬송하는 내용인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1:7).” 속량이 곧 풀어주는 것, 구속하는 것입니다.

D.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이제 우리 질문은, 어린 양은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이라고 읽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당신의 피를 흘려 구속하여(사서)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from)’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구속은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을 다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이 포함되는 보편적이고 차별이 없는 구속이라는 의미입니다.

E. ‘그들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1:6; 벧전 2:9; 출 19:6; 단 7:22,27)
이제 주님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을 하나 더 보아야 하는데, 10절 상반절에,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속하신 백성을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이미 1:6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요한계시록 1:6).”
‘나라와 제사장들’은 주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에게 주신 두 개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나라는 왕권의 왕의 통치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나라’는 단수로, ‘제사장들’은 복수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1:6도 마찬가지) 나라는 주님이 홀로 다스리는 왕국임을 강조하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벧전 2:9)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1:6에서 설명한대로 출애굽기 19:6의 궁극적 성취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6).”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약속은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세워진, 그의 피로 사신 교회의 설립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라는 말은 또한 다니엘 7:22과 27절의 인유이며 성취이기도 합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다니엘 7:22,27).”
이렇게, 어린 양이신 주님은, 죽으심으로써, 자기 피로 그 백성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그들은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심으로써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게 되셨고, 우주와 역사의 주권을 가지신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오늘은 10절 상반절까지만 상고하고 다음 주일에 계속해서 10절 하반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교훈과 적용
말씀을 맺기 전에,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첫째로, 본문은 예배가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은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습니다. 그분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셨고 자기 피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고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심으로써 이 합당하신 자격을 얻으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어떤 주저함도 없이, 그리고 어떤 논리적 추론을 하는 일이 없이 그냥 그 즉시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솔로몬 때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히 임하자 감히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어서 알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교리적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바울 사도가 바울 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와 같이, 그 앞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하는 지식입니다(행 9:4). 예배의 본질은,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영광을 입으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 앞에서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것 처럼 하나님의 존재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계 1:17).
여러분은 이것이 어떤 경험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이런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도 그분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 지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형식적 예배에 만족하고 살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대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예배하기를 사모하십시오. 요한이 본 하늘 예배에 참여하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더욱 알기를 사모하고 그 일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오, 주님! 저희에게도 엎드려 경배할 수 있도록 주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그 영광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로,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존귀하게 여기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은 우리의 기도를 금 대접에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며 당신의 나라를 온전히 세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아버지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통치가 교회와 나라와 온 세상에 임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금향단에서 그치지 않고 피어오르는 분향함과 같이 되게 하십시오.
본문을 통해서 주께서 주시는 세번째 교훈은, 우리의 영원한 찬송의 주제는 죽임을 당하사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신학적 명제나, 교리적 진술에 그치게 만들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엎드리며 찬송하게 해야 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참지 못하고 어린 양께 찬송을 터뜨린 것처럼, 주님은 그런 찬송을 우리로부터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엎드려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십시다.